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1회 바닥소리극 페스티벌 <대한제국 명탐정 홍설록-귀신테러사건>

 

제1회 바닥소리극 페스티벌

제주도의 소리, 해녀들의 암약

<대한제국 명탐정 홍설록-귀신테러사건>

 

글_율

 

기억은 이미 지나가버린 사건에 대한 회상을 기반으로 한다. 먼저, 어떤 것을 떠올려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이 단계에서 멈출 수도 있지만 그것과 관련된 여타 기억들을 연달아 떠올려내는 회상의 작업이 이어질 수도 있겠다. 몰랐던 사실을 배우는 것, 그리고 잊었던 사실을 떠올려내는 것은 분명히 다르면서도 비슷한 지점이 많다. 촉발 지점이 외부와 내부라는 점에서는 분명히 둘은 다르지만 무엇인가가 지나간 흔적, 자취, 궤적을 좇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잊혀지는 것들이 있음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잊혀지는 것, 망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질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망각이 행동 주체의 ‘잊어야겠다’라는 결심 하에 일어나는 과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무관심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망각된 것들은 사회 속에서 발언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은닉된다. 이는 곧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탈색시켜버린다. 색채가 점점 옅어지다 휘발되듯, 망각된 대상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명탐정 홍설록-귀신테러사건>(이하 <홍설록>) 속에서는 우리가 몰랐던/잊었던 두 가지의 소재가 등장한다.

 

 

<홍설록>의 시공간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당대의 제주도다. 이야기는 홍설록이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귀신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기 위해 만나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극의 서사 구조는 셜록 홈즈를 연상시킬 법한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을 법하다. 이야기는 몰락양반인 홍설록이 다시 출세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귀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하고, 그 과정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일련의 전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극에서 주목할 법한 부분은 ‘제주도 해녀의 항일운동‘이라는 점에 있다.

제주도 소리와 문화는 한반도 여타 문화권들과도 확연히 다른 요소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콘텐츠로 다루어진 적은 몇 없는, 아직도 발굴할 만한 요소들이 많은 분야다. 그리고 연극 속에는 제주도의 소리와 해녀문화에 관심을 표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우선 시작과 끝부분에 나오는 노래는 실제로 제주도 해녀들이 부르는 노동요다. ‘이어도사나’라고도 하는 이 노래는 해녀들이 물질을 나갈 때 노를 저으며 불려진다. 노 젓기는 고기작업에 필요한 여러 작업들 중에서도 가장 힘겹고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한반도 해안지역에서는 노 젓는 소리가 전래되어 오고 있고, 또한 지역마다 특색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다수의 사공들이 남자였다는 점과 달리 제주도의 해녀들은 여성임과 동시에 배를 젓고 나아가서 ‘직접’ 물 속으로 ‘들어가서’ 일해야 한다는, 즉 죽음의 공포를 온 몸으로 체감하는 것과 노동의 방식이 이어져 있다는 차이점은 ‘이어도사나’가 다른 노 젓는 소리들과도 큰 차이점을 가지게 만든다. 해녀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동시에 보여주는 소재인 셈이다.

또한 연극 속의 해녀들은 종결어미 ‘-마씸’과 같은 제주 방언을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고, 설록과의 대화 장면에서도 숨비소리와 같은 해녀들의 생활 문화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해녀 공동체 내의 위계질서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해녀들은 연륜과 나이에 따라 계급이 나뉘어지는데, 이는 일방적인 군림과 복종으로 짜여진 관계가 아닌 배려와 존경심으로 결속된 느슨한 관계이다. 해녀들의 노동은 늘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이루어지기에 조언과 도움은 필수적인데, 연극 속에서도 그런 공동체의 모습이 여실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해녀'라는 인물이 소리, 문화, 언어 모두 세심하게 짜올려졌음을 엿볼 수 있었다.

 

 

국악은 크게 정악과 민속악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민속악 중에서도 널리 연행되는 것들은 판소리와 민요로 다시 재분류 할 수 있다. 판소리는 남도 지방의 문화와 창법을 다수 사용한다. 그리고 지금 민요 연행 부문에서도 경기 혹은 서도 소리의 지분이 많음을 고려하면, 그리고 제주도 문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색을 생각해본다면 <홍설록>과 같이 새로운 지역에 대해 조명해 보는 것은 무척 소중한 시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극에서 흥미로웠던 도 다른 지점은 무장 투쟁 방식 이외의 독립 운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년이 광복 70년이란 점과 맞물려 여럿 항일 운동 및 친일 청산, 역사의식과 관련된 논의들이 사회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독립 운동을 다루는 콘텐츠의 다수는 적극적으로 무기를 들고 투쟁했거나 혹은 정치적 행보를 통해 활동했던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항일 운동이 행해졌던 다양한 모습들 중 단편적인 부분만을 주목하는 것에 불과하다.

국가는 국민을 기반으로 하는 대규모의 공동체다. 그 공동체 속에는 무언가를 추진하고 이끌어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삶 자체가 버티어나가는 것인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사실 후자의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는 다수의 사람들이다. 소소하게나마 살아나가길 바라는 보통사람, 바로 뭇사람이다. 뭇사람들의 항일 운동 행적에도 주목을 해야 하는 것도 이 부분에 있다. 그들은 그들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생활 너머에 있는 신념을 추구했다. 이는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 행위를 한 친일파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일본인 자본가와 뱃주인들이 행하는 횡포에 대해 결탁하여 일으킨 항일봉기이자 노동투쟁이었던 ‘제주잠녀항쟁’이 있었다. <홍설록>도 이 항쟁에서 모티프를 따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극 중에서 해녀들이 야학을 다니고, 일제에 대항하여 귀신으로 분장한 뒤 교란 작전을 벌이는 모습은 극 내 친일파 인물이 앞으로는 영어를 좀 배워야겠다고 말하는 모습과 대립된다. 이는 친일 행위가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고 한 것이라고 변호하는 현 시대의 몇몇 무리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주인공 또한 아편 중독자에 일확천금을 꿈꾸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모습을 통해 연극에서 뭇사람, 민초들이 이룩해 냈던 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극은 무거운 소재를 가져오지만 그것을 결코 무겁지 않게, 오히려 발랄하게 풀어낸다. 이야기에는 애니메이션과 밴드의 연주, 그리고 마임도 곁들어진다. 관객층이 다른 국악 공연들과 다른 점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전통 음악 어법을 따르는 국악 공연의 주요 관객층의 연령대는 무척 높다. 그리고 국립극장 등, 보다 더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어법을 조금씩 바꾼 공연에서는 청장년층의 관람객 비율도 높다. 하지만 <홍설록>에서는 관람객 연령대가 더 내려와 아동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낮은 연령대의 관객들이 별 어려움 없이 볼 수 있었던 점은 쉽게 풀어 쓰려고 한 흔적이 보이는 사설(하지만 제주도 방언은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애니메이션과 밴드의 연주, 마임 등으로 이루어 질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쉬운 지점 또한 존재한다. 우선 판소리 특유의 발성방법으로 부르는 노래보다 뮤지컬과 같은 창법으로 부르는 곡들이 다수였다는 점은 이 공연을 판소리극이라고 불러야 할지 조금 의문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큰 아쉬움은 음향기기 측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소리를 하던 도중 고음으로 올라가는 부분에서는 마이크가 성량을 감당하지 못해서 소리가 갑자기 뭉개지거나, 발음이 잘 안 들리는 부분이 있었다. 또는 일반적으로 내쉬는 숨소리겠지만, 마이크 때문에 그것이 너무 크게 들리는 때도 있었다. 이는 배우의 문제라기보다는 음향기기의 한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향기기의 도움을 받았던 것은 소리 공연에 적합한 공연장이 많지 않기에, 어쩔 수 없었기에 내려진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판소리가 서구식 연극무대로 들여오면서 생겨난 문제점이다. 오늘날에 대규모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마이크를 빌려서 연행하는 것과 달리, 판소리는 원래 기구의 도움 없이 무대 위에서 창자 단독으로 노래를 통해 사설을 풀어나가던 소리예술이었다. 하지만 현대 공연 양식이 들어오면서, 창극의 변천 과정에서 살필 수 있듯 판소리 또한 다른 연행들도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는 듯한 시류에 편승했다고 볼 수 있다. 소리의 규모와 연행공간의 규모가 잘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지점이 여기서 오는 것 같기도 하다.

 

 

회상은 비단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조건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행위다. 또한 집단적 회상은 또 다른 현상을 가져오는 촉발제가 된다. 기억은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개념이다. 새로운/떠올려낸 기억은 여타 다른 기억들 사이에 기워져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이는 외면적인, 피상의 기억을 넘어서서 직접적, 내면적 기억으로 이어지게끔 만든다. 이런 점에서 공연, 텍스트는 결코 개인적이지 않으며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축적하고 다시금 발현시켜내게 만드는 축적물이다.

그것이 새로운 소재,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기억들을 먼지를 닦아 내보인다는 것이 중요한 작업인 것의 이유이다. 공연 속에서 전달된 의미들은 쌓인 채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억들과 마주치고 조응하며 성장한다. 앞으로 이와 같이 국악 공연에서도 숨겨져 있는 소재, 대중들이 잊고 있는 존재에 대해 보여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홍설록>은 판소리극이라고 부르기보단 음악극이라고 부름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판소리를 즐길 수 있는 연령대를 넓히는데 성공했고, 소재에 깊은 관심을 보였음이 여러 군데에서 보였다는 점에서 높게 사고 싶다.

  

* 사진제공_바닥소리

**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badaksori.com/

 

 

  필자_율

  소개_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