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B1, 만남에 대한 이야기

2009. 9. 18. 15:34Review

B1, 만남에 대한 이야기.

                                                                                                                                  권은혜

미지의 세계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도전지구탐험대’, ‘풍물기행-세계를 가다’와 같은 오지 탐험 TV프로나 이따금 특집으로 방송에 나오는 심해탐사 혹은 우주관련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다. 식인물고기 피라냐를 잡고, 이구아나를 구워먹는 아마존의 생활과 심해에만 산다는 거대오징어와 먹이 유인 발광물고기, 토성의 고리와 외계인 등과 같은 신비한 이야기들은 어린 시절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이런 것들을 좋아한 이유는 우리가 발을 딛고 생활하는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긴장과 설렘, 그리고 알 수 없음. 그런 곳에서의 삶과 생활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저 동경했고 가보고 싶었다.
 

아랫도리에서 피를 보고, 머리카락 길이가 ‘귀밑 3cm’를 넘으면 안 되는 나이를 지나오면서 TV속 미지의 세계는 점점 잊게 되었다. 대신 좀 더 현실적인 미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성(城) 같았다. 그들은 벽돌로 만든 작은 첨성대 같은, 견고하고 물샐 틈 없는, 그들 각자의 세계를 꾸리며 살고 있었다. 그 벽은 표면보다 속이 튼튼했다. 더 많은 것을 나누기 위해 부벼대면 댈수록 알 수 없는 것들이 막아서거나 심지어는 튀어나와 공격을 했다. ‘내’가 아닌 사람들. 타자들. 그들과의 관계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을 때 마다 나름의 교훈을 정립했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솔직한 게 최고다’, ‘칭찬은 졸던 고3도 일어나게 한다’, ‘진정한 친구는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친구다’ 등. 그러나 그 교훈을 다른 인간관계와 사건에 적용시키려 할 때면 늘 무참히 깨졌다. 매번 새롭게 깨닫는 것이 생길 뿐이었다. 만남과 관계와 사건 속에는 어떤 법칙도 원리도 없다. 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우리 모두는 타자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는 것’뿐이었다.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타자 없이는 생존할 수도 없다. 어릴 때는 어미, 아비로부터 보호받아야 살 수 있고, 커서는 농부가 되지 않는 이상 농부가 기른 곡식과 채소들을 사먹어야 살 수 있다.



타자들의 이야기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 꽤나 견고한 첨성대다.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가 되고 싶었던 모양인데, 영어시험에서 낙제하는 바람에 대학교엘 못 갔다. 우체부 일을 하며 독학으로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를 뗐다. 그의 첨성대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격지심으로 머리카락 한 올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물론 친구도 없다. 이렇듯 건강하지 못한 그의 지식은 그 스스로가 선택받은 인간인 것처럼 과대망상 하도록 만들었다. 어느 날 그는 결심을 한다. 자신만의, 자신을 위한 의식을 치룰 것이라고. 그는 문방구 앞에서 의식의 제물이 되어줄 사람을 기다린다. 그리고 구두를 또각거리며, 누군가 걸어온다.






한 여자가 있다. 남자보단 덜 치밀한 첨성대다. 박사학위가 있고 한 달 월급이 500만원이나 되지만 9시만 되면 골아떨어져 버리는 지루한 남편을 가진, 일주일에 한번 친구들과 카드게임 할 때만 외출을 하는, 남편과 아이밖에 모를 것 같지만 사실은 현재 자신의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남자는 여자를 납치한다.

납치범과 인질.

그들은 서로에게 완전한 타자다.



만남

납치범과 인질. 처음에 남자는 여자가 조금만 움직이거나 말해도 하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는 그가 이런 저런 철학자와 예술가를 얘기하며 여자를 무시하려 할 때, 예상외로 그와 생각이 통하는 여자의 이야기나, 자신의 남편이 학위는 있지만 할 줄 아는 게 없고 지루하다며 불평하는 여자를 보면서 여자와 맞닿아 있는 자신의 첨성대가 조금씩 허물어짐을 느낀다. 여자도 처음에는 살인이나 강간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서 남자와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점차 진심으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와 비슷한 자신의 속내까지 드러내게 된다. 납치범과 인질이라는 정말로 완벽한 타자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는 순간이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극의 처음과 끝, 중간과 두 번 정도 총 네 번에 걸쳐 꿈속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극장에서의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서로 모르는 사이인 남자와 여자가 영화를 보고 있다. 갑자기 여자가 배꼽이 빠질 듯이 웃기 시작하는데, 영화의 장면은 전혀 우스운 장면이 아니다. 당황한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며 어이없어하지만 계속 웃어대는 여자의 모습에 결국 자기도 배꼽 빠질 듯이 따라서 웃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둘이 맞장구치며 웃다가 갑자기 어디서 용기가 왔는지 남자는 여자에게 기습키스를 한다. 여자는 그 키스를 조용히 받아들인다.


우연 혹은 기적





우리의 대부분의 만남은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미지인 타자를 만나 당황하게 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해까닥, 마음을 주게 되는 그런 방식으로 말이다. 위의 세 가지 만남들은 어떤 이성적인 생각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 극의 마지막에서 즈음에서 납치범 남자와 인질 여자는 함께 밤을 보낸다. 남자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자의 주도 하에. 이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여자는 매주 친구들과의 카드게임을 위해 외출하는 날 남자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러 오기를 약속하며 풀려난다. 여자는 아마 매주 남자에게 올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납치범과 인질이었다가 사랑에 빠지고, 극장에서 처음만나 웃다가 키스하는 극적인 만남은 아닐지라도 우리 또한 늘, 무수히 많은 타자들과의 마주치며 살아간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들과 만난다. 그 견고한 벽을 허물고서 말이다.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은 꿈속 이야기에서 남자가 여자를 따라 웃다 기습키스를 하는 것처럼 예상치 못한 시점에 찾아온다. 우리는 매일 기적 속을 살아간다. 견고한 첨성대들을 맞부딪혀 서로의 돌가루를 교환하면서.


 

글 ㅣ 권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