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18. 09:45ㆍReview
축제가 산책이 될 때
어슬렁 페스티발 Earth Run Festival
(2017 잔다리 골목페스타)
@상 수 동
글_김솔지
10월 14일 토요일. 어슬렁 어슬렁 나가 놀다.
상수동 집에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 나갔다. ‘어슬렁 달리기’라는 그 어색한 경주를 구경해보고 싶었는데 어슬렁거리는 통에 그것도 끝나버렸다. 기점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제비다방으로 걸어간다. ‘제비다방 회의실’에 들러본다. 벼룩시장이 막 시작되었나 보다. 헤나는 무료고, 타투는 유료. ‘흥이 더 오르면 해봐야지, 이러다 못하겠지…….’ 맞은편으로 길을 건넌다.
3:00 “제 무대는 잊어주세요!” 박정우 @탐라식당
탐라식당 야외테이블에 앉은 박정우로부터 노래가 흘러나온다. 막 시작한 것 같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고, 하나 둘씩 모여든다. 이따금 차들이 지나가고, 지나가던 할머니도 잠시 멈추어 선다. 아직은 환한 토요일 오후, 싱어송라이터 박정우는 사뿐사뿐 개성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이어나간다. 제목 없는 노래의 한 구절, “당신이 깨어있으면 좋겠어”에서 투명해지는 나를 만난다. 자작곡도, 커버곡도 듣고 30분간의 공연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후에 나올 앨범이 기대된다.
3:30 솔티독 한 잔 @그문화 다방
‘그문화 다방’에 들러 칵테일을 한 잔 마셨다. 커피는 마시고 왔으니 가벼운 술로 흥을 돋운다. 친구는 읽고 있던 책을 바라보며 ‘비지(非知, nonknowledge)’에 대해 얘기해준다. 청자인 나는 물론 단순하고 왜곡되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잉여(또는 잉여 에너지)보다는 그 잉여가 순전히 바스러지길 바랐던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입장을 친구의 해석을 통해 고민해보는 시간도 잠시 가졌다.
잉여를 바스러트린다는 것은 단순히 그 과잉된 에너지를 쪼개서 기존의 한계 안으로 재편입시키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유보 없이 순전히 낭비해 버리는 쪽에 가깝다고, 이야기가 흥미로워 계속 이해를 시도해 보았다. ‘어슬렁 페스티발’도 꽤 높게 쌓인 어떠한 잉여들이 개별적으로는 작은 형태들이었지만 동시다발적으로는 작지 않은, 그렇게 잉여가 소모된 즐거운 낭비 시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지식의 한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재사용도 없는 소모의 하루. 이런 괴짜 이해를 들은 친구는 “이제 시간이란게 우리에겐 너무나 귀한 것이 되어 버려서 어슬렁 같은 소소한 낭비조차 쉽지 않게 된 것 같아”라고 나의 생각에 맞춰 대화를 이었다. 검둥이 개가 산책을 나간다. 나도 다시 구경을 나선다.
4:30 스트릿 요가 하는 사람들 @이태리 타올
스트릿 요가, 상수에서도 열린다. 요가 매트 위에 사람들이 누워서 선생님의 안내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편안해 보인다. 나도 누울까…….
4:40 도자 벼룩시장 @슬런치 팩토리
몇 걸음을 옮겨, 비건 맛집 ‘슬런치 팩토리’ 야외에 차려진 도예공방 다담의 도자 작업물을 구경했다. 유약이 잘못 발려 나에게는 더 예쁜 잔, 그리고 선물 할 잔 두개를 구매했다.
5:00 지난 여름, 하헌진 @슬런치 팩토리
블루스 뮤지션 하헌진의 무대가 시작됐다. 후다닥 자리를 잡는다. <내 방에 침대가 생겼다네>, <지난 여름>은 평소에도 간혹 즐기는 곡인데, 라이브로 들으니 역시 더욱 좋다. “제발 내게 나를 말해주오”라는 가사가 블루스 선율 위에서 흔들거린다. 5분에 한 곡씩, 30분의 짧은 시간이 흘러 마지막 곡이 마무리 될 무렵, 소음인지, 교통인지 어느 불편함에 경찰차가 멈추어 섰다. 해지는 오후, 마음이 쌀쌀해지기 전에 재빨리 다음 장소로 자리를 옮겨본다.
5:30 “여러분을 매혹하고, 불편하게 해드려요.” 위댄스 @제비다방
위댄스는 요즘 공연을 자주 하는 편이다. 가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가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한 기회였다. 보도블럭에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제비다방 옆 작은 야외무대에 이미 모여 있었다. 마음만은 어슬렁, 몸은 후다닥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민첩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5시 정각! 위댄스의 공연이 시작됐다. 노랫말이 귀로, 여기저기로 전해진다. 춤을 보면서 위보의 노래와 위기의 기타연주를 듣는데, 그 소리 안에 머무는 낱말이 한 줌씩, 한 줌씩 나에게도 쥐어진다. 시간적으로는 한 소리가 지나가고 그 다음 소리가 들어오지만, 말로 남은 소리들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오늘 들었던 여러 뮤지션의 노래 가사는 연례행사로 바뀐 나의 일기, 이제는 써주지 않는 친구의 메모 같았다.
“우리는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해야하는 필요가 있는 것 같애”
“삽도 망치도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텐데”
그나저나 <토이니스>를 라이브로 들으니 너무 신나!
6:00 떨린 듯 안 떨린 듯, 김태춘 @어쿠스틱 갤러리
“첫 버스킹 떨리네요. 돈 같은 거 안 줍니까” 한 곡을 끝내고, 김태춘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돈 대신 피크를 던졌다. 이번 축제 기획의 일부로 상수동 인근 가게에서 어슬렁 피크를 받을 수 있고, 그 피크를 마음에 드는 음악가에게 던지는 이벤트가 진행되었던 것. 거칠고 진할 것으로 기대한 컨츄리 음악가 김태춘의 공연을 처음 접한 나는 진실일지 컨셉일지 모를 그의 떨림 고백으로 인해 그의 노래를 예상치 못한 새로움으로 느끼고 말았다.
이리카페 2층에 자리한 ‘어쿠스틱 갤러리’는 이번 기회에 처음 들어가 본 악기점이었다. 상수동에서 기타와 관련된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는 곳, 최근에 기타를 산 친구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장소를 알게 돼 만족스러웠다. 김태춘은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체크하며, 30분을 꽉 채워 <일요일의 패배자들>, <이태원의 밤>, <용서해주세요>을 이어서 들려주었다.
“너도 나도 집에 돌아가 농약을 마셨네. 쥐를 잡고. 쥐를 잡고. 쥐 잡고 사람 잡고”
7:30 빛나는 찰나를 새겨요, 화양사진관 @제비다방 회의실
버스킹을 한참 보다가, 헤나가 떠올라 제비다방 회의실에 다시 가보았다. 작업 중인 아티스트 옆에 사진사가 두 사람의 인물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오래돼 보이는 중형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는 스튜디오 프로젝트인가 보다. 조명도, 카메라도, 소품도 제대로 갖추었다. 이 기회에 찍혀보기로 했다. 스마트폰, 디지털 카메라와는 다른 형태의 사진은 참 오랜만이었다. 아날로그적이고 일회적인 필름 폴라로이드 형태이니 더욱 그랬다. 화양동에서 화양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가 나빈은 단 한 번의 ‘찰칵’으로 성공해야하는 필름폴라로이드 촬영을 하는 동안 실전 연습도 시켜주고, 포즈도 세밀하게 코치했다. 특히 요즘 생활에서 극도로 밀접하고 많은 기능을 수행하는 사진·이미지를 조금 다른 형태로 체험하는 기회를 한 셈. 반 값 찬스로!
9:00 “토실토실한 엉덩이로 겨울을 이겨낼 수 있어”, 도마 @GS25상수홍대점
유일한 편의점 앞 공연이라 자랑스럽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건넨다. 뮤지션 도마. 베이스는 거누. <사실은 아무 생각 없었어>, <휘파람>, <황제펭귄이 겨울을 나는 법>을 들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 피크를 던지지 않고 조심스레 건넨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부는 밤, 상수동 골목 어느 편의점 앞에서 술에 흥건해 비틀거리던 행인은 발길을 멈춰선다. 그때 가사가 “알아서 찾아가세요. 알아서 찾아 가세요”. 아저씨는 배시시 미소 짓는다.
9:30 김대중 @그문화 다방
어슬렁 페스티벌이 끝나간다. 함께 어슬렁 코스를 이동했던 음악가 김대중의 공연이 그문화 다방에서 시작되었다. 불효자 투나잇을 외치며 <불효자는 놉니다>, 우레옥 평양냉면은 싫어하는 마음으로 <300/30>, 서울에서 부산까지 일직선으로 천리에요 <유정천리>, ‘어제부터 공연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와 모텔에서 묵은 관객을 위한 곡입니다’ <수상한 이불>, 초등학교처럼 다들 가는 그 곳 <요양원 블루스>, 그리고 마지막 곡으로 일본진출을 준비하며 일본어 가삿말이 들어간 <씨 없는 수박>. 물론 시간은 30분을 넘겼다. 노래와 노래 사이의 그의 언변은 문자 그대로 찰지고, 관객들도 이따금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외치는, 즉 제한이 극도로 줄어든 그런 분위기가 형성돼 따뜻했다. 하모니카 소리는 내 몸에 진동을 일으키고…….
10:00 “일어나서 즐기자” DJ집 @제비다방
이제 집에 가야하지 않을까, 넓지 않은 상수동을 이리 저리 구경 다니다 보니, 벌써 클럽 입장줄이 생기는 시간이다. 그래도 마지막 공연인 DJ집의 디제잉을 놓칠 수 없어 제비다방 지하로 내려간다. 이끼맨이 춤을 춘다. 즐거워! 모두 일어서고, 마침내 조용히 퇴장.
10:20 어슬렁 어슬렁 집에 가서 쉬자.
가벼운 듯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추구한 이번 하루 동안의 동네축제 ‘어슬렁 페스티발’에는 기획 이전 단계부터 실행, 마무리까지 무수한 이들의 노고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축제 구성에서만 보더라도 30분 단위로 이루어지는 버스킹 음향을 담당한다거나, 촬영을 담당하는 일에는 ‘어슬렁’ 보다는 ‘긴박함’이 더 자주 어울렸을 것이다. 실제로 이번 축제 제목 ‘어슬렁(earth run)’은 우리의 일상과 다소 가까운 모습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슬렁’은 이번 축제에 하나의 태도, 즉 다시 추구할 정서, 함께 나누고 싶은 편안함을 나타내는 모토로서 사용된다.
가을이 되자 상수동, 서교동, ‘홍대앞’ 일대에 크고 작은 축제가 자주 열린다. 이 즐거움이 동네의 극소수만을 위한 축적보다는, 각자의 필요를 채우고 나누는 자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느슨한 시간을 또 기다려본다.
*어슬렁페스티벌 SNS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EarthRunFestival/
필자_김솔지 소개_사회는 예술에, 예술은 사회에 어떤 말들을 던지고, 그 둘은 계속 바뀌어 간다고 얘기한다면, 저의 글은 그 사이에서 본 것들을 또는 그렇게 얻은 말들을 담는 연습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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