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3. 15:48ㆍReview
‘목요일 오후 한 시’ 의 ‘거울’을 보고
- 목한시 배우들에게 드리는 글
글 강말금
‘목요일 오후 한 시’ 들과의 만남
프린지 페스티벌이 막을 내렸다. 인디언밥과 맺은 인연으로 이번 페스티벌을 무료로 왕창 누릴 수 있었다. 특히 극장에서 하는 연극/무용 공연을 많이 보았다. ‘잘하는데 아쉬운’ 공연, ‘허술한데 재밌는’ 공연, ‘시간이 안가는’ 공연 (평가라기보다는 그냥 나라는 관객의 반응으로) 등 다양했지만, 나에게는 좋은 것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배우의 모든 공연은 어딘가로 가는 길 위에 있으므로, 그들이 무엇을 향해 어떻게 가고 있는 어디쯤인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내 주제에 그들의 레벨을 잴 수 있다는 말은 아니고, (ㅋ) 그들의 공연이 나의 화두를 톡톡 건드려 주었다는 얘기다.
프린지 페스티벌에서의 첫 만남은 ‘목요일 오후 한 시’들이었다. 공연을 보기도 전에 사람을 먼저 만났다. 원래는 공연을 보고 나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을 예정이었지만, 지각을 해서 극장에 못 들어가고 말았다. 뛰고 길을 잃고 또 뛴 후 삼 분을 초과한 참이라 무릎을 딱 치도록 아쉬웠지만 동시에 흥미도 생겼다. 사람을 보고 공연을 보면 다른 재미가 있겠지?
나와 같이 밥을 먹은 사람은 현수, 홀, 곱슬, 서진, 해리지였다. 누구는 죽을 먹고, 누구는 반계탕, 또 누구는 밥 대신 맥주를 먹었다. 프린지 관련 만남이라 식권이 나왔다. 프린지 관련 만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인디언밥 필자로 나와 같은 입장이었던 나리씨와 나)의 목적은 밥을 앞에 두고 그냥 그들과 앉아있는 것이었다.
프린지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좋은 느낌을 주었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특히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보통 ‘열려 있다’고 한다. 그들은 그들의 에너지가 나에게, 우리에게, 주변에 흐르게 그냥 내버려두었다. 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도 아니면서, 나를 편안하게 하려한다든지 재미있게 하려한다든지 하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편안하게 만들려고 하면 나는 편안해지려고 해야 하고, 재미있게 하려고 하면 나는 되도록 자주 웃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만남이 주는 억압이 있는데 그들과의 만남에서는 그런 것이 거의 없었다.
내가 요즘 만남들에 대해 대체로 비관적으로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족관계를 갖고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한 지가 나이만큼이나(서른 둘) 되었다. 사람은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지만, 서열을 지으려는 동물의 본능 때문에, 혹은 서로가 가진 깊은 차이 때문에 꿈꾸는 만남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서서히 자리잡아왔다. 특히 연극작업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경우, 거의 본능적인 오만함 때문에 사실상 교류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들이 주는 묘한 느낌은? 묘한 느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특정 형용사가 그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어에 갇힐 수 없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경우 그들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은유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한다. 며칠 전 책을 읽다가 여태까지 중 가장 비슷한 것을 찾았다. 인용해본다.
높은 지위를 행하는 사람들(높은 지위의 바다갈매기처럼)은 자신의 공간이 다른 사람 속으로 흘러가도록 놔둔다. 낮은 지위를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이 다른 사람 안으로 흘러가도록 놔두지를 못하는 것이다. (즉흥연기, 키스 존스톤 지음, p111)
일상 속에서 ‘높은 지위’, ‘낮은 지위’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때문에 오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들을 만나고 그들이 우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백작부인 같아서 우아한 것이 아니고, 선생님이나 종교인 같아서 높은 지위인 것이 아니라, 높은 목적으로 가는 길 위에 있어서 우아한 것이다...... 바다갈매기처럼, 시야가 넓은 사람들.
다음날 공연이 한 차례 더 남아서, 다행히 볼 수 있게 됐다. 돌아가는 길에 잔상들이 떠올랐고, 생각이 생각을 낳았다. 무엇보다, 저런 사람들과 친구를 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동 창작극?
‘거울’의 팜플랫을 보면 ‘거울’이 만들어진 과정이 나온다. 나는 밥 먹으면서 말로 먼저 들었다. 충분히 듣고 나서도 “그런데 연출은 누구세요?” 하고 버릇처럼 물었다. 그러면 그들은 “없는데요.” 했다. 내가 아차차하면서 “그러면 이야기는 누구의 아이디어인가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모르겠어요. 다 섞여서.” 라고 했다.
공동창작이라는 것을 듣고도 연출이 누구냐,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본 것은 내가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어서다. 한 번 시도한 적은 있었다. 죽이 잘 맞는 연극하는 친구 두 명이 있었다. 그들과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 구심력이 있는 조직이 아닌 점조직으로 연극하고 싶었다. 술자리에서 기가 막히게 말을 맞추고 다음날 십 오 분짜리 시놉시스를 써서 들고 갔다. 함께 읽고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또 왕창 나누었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웠을 때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미지를, 한 친구는 철학을, 또 한 친구는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포인트로 이야기했다. 요소는 같지만 목적이 달랐던 것이다. 연극이 나무라면, 뿌리와 줄기 같은 것. 그래서 우리는, 돌아가면서 한 명 씩 뿌리와 줄기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지만, 이후로 나는 ‘공연에는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연극에는 그 중심이 없었다고 한다. 에이, 그래도, 정말 없었단 말이야? 나중에 arrange한 최후의 눈도? 라고 캐묻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이 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점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뭐라 분명하게 말할 수 없어도.
그들의 공동창작 일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주인공 캐릭터 설정을 제비뽑기로 정했다는 부분이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거울회사 입사지원자이고, 이것을 씨앗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극의 출발을 흔쾌히 무력하게 우연에 맡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 초반 오 분이 연극의 가장 생동감 있는 부분이었다.
Encounter. 우연히 만나다.
공부가 깊었던 한 친구가 좋아하던 단어였다. 나중에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책을 뒤적이다가 그 단어를 다시 발견했다. 못 알아먹는 부분은 뛰어넘고 좋아하는 것만 여러 번 읽는 식으로 책을 읽으니 이론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감히 이렇게 표현해본다. 그들의 작업은 들뢰즈의 책에서 나온 이론을 몸으로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내가 좋아하는 질 들뢰즈와 클레르 파르네의 대담서 ‘디알로그’에는 나무와 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그루의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라는 수직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에 풀은 뿌리가 땅 속에서 옆으로 뻗어서, 쑥 뽑으면 양쪽에서 다른 풀들이 딸려나오는 식이다. 잔디의 진짜 뿌리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풀은 나무들의 사이에서 출몰하고, 넘쳐나지만, 분명한 근원이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연극이든 무엇이든 나무의 형태로 인식하도록 교육받았고, 나무 형태의 사회조직을 거쳐왔지만, 내 삶은 풀과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들은 작업이 풀과 같았다. 아래에 내가 감명을 받았던 책의 구절을 인용해본다.
잡초는 사이에서 자랍니다. 잡초는 길 자체이죠.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저자답지 않은데, 이들에게는 서로 연결되는 첨예한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길, 도정(道程)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풀, 리좀의 방향입니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특화된 제도로서의 철학 같은 것이 거의 없고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이겠지요......행위로서 정치학으로서 실험으로서 삶으로서의 산책. 버지니아 울프는 택시들 사이로 산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사이를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라고 말입니다. (디알로그,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지음, p60-61)
연극 ‘거울’
연극 ‘거울’은 흥미로웠다. 무대에 선 배우들의 인간됨이 느껴졌고, 이야기는 신선했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았다. 좋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관객들이 ‘돈’을 지불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연극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할 때 그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수많은 가치들 중에서도, 관객들이 시간과 돈을 잊을 수 있었는가의 문제가 가장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잊음으로써 거기에 지불한 돈을 잊는다. 시간을 잊는 경우는 연극만큼 다양할 것이다. 연극이 밀고 당기는 리듬의 마술을 보여줌으로써, 혹은 탄탄한 서사로써, 혹은 이 시대 관객과 같은 고민으로 만남으로써. 잡고 놓는 기가 막힌 배우의 연기가, 훈련된 배우나 무용수의 기술이, 대학극과 같은 경우에는 서툰 배우의 뜨거움이 관객에게 일종의 충격을 줌으로써. 관객들은 극장을 나서면서 ‘감동적이었다’, ‘재미있었다’고 표현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생각에 잠긴다. 섬과 같은 시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거울’에는 안타깝게도 그것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연극의 배우는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이다. 자연스럽게 눈길을 끌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의 마임이었다. 두 사람의 싱크로가 척척 맞다가 어긋나는 순간의 타이밍은 그런 설정에서 크게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얼마나 연습했길래 저렇게 잘 맞추지? 하면서 보다가 어긋나는 순간. ‘나’와 ‘거울 속의 내’가 분리되는 순간이다.
두 배우의 외모와 기운이 비슷한 것은 참 좋았지만, 이야기와 결부된 그런 마술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연극이 감동적이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연극 ‘거울’이 시작될 때, 여러 가지 추억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TV에서 보았던 환상특급, 신일숙의 거울에 관한 만화, 보르헤스의 거울 안 세계, 매트릭스가 동시에 떠올랐다. 팜플랫에 기재되어 있던 이상의 시도. 누구나 한 번은 잠 못 이루게 하였던 근원적인 소재가 ‘회사의 면접실’이라는 현실과 만나는 이 연극의 시작은 쑥 빨려들어가도록 흥미로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상의 시가 ‘거울 속의 나’라는 존재를 묘사하여 우리에게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열어준다면, 연극은 이야기이므로 열어진 세계를 어떻게든 정리하여 닫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연극은, 이상이 발견한 ‘거울 속의 나’를 거울 밖으로 끄집어내어 ‘나’와 대면시킨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캐릭터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죽음으로 마무리를 맺는다. 대단원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연극이 끝나도 이야기 하나가 마무리되었다는 개운한 감이 들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를 생각해본다. 창작자들이 분위기와 이미지에 대한 아이디어 쪽에 방점을 찍고 작업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이야기에는 이상의 시가 있고, 환상이 있고, 현대의 일방적 메커니즘과 소외된 인간이 있고, 미래/환타지/미스테리/스릴러 등의 장르 영화가 주는 묘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흥미롭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이 통합이 안 되는 느낌이다. 어느 한 요소가 다른 요소의 원인이 된다든지, 참조가 된다든지 해서 관객들에게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수용자인 관객은, 무대에 재현되는 요소들이 어떤 인과관계에 의해서 결합되고 찢어지고 재구성되는가를 본능적으로 쫓아가면서 지켜본다. 그 시간이 이십분이든 한 시간 이십분이든, 시간을 담보로 하는 연극은 서사성이라는 숙제를 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통합’, ‘서사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전문가, ‘연출’이 꼭 필요한 걸까?
‘목요일 오후 한 시들’과의 만남 - 플레이백 시어터
글을 쓰다 보니 나 혼자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 공연과 다음 공연 사이에 만난 나에게 편안하게 말을 건네던 그들이 다시 생각난다. 그 자리에서 서진 씨가 나에게 글을 요청하였다. 안 써도 될 것같이 편안하게. 그런데 이 글은 며칠 동안 온갖 용을 다 쓰면서 쓰여졌다. 나의 문제와 결부하여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내 모습. 공연본 지 좀 돼서 기억도 잘 안 나는 주제에 연극을 깔려니 죄책감도 느껴진다. 참고삼아 펼친 팜플랫에 서진씨의 글이 보인다.
서툴고 하찮은 논지라도, 꿈일 뿐이니 노여워마세요.
양해해주신다면, 개선해보겠습니다요.
어쨌든 나는 정직한 요정 퍽이니까요.
여러분이 칭찬해주시면 격려라 생각하고 더 분발하지요.
그렇지 않는다면야
저를 거짓말쟁이 퍽이라고 불러도 좋다구요.
(한여름밤의 꿈, 요정 ‘퍽’의 대사)
머쓱해진다. 나무니 풀이니, 연출이니 공동창작이니 했던 것이 무색해진다. 이 작품에 아쉬움은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을 만나고 작품을 만난 사람이다.
‘목요일 오후 한 시’는 훌륭한 하나의 연극작품을 만들기 위해 생겨난 집단이 아니라, 연극하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이 모인 집단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의 여유를 이해할 수 있다. 멀리 보기 때문에 여유로운 것이다. 식사 자리에서 내가, 구성원들 중 한 명 씩 돌아가면서 중심이 되어 공연을 만들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명이 ‘야, 그것도 괜찮네.’라고 반응했다. 나는 공동창작극에 대해, 나는 이까지밖에는 이해가 안 가는데요 하고 질문 혹은 토론의 말을 꺼냈는데, 그들은 다르게 받아넘겼고,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
옳고 그름, 연극의 원칙 따위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연극하는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만남의 방법론에 대해 원칙이 있는 듯 했다. 그 원리는 원리들 중에서도 상위원리일 것이다. 그것이 몸에 그냥 붙어있었다.
극단을 소개하는 리플랫에는 그들이 ‘플레이백시어터를 전문으로 하는 공연집단’이라고 되어있다. 플레이백시어터. 나로서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리플랫에 나온 글을 아래에 인용해본다.
관객 한 명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배우와 악사는 관객들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 말을 한 후, 연기의 충동을 느낀 배우부터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중앙으로 나와 연기를 시작합니다...... 사건 중심의 이야기는 배우들 상호간의 주고받는 연기를 통해 스토리에 담고, 정서 중심의 이야기는 관객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 여러 배우가 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느껴질 때 배우들은 서서히 마무리를 짓고 다시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 리플랫을 읽으면서 그들의 공동창작이 ? 가 아닌 ! 로 다가왔고, 내 눈에 비친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목요일 오후 한 시’가 2004년부터 시작되었으니, 5년여 동안 배우들은 ‘만남’을 훈련해온 것이다. 현장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상대를 느끼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는 공연을 시도해 온 이들.
나는 그들에게 이 글을 선물하고, 다음 플레이백시어터 공연의 초대권을 받고 싶다. 그리고 또 선물하고, 또 받고 하면서...... 가는 길을 지켜보고 싶다. 업그레이드된 ‘거울’도 보고 싶고, 다른 이야기도 듣고 싶고. 열일곱 살 때부터 연극을 하긴 했지만, 연출을 필두로 하는 피라미드식 구조의 오래된 연극밖에 모르는 나에게 새로운 연극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 새로운 연극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면서 어떤 연극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여줘.
오랫동안 책상에 앉지 않는 삶을 살다가 요 며칠간 고심하였다. 어렸을 때 잃은 엄마를 찾아 전국을 뛰는 마라토너처럼, 나에게도 오래된 갈증이 있다. 갈증을 해소할 물을 찾아가는 길에 그들을 만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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