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권리장전2017국가본색_씨어터백 <문신> ‘국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2017. 8. 21. 08:29Review

 

‘국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문신>

극단 씨어터백

 

 

글_고수진

 

2016년 겨울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국민들은 너나없이 이렇게 외쳤다. “이게 나라냐?”

 

과연 나라는 어떠해야하기에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 ‘권리장전2017_국가본색’의 첫 번째 작품 ‘문신’(극단 씨어터백)은 그 답 찾기를 가족에서 시작한다.

아니타의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룰루 이렇게 네 명이다. 아버지는 아니타에게는 자상한 듯 보이지만 부인과 둘째 딸에게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이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책을 나눠주며 말한다. “먹자.” 가족들은 그 책을 맛있게 읽는다. 아니 맛있게 읽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선택권도 없고,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다. 식사가 끝나면 아버지는 아니타를 데리고 산책을 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며 어린 아니타를 성적으로 유린한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달콤한 논리에 어린 아니타는 아버지에게 몸을 맡긴다. 아니타의 희생으로 가족은 평온한 듯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니타는 이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온 몸으로 느낀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찾고 싶은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소외계층의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 온 독일작가 데아 로어의 92년 작 ‘문신’은 근친강간이라는 충격적 소재를 무대로 가져온다. 심지어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들을 강간하고, 엄마는 그 사실을 묵인한다. 희생자인 딸들의 정신과 육체에는 지워지지 않는 폭력의 문신이 새겨진다. 아버지와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나라에서 국가는 거대한 가족이다. 통치자는 국부, 국모로 국가의 가장을 자처하고, 국민은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된다. 그러나 2016년 대한민국 국민이 그랬듯이 아니타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국민은, 아이들은 그저 가장의 일그러진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다.

엄마와 여동생 룰루는 아니타가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막으려 하지 않고, 외부에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가부장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기심이 있다. 줄곧 검은 마스크를 쓰고 등장하는 엄마는 자신이 말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개처럼 행동한다. 딸을 내보내고 남편의 사랑을 되찾고 싶어 하면서도 아니타가 남편의 비위를 맞춰주길 바란다.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둘째 딸 룰루도 언니가 없으면 다음 희생자는 자신이 될 것이라며 아니타를 방패막이로 삼는다.

 

 

가족 내 폭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흔히 가정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작가는 묻는다. 그 폐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구성원들이 스스로 둘러친 이기심의 울타리가 아닌가? 우리는 국가의 잘못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에게 당연한 듯 희생을 요구한다. 지난 몇 년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쏟아진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쯤은 감내해야 한다.’는 요구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아니타에게 쏟아지는 그것과 일치한다.

‘문신’의 가족을 지탱하는 것은 ‘가족은 지켜져야 한다.’는 명제다. 부모는 절대 자식을 버릴 수 없고, 자식은 절대 부모를 거역할 수 없다. 자식은 부모의 일부고 흔적이다. 가족은 깨져서는 안 된다. 아니타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자 식구들은 모두 반대한다. 아버지는 아니타가 떠남으로써 자신이 애써 이룬 완벽한 가족이 깨질까 격노한다. (무대에서 가족들은 늘 원을 이루고 있다. 아니타가 없으면 이 빠진 동그라미가 된다.) 엄마와 룰루도 가족의 붕괴를 걱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는 아니타도 가족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아빠는 너 없이 살 수 없다”는 엄마의 읍소와 “언니가 떠나면 나도 집을 나가버리겠다”는 동생의 협박에 꼭 끌어안았던 짐가방을 내려놓는 아니타.

극에서 아버지가 식구들에게 끊임없이 주입하는 기형적인 가족이데올로기는 권력자에 대한 우상화, 검열된 역사와 지식의 강요 등 우리사회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아니타는 아버지의 폭력과 함께, 그의 왜곡된 논리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감에 빠진다. 자신이 있는 곳이 지옥임을 인지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가족. 어쩜 아니타와 우리는 같은 경험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니타를 구원하는 것은 남자친구 파울이다.(아니타에게는 스스로 그 곳을 빠져나올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타는 파울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온다. 그러나 뱃속에는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기가 태어났지만 파울은 아니타가 자신의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 파울의 손길을 밀쳐내는 아니타에게 파울은 묻는다. ‘그 때 왜 거부하지 않았지?’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책임을 전가하는 바로 그 질문, ‘왜 거부하지 않았나?’이다. ‘너에게 새겨진 문신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거야’ 아니타를 보호해주겠다고 말했던 파울은 이제 아니타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 순간 파울은 이미 아버지이다. 파울은 ‘내 아이들(아니타와 그녀의 아기)’을 되찾으러 온 아니타의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제 아니타는 자신의 엄마처럼 몸을 긁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가족이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니타에게 파울은 총을 내민다. 아니타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지만 이내 방향을 바꾼다. 아니타는 팔을 뻗어 총을 쏜다. “빵!”

그녀는 아버지를 죽였을까? 그녀가 쏜 것은 어느 아버지였을까? 어쩌면 인간은 영원히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떠나도 다시 새로운 아버지를 찾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다.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아버지이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성장시켜주는 가족이다.

 

 

아니타의 엄마는 아이들을 돌보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그녀는 아버지의 개가 아니라 배우자로 존재했어야 한다. (엄마 역은 남자배우가 연기한다. 엄마는 아버지와 동등한 체격을 갖고 있다.) 그녀는 돈도 벌고 있다. 엄마가 부모로서 제 기능을 했다면 아니타도 룰루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이미 아버지의 폭력에 굴복하여 스스로 개가 되기를 택했다. 아버지는 지배자고 나머지 가족은 피지배자다. 엄마가 쓴 마스크는 상징적이다. 불의에 대항하고, 과오를 지적하고, 폭력을 세상에 알려야 할 사람은 어린 아니타가 아니라 엄마다. 그러나 엄마는 입을 막고 그 역할을 포기한다. 어린 딸에게 욕을 먹고 무시당하면서도 개가 뼈다귀를 핥듯 아버지가 던져주는 원초적 손길에 만족하며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친다. 다시 한 번 기시감이 든다. 의회, 언론 등 권력을 견제하는 시스템이 마비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극단 시어터백은 첫 번째라는 부담을 떨치고 프로젝트에 걸맞은 정치적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관객에게 던진다. 효과적인 소품 사용과 절제된 연출, 배우들의 호연은 소재의 자극성을 극복하고 가족과 국가의 중첩된 이미지를 관객에게 선명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관계의 폭력성에 주목하는 데아 로어의 작품세계를 충실하게 구현해냈다.

과연 ‘국가의 본색’은 무엇인가? 무대 위에 펼쳐질 나머지 스무 개의 답안지를 기다리며 권리장전2017의 성공적인 완주를 빌어본다.

 

*사진제공_권리장전2017_국가본색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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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고수진

 소개_연극분야 글을 주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