2009. 4. 10. 14:18ㆍ07-08' 인디언밥
<me> 사유를 촉발하는 몸, 움직임, 그리고 눈빛으로서의 춤
- 김민관
- 조회수 487 / 2008.09.10
프린지에서 ‘김윤정’이라는 무용가를 만나다
작년 변방연극제에서 김윤정의 작업 <book>을 본 이후, 두 번째 다시 만난 그녀의 새로운 작업으로 설렜었다. 주로 해외 레지던스 형태로 작업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그녀의 작업을 한국에서 만나 보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김윤정’하면 보통 사람들이 베케트의 방의 김윤정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닐 듯싶다. 그렇지만 내년 1월까지는 한국에서 작업할 거라는 그녀의 말마따나 한동안은 한국에서 창작하고 작품을 선보이게 될 날을 기대해 봄 직하며, 적어도 한국에 김윤정이라는 무용수는 두 명 이상 있는 것이다.
영상 : 이것은 무대를 넘어서는 일상입니다
showing과 doing을 구분해서 작업을 만들어 간다고 했던, 전 작품 때 했던 이야기가 이번에도 역시 유효해 보인다.
관객들은 먼저 그녀가 제시하는 영상을 보게 된다. 영상 앞에서, 보는 관객을 보는 그녀가 있다. 단순히 본다가 아니라 관찰하는 모습으로서 그녀가 있다.
영상에서 길이나 숲 한가운데의 여러 장소에서 땅에 웅크린 채 누워 있는 모습으로서 그녀가 여러 번 발견된다. 전후 맥락에서의 타인과의 관계맺음이 없으므로, 이는 유기된 자아라는 어떤 설정된 이야기가 있기보다는 그 순간 자체의 현현적인 제시에서 출발하는 그녀 모습의 한 단면에 가깝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일종의 그녀 작업 노트로 놓고 본다면, 그 가운데 "내가 가지고 있는 행동은 실상을 창작하나 이는 하나의 삶의 형태이다."라는 말처럼, 이 작품은 무대 공연화로서의 춤과 일상의 간극을 전제로 두거나 방치하지 않고, 그녀 현 시점의 계보학적인 측면으로 구성되고 있다.
영상 속 춤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춤은 자연스럽고 급하지 않으며, 크거나 거세지 않지만 음악적 리듬이 내재한 유연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누워 있는 그녀의 신체는 움직임이 없지만, 오히려 보는 이에게 조금 더 사유를 촉발하게끔 한다.
‘길의 한 가운데에, 신체 그리고 움직임.’, ‘클로즈업해서 그녀를 보여주다가 멀찌감치 떨어져 그녀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영상.’
하나의 점, 순간으로서의 일시적인 자아의 모습이 홀로 떨어진 그녀의 모습이라면, 조금 더 견고하고 영속적이며 커다란 공간으로서 세계는 담담히 있고, 그 속에서 움직임 역시 담담하게 투영된다. 삶의 구불구불한 경로에 한 점, 그리고 순간들의 집합은 바로 내가 되면서, 일시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는 아카이빙으로서의 한 측면으로 담담히 처리되게 된다.
약간의 경사진 언덕을 두 팔을 머리 위로 뻗고 하염없이 굴러 내려가거나, 춤을 추거나, 누워 있거나, 그것은 담담하다. 한편으로 일종의 일상의 편린들을 결합한 아카이빙이기도 하다. 작가 노트에서 “...이 작품은 다큐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움직임의 나열, 움직임의 설치 공연이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이 작품은 몸이 어떻게 설치되고 있는가를 찬찬히 따라가는 작품일 수도 있다.
음악 : 사유에서 촉발된 몸
영상이 그치고 몇 번의 음악이 바뀌고, 다시 정적을 유지하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된다. 음악은 그녀 내면 안에 머물러 있다. 즉 음악에 대해 가만히 서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사유되는 동시에 사유하는 그녀 신체에 대한 주의에서 비롯된 미세한 그녀 감정과 사고의 추이에 집중하는 가운데 음악은 부수적이면서 연결되어 있다. "쇼",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등 대중음악이 소구하는 감정적인 흥취는 리듬과 멜로디의 단순한 조합으로 분해되며 무력해지는 느낌이다.
쇼가 나오는 과정에서는 옷을 팔 한 씩 벗어 다시 입거나, 바지 한쪽을 벗었다 다시 입는 신체를 전시하는 움직임이 나오지만, 음악이 멈춘 후, 불이 꺼지고, 그녀가 위치한 공간에 조명이 비출 때에야 움직임들은 본격적으로 구체화된다. 또는 음악은 그녀의 신체의 리듬을 부여한 채 움직임을 끌어내게 한다. 즉, 음악에 조금씩 반응해 가는 신체는 음악이 꺼진 후에 고스란히 남아, 확대된다. 춤의 추동력이 음악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작은 몸의 반동은 분명 춤이 되고 있었다.
음악 이후에는, 무대의 반경을 재듯, 한 발 한 발 천천히 가면서 움직임들을 직조하며, 그러면서도 시선두기의 엄밀함을 잃지 않는 그녀는 공간이 달라짐, 신체의 위치의 달라짐에 따라 시선의 각도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공간을 마주함으로서 새롭게 위치하는 신체를 부각시킴을 거듭한다. 움직임은 느리고 반복된 움직임의 위치지음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동작들도 허투루 놓치지 않고, 각인되게 되는데, 그것의 동선을 보며 확인하는 것은 곧 위치에 따른 추이와 미세한 변화에 반응하고 있음이라.
기억 : 일상으로 돌아가는 지점
마지막 노래는 "Song For You Far Away"라는 재즈곡인데, ‘This is song for you far away’라는 가사가 계속 반복됨이 인상적이다. 이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는 아니기에, 이 가사를 강조하며 드러내는 것인데, 일종의 자신의 발언을 대신하는 인용적인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노래를 가만히 입으로 따라하고 있었고, 비로소 공간의 틀을 한정짓지 않는 약간 느슨한 경계로서의 편안한 춤이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용수 자신에게는 어떤 추억 같은 관련을 맺고 있는 특별한 노래임을 은연중에 드러냈는데, 실상에서 벗어나 기억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일상과 무대의 경계가 주로 showing을 통한, showing에서의, thinking으로 이어지며 지워지는 것과 함께, 음악은 그녀의 내밀한 또는 유기적인 어떤 형식 속에 한 부분을 형성하는 기억으로서, 몸에 밴 습관적인 익숙함 따위로서 일정 부분 일상으로 되돌리며 무대의 간극을 해소하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나 마지막 부분의 노래에 대해서 그녀 스스로의 약간의 도취가 보였고, 그것은 몸의 열띤 반응이 아니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몸을 들썩이게 하는 흥취가 있었다.
관점 : 소진되는 춤의 물살을 타지 않는 방식으로...
사실, 그녀의 안무는 너무나 명확해서 오히려 사유를 촉발한다. 많이 추지 않지만, 그것은 절제된 채 힘을 발휘한다. 한 순간의 뜀박질로 무대로 화하는 모습도 아니며, 감정을 주관적인 표현주의로 풀어내는 것도 아니다. 주제와 메시지를 함부로 강조하거나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의 반추, 그것이 실은 알 수 없는 표현임을 인지하는 식으로, 춤과 예술의 근원적 주제로 돌아 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시선과의 간극, showing과 doing의 분명한 간극을 인지하고, 용감하게도 그것을 무대에 선명히 그것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업에서 특히 더욱 두드러진 인식은 춤은 추어지는 것임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거나 탄생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음일 것 같다.
단순히 추어진다고 춤인가? 춘다고 춤인가? 적절한 공간에 춤의 강약을 조절하며 극적 효과를 끌어올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의문들은 그녀 스스로 갖는 의식에까지 도달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런 생각들로 원점에서 춤이라는 것에 대해 재검토하게끔 하는 것들이 분명 그녀의 춤에 담겨 있었다.
보충설명
작품명: 미-Me
일 시: 2008년 8월 29일-30일
장 소: 상상마당-씨어터제로
안무|무용수 김스창(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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