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8. 15:38ㆍReview
죽음 뒤의 보너스 시간ㅡ 인생의 마이너스를 되돌아보며
창작집단악파의 연극 <49일>
윤나리
얼마 전 TV채널을 돌리다가 본 장면이다. 돈 많은 집과 부모님, 그리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녀는 학교 다닐 적 사업으로 너무 바쁘신 엄마가 졸업식에 오지 못한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곤 돈 많고 외로운 것 보단, 가난해도 가족과 어울리는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며 하소연했다. 나는 곧이어 자연스레 채널을 돌리며 어쩜 저렇게 뻔뻔하고 가식스러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다는 나약한 소리는 오히려 나는 더 갖고 싶은 건 다 가졌는데 왜 사랑은 못 가지냐는 식으로 염치없이 들렸다. 한창 불쾌해있다 나도 또 다시 씁쓸해졌다. 내가 생각하는 진심의 가치관이 참 우습게도 형편없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 <49일>에서 훤칠하게 차려입은 옷과 외모의 한지섭은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TV속의 그녀보다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속물적 가치관을 당당하게 드러내지만 그 당당함뒤에 수치와 회의적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매몰찬 현실세계에 내몰린 듯한, 물질만능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듯 한 한지섭은 그에게 진정한 행복이 진정성은 찾아 볼 수없는 그의 외부를 둘러싼 물질세계라는 지목을 받자 이에 격분해 대답한다.
"세상 사람들의 관계는 '갑'과 '을'로 나뉘지. 하지만 '갑'앞에선 '을'은 사람이 아냐. 오직 그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결과만이 중요해.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그의 포기는 모두 그가 '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됐다. 그를 때마다 합리화시켜줄 수 있는 이 사실은 갈수록 그의 당당한 어깨를 지치게 만들고, 지키고자하는 진실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인생의 가치관이라는 건 애매하게도 어떤 기준이 없다. 내가 맹렬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살든, 내 아이의 행복을 위해 헌신적인 부모가 되든,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며 세계여행으로 수십 수년을 보내든 그것은 내 행동의 기준점이 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모든 사람이 공유하거나 일정한 평가를 할 만한 기준은 없다. 또 사람들의 가치관은 그 시대의 흐름과 차치해둘 수 없다. 매 순간마다 생기는 무한한 의미들은 각자가 지닌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는다.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은 저마다 자유롭게 교육을 통해 혹은 만나는 사람, 자신이 머무르던 장소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이 권위적으로 오로지 '자신이 가진 것-그러나 남에게 줄 수 없는 것'들만을 강요하는 작금의 현실은 많은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연극의 소개에는 "죽음 뒤 보너스 시간을 준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적혀있었다. 우리의 진행형인 인생들을 판단하기엔 성급해질 수 있는 대답들도 '죽음'이란 테두리에서는 가능해진다. 나의 죽음 뒤,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낯선 타인과의 대화는 과연 한지섭보다 덤덤할 수 있을까. 한지섭이 후회했던 것보다 덜 후회하고 더 의미로울 수 있을까? 한지섭의 고백으로 그의 인생은 쓰라린 회고로 맞이되고, 연극은 막이 내린다. 극장을 벗어나는 내 발걸음이 괜히 숙연해지고 무거운 건 아닐 게다. 죽음의 순간, 인생의 끝을 맞이하는 걱정보다 지금부터 남은 인생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될지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내 모습은 연극을 보기 그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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