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감각의 LIVE<비온새 라이브>, <윤리의 감각>

2017. 8. 24. 08:40Review

 

세월호 2017

감각의 LIVE

<비온새 라이브>, <윤리의 감각>

 

글_권혜린

 

'세월호' 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 말로 하기 전에 몸으로 먼저 느껴지는 묵직함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같은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을 환기하는 차원은 각각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것은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쉽게 치유되지도 않고, 잊히지도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반복하고, 상기하고, 기억할 뿐이다. 연극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이번에 <세월호 2017>이라는 주제로 열린 혜화동 1번지 6기 동인 기획초청공연 시리즈 중 <비온새 라이브>/<윤리의 감각>은 마지막을 장식했다. 두 작품은 세월호를 이야기하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건을 기억하고자 한다. 이를 거칠게 반(半)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의 현실인 것 같으면서도, 늘 있었던 현실인 느낌이 동시에 든다. 또한 두 작품 다 제목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감각의 라이브’가 느껴졌다. 사유나 생각보다는 감각에 집중해서 사건을 그렸던 것이다. 세월호라는 사건은 늘 현재진행형으로, 라이브한 감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섣불리 과거에 묻어 버리거나 해석해 버리는 순간 지금의 현실과 쉽게 갈라서게 될 테니 말이다. 15분간의 인터미션을 포함해서 공연 시간이 다소 길었지만 두 작품 모두 몰입해서 보았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기억하기 : <비온새 라이브> 이양구 작, 신재훈 연출, 극단 작은방

 

사건 이후, 남아 있는 이들은 사건을 어떻게 겪어내고 있을까? 이 작품에서 ‘홍수’는 물로 인한 재난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작품의 현실이자 실제 사건의 상징처럼 보인다. 반복된 홍수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마을에서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경계에 있는 라이브 주점 ‘비온새 라이브’에 고등학생 진아가 남아 있다. 정전되어 촛불을 켜 놓고 음악을 틀어 놓은 채 진아가 고립된 동안 진아의 엄마 온새는 홍수 때문에 강 건너에 있고, 온새와 동업자인 친구 경애가 진아에게 온다. 진아와 경애가 함께 곰팡이를 청소하고 있을 때 마을 이장도 오지만 이장이 오자마자 한 것은 뉴스에 수해 상황을 생중계하는 것이다. 엉겁결에 인터뷰하게 된 경애는 근본적인 대책으로서 다리를 새로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울한 상황이지만 분위기는 밝은 편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닥친 위험인 홍수라는 자연재해가 반복된 것이기 때문에 유난스럽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재난 이후에도 재난이 계속 겪어야 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당장 수해를 복구하는 등 재난을 일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밝음의 이면에는 말 못 할 속사정들이 많다. 홍수 덕분에 진아는 학교에 가지 않아 좋아하지만, 이는 단순히 학교가 싫어서가 아닌 듯하다. 분명 진아는 학교에서 어떤 사건을 겪었던 것 같은데 끝까지 그 사연이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가게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온새 역시 ‘계속 오고 있는 존재’로서 인물들의 말 속에서만 등장할 뿐 실제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백들을 그대로 끌고 가면서 그 공백 대신 극을 채우는 것은 여러 가지 소리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소리는 “영혼이 건너가는 것”을 보여주는 아카펠라이다. 이와 더불어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벌레의 소리, 새 소리는 분절되지 않는 감정들을 전달한다. 이 연극을 ‘어둠 속 소리의 향연’이라고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례적으로 도지사가 수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도지사에게 선사하는 이벤트로 아카펠라 공연을 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합심한다. 전에 이곳에 봉사활동을 온 적이 있었던 공무원도 보고서를 쓰기 위해 왔다가 공연에 합류한다. 몸 자체가 악기가 되는 아카펠라는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는 점에서 한마디 말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비록 그것이 위기에 처한 ‘비온새 라이브’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해도, 극의 마지막에서 암전된 뒤에 울려 퍼지는 아카펠라는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이는 사건 때문에 목소리조차 남지 않은 이들을 위로하려는 듯하다. ‘비온새 라이브’가 정전되었을 때 전기 감지기에 비유하면서 살아 있는 이들 중 소리가 안 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목소리 없는 이들이 아니라 감지기가 잘못되었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의을 보여준다. 목소리를 못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목소리를 음 소거 한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비록 도지사는 공연을 못 보고 떠나지만 이 마을을 특별재난구역으로 선정하면서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할 때, 이곳을 휴양지로 생각하고 마을 사람이라는 정체성도 없이 방관자로 있던 별장 사람들이 수해 복구 작업을 돕고자 할 때, 내용을 알 수 없는 진아의 사연이 공무원이 올리는 보고서에 덧붙여질 때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홍수에 떠밀려간 이장 부모의 무덤에서 유해를 수습했을 때 “한 사람의 것이 아닌 뼈”로 살아 있었던 흔적들이 모였을 때, 특히 여러 사람의 뼈라는 것을 알고도 온새가 그 뼈를 한데 모았을 것이라고 할 때 한 줌의 희망이 드러난다. 온새는 이 작품에서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존재인 셈이다. 이는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강에 있다고 하면서 직접 세월호를 암시하는 말과 중첩되어 겹의 사건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극 속에서 안 보이면 안 돌아올 것 같다고 하는 것은, 반대로 계속해서 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런 점에서 어둠 속에서 울리는 아카펠라는 목소리를 보이게 하려는 행위에 해당 것이다.

 

 

사유의 실패, 감각의 환기 :<윤리의 감각> 구자혜 작,연출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이 작품에서는 세월호를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가해자’에 집중함으로써 사건의 책임에서 가해자를 결코 제외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국가는 잊었지만 잊을 수 없었던 죄’를 단죄하기 위해 헌터가 가해자들을 찾아다닌다. 증거물은 가해자가 15년 전에 99명의 피해자를 죽이는 현장을 담은 사진 하나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헌터가 스위스로 탈출했던 마지막 가해자를 찾아냈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마주 보면서 심문이 시작된다. 헌터의 머릿속에서 가해자는 늙고 초라한 모습에 치매까지 걸려 헌터를 아들로 착각하지만, 실제의 가해자는 이러한 상상을 배반하듯 여전히 아름다우며 당당하다. 고통이나 죄책감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으며 헌터를 조롱하듯 가해자에 대한 그의 상상력이 ‘후지다’고 이야기한다. 10년간 가해자를 추적해서 고국에 송환하여 법정에 서게 하는 것이 목적인 헌터에게 이러한 가해자는 난제나 다름없다. 게다가 가해자는 오히려 자신을 기록해 달라고 한다. 자신이 고국으로 송환되는 과정을 기록해 달라고 한 것이다.

 

 

이제 주도권은 가해자에게 넘어간다. 기록자가 된 헌터는 묘한 위치에 처한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가해자를 데려가는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가해자를 기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가해자의 기록은 과거에 저지른 공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대화하고 키스하고 영화를 관람하는 등 지극히 사적인 장면들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앞에 덧붙이면서 그것이 가해자가 송환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겪을 수 있는 사적 경험이라는 말들을 하지만 이는 ‘가해자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가해자의 감정을 짐작하거나 공감하게 될 수도 있다.

가해자는 자신이 평생 생각을 했다고 강조하지만 이러한 사유는 실패한다.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생각했던 가해자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답을 찾았을 때 남은 것은 ‘윤리의 감각’이다. 가해자는 답을 찾기 위해 고국으로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상상하는 것은 오만이라고 했던 가해자에게 더 이상 질문이나 사유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느낌, 감각이다. 극 속에서 헌터, 가해자, 우연히 만난 남자가 비행기에서 난기류를 만났을 때 난기류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무서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주관적인 차원이 된다. 그리고 헌터가 난기류를 무서워할 때 가해자가 꼬리 물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은 가해자가 여전히 사유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해자는 사유하는 대신 느끼면서 무너진다. 그 느낌은, 그 감각은 비로소 피해자를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피해자의 고통이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고통이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것을 느끼는 가해자는 어느 정도 윤리적인 감각을 느끼는 셈이다.

 

 

그러나 “이제야, 마침내, 비로소” 고통스러워하는 가해자를 보면서 오히려 불편해졌다. 가해자가 숫자를 셀 때 99명의 피해자에서 끝나지 않고 100까지 센 것은 자신 역시 또 하나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감정에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신 역시 괴로웠고, 고통스러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을 던져 보고 싶어진다. 가해자가 그렇게 함부로 편해질 때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함부로 편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관객의 입장에서 던질 수 있는 또 다른 ‘윤리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사진제공 _ 혜화동1번지 (윤리의 감각_촬영 김도웅)(비온새라이브_촬영 전진아)

**혜화동1번지 SNS 페이지 바로가기_https://www.facebook.com/hhdlab

 

 

 필자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http://blog.naver.com/grayhouse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