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창작집단 푸른수염<달은 아니다>

2017. 10. 27. 07:47Review

 

료코의 발화와 고통

<달은 아니다>

창작집단 푸른수염

 

글_최윤지

 

연극 <달은, 아니다>는 구술하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말하기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발설한다는 것과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의 폭력으로부터 버텨내는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물빛 벽에 둘러싸인 무대, 객석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편에 침대 하나, 그곳에 마이크 스탠드가 설치되어 있다. 무대 가운데에는 흰 테이블이 하나 있고, 오른편에는 작은 책장 몇 개가 있다. 이곳은 편집장 료코가 며칠 째 잠을 자고 있는 병실이자 오키나와의 독립 출판사 '밋둥미챠이'의 사무실이다. 해양공원에서 상복을 입고 쓰러져 있다 발견된 료코의 병실에 '밋둥미챠이'의 동료인 오소라와 히로바, 그리고 료코의 친구 스키가 모여 케이크를 먹는다. 료코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이들은 대화를 이어간다.

 

 

'밋둥미챠이'는 료코를 중심으로 구성된 세 여성의 출판사이다. 료코는 종군위안부의 증언집 '진흙바닥으로부터'의 출간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이 책은 료코가 개인의 노력과 요령으로 이끌어온 출판사의 야심찬 기획이 될 수 있을법한 작품이었으며, 어쩌면 료코가 이곳에 누워있는 이유였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오소라와 솔직한 히로바는 좀처럼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지만 한가지에는 동의한다. 이 증언집의 출간이 료코가 지금까지 온 힘을 다해 이끌어 오던 '밋둥미챠이'의 존속에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리라는 예감이다.

 

료코가 더 이상 없는 '밋둥미챠이', 스러져가는 출판사를 찾은 스키의 손에 책 한권이 들려있다. '자서전'. 료코가 남긴 책이다. 그 책에는 출판사의 마지막 책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하지만 그 문구가 전부다. 책은 텅 비어있다. 자취를 감춰버린 료코, 료코와 운명을 함께하는 '밋둥미챠이'의 사무실에 오소라가 등장한다. 스키는 왜 이 책이 자신에게 남겨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료코가 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오소라도 마찬가지다. 오소라가 스키에게 사라진 동료의 유언과도 같은 테이프를 가져온다. 그리고 붐박스에 테이프를 넣는다.

 

 

료코가 말한다. 친구에게 보내는 이 테이프가 어떻게 될 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자신은 목소리를 남길 뿐이라고. 어느 날 출판사에 종군위안부의 논픽션이 도착하였고, 유려한 문장으로 묵직한 증언이 담긴 이 책을 읽으며 료코는 어떤 소리를 듣게 된다. '큐히히-, 큐히히-.' 이 소리는 료코가 텍스트에 담긴 진심을 판단하는 신체적 반응이다. 읽고 있는 글이 거짓일 때, 진실일 때, 거짓 또는 진실일 때 이를 알리는 기이한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것이다. 료코는 이 소리를 듣고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료코는 결국 증언의 주인공을 직접 찾아간다. 증언의 주인공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었다. 담당의사는 할머니가 소통하는 능력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겪은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직접적으로 발화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붐박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요코의 목소리는 논리를 잃는다. 요코의 목소리에 겹쳐 벽에 영사된 영상은 할머니의 혼란스럽고도 참혹한 증언과 함께 맥락 없는 파편을 전시한다. 입, 광고, 지지직거리는 소리 등, 죽은 친구의 젖가슴을 들고 헤매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파편화된 미디어의 편린들과 겹쳐진다.

 

 

연극 <달은, 아니다>는 망각된 기억의 목소리를 되살려내는 과정에 동반하는 기록이라는 행위가 진실을 재단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또한 구술이라는 행위의 고통스러움을 지적하며 언어라는 체계 안에 존재하는 위계를 폭로한다. 무대 위에 존재하지만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료코는 마이크를 통해, 녹음된 테이프를 통해 거의 토해내듯이 집요하고도 고통스럽게 발화한다. 이 힘겨운 시도가 발화라는 지점이 중요하다.

 

구두로 언어에 도달하기까지 겪는 고통, 모든 여성은 그것을 경험한다. 가슴은 터질 듯이 쿵쿵거리고, 때로는 땅이 꺼지고, 혀가 사라지는 언어의 상실 속에 추락하기도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말한다는 것-심지어 입을 연다는 것-은 여성에게 그토록 무모한 것이며, 위반의 행위이다. 그건 이중의 슬픔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설사 위반 행위를 한다 해도, 여성의 말이 가닿는 남성의 귀는 거의 언제나 귀머거리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귀머거리 귀에 들리는 것이라곤 언어 속에서 오로지 남성으로 말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메두사의 웃음』, 엘렌 식수

 

종군위안부의 구술과 기록에 관하여, 모든 기억이 모두 메아리치는 그곳에서, 구술한다는 행위의 고통을 연극 <달은, 아니다>가 주목한 것은 이 오키나와의 단편소설이 '진짜 역사'를 '말하려는' 시도에서 연극이라는 매체에 의해 확장된다. 배우를 통해 직접 발화되는 기억, 그들의 순간이 관객의 순간과 만난다. 시간의 기억 속에 묻혀버린 낱말과 언어, 과거와 역사를 기술하는 잉크는 쓰이기 전에 가장 진하게 흐른다. 기록되기 이전의 잉크의 냄새를 맡는다. 어쩌면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과 맞닿아있다는 것, 그것을 견뎌내는 일은 어쩌면 우리 모두 해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후루룩 차를 마시는 소리를 들으며 떠올린다. 그렇게 커튼콜은 없었다.

 

 

 

*사진제공_창작집단 푸른수염

**창작집단 푸른수염 웹페이지 바로가기 >>> thebluebeard.net 

 

  필자_최윤지

  소개_연극을 좋아하는 직장인입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읽고 쓰려 노력하지만 일과 병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치 있는 일이라 믿고 오늘도 다시 한 번 힘내 봅니다.

 

 

 

 *작품설명 
〈달은, 아니다〉는 오키나와 독립출판사 밋둥미챠이를 운영하는 세 여자에게 도착한 원고가 빚어낸 일말의 소동에서 출발한다. 편집장 료코는 기록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다. 출판사가 펴내려는 그 원고,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집을 읽어내려가던 그녀는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환청을 듣고, 결국 기록의 주인공인 위안부 할머니를 찾아나서게 된다. 
 
 "이 연극은 타자를 기록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연극입니다" - 안정민 연출
  
 작_사키야마 다미 
 각색/연출_안정민
 번역_조정민
 배우_김신영 윤혜정 손은총 황연희
 드라마투르기_박채은
 기획/홍보_이은재, 이지민
 동작_장해라
 무대_양정우
 조명_윤혜린
 영상_Yonomi 
 음악_Remi Klemensiewicz, 채송화
 소품_박상하

 협찬_디스레트로라이프
 
 후원_서울시 *본 공연은 서울시 서울청년예술단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