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을 거닐다 _ 몽유록> 1/2 체험기 - on the border

2009. 4. 10. 08:0807-08' 인디언밥

<꿈 속을 거닐다 _ 몽유록> 1/2 체험기 - on the border

  • 홍은지
  • 조회수 761 / 2007.11.15

2007년 11월 10일, ‘무브먼트 당당’의 공연을 보러 일산의 한 극장을 향해 간다.

<꿈 속을 거닐다 - 몽유록>이라는 제목보다는, “이 공연은 Jam Performance요-”라던 말이 더 강하게 남아, 가는 길은 나름 상상의 자유로가 펼쳐진다. 음, 그러니까, 재즈 즉흥연주에서 그렇듯 꽉 짜여진 완결된 연주 방식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를 가진 연주자들이 즉흥 연주를 하되 서로에게 반응하고 교감하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 되겠군...

그럼 관건은, 메인 모티브를 표현해내는 각 파트의 방식과 아울러 자신의 언어를 가지되 끊임없이 열려 있어 주변의 자극에 반응하고 무한히 확장해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아름다운 순간. 그 자리가 아니라면 어디서고 가져볼 수 없는 미지의 흥분감. 차 떼고 포 떼고 그야말로 필 꽂혔을 때 살리고 살려서 도달케 되는 그 어디론가... 

잠깐. 그런데 이건 음악공연이 아니라 연극무용음악영상조명, 무대 언어란 언어는 모두 함께 가는 거라는데? 좋아, 부단한 리허설을 통해 무한한 ‘큐’를 만들어 내지 않고, 연출이라는 강력한 통제의 눈, 원근의 수렴점 카메라 끄고, 곧장 무대 위 관객들 앞에서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해보겠다 이거지. 늦었다. 극장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간다.

 


<꿈속을 거닐다_몽유록>은 총 4회, 그 중 3회가 오픈 스테이지로 리허설 개념으로 공연되며, 마지막 1회가 메인스테이지로, 완성된 공연의 형태를 뗀다. 그리고 이 전체가 공연의 커다란 과정이 된다고 한다. 미리 자백하지만 나는  11월 10일 4시, 7시 공연을 보았고, 과정의 절반만을 경험한 뒤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만든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저 안 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연기자 무리가 이 공간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꿈속을 부유하듯 떠돌고 있는 다섯 존재’로, 이들이 방문하는 4개의 꿈의 세계와, 방문 후 그들이 덧붙이는 꿈에 대한 현재적 각주가 이 공연의 주된 내용이다. 이 공간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일단의 무용수 집단으로, 다섯 존재가 부유하는 꿈 세계의 사건들을 재연해내는 꿈 속 존재들이다.


아차, 내가 제목에 너무 소홀했구나, 싶은 생각에 다시 보니, 이 공연의 모티브는 조선 중기 소설류인 ‘몽유록’에서 가져 왔다는 거지...

다섯 존재가 거닐어 다니는 꿈의 세계는 ‘몽유록’에서 발췌된 4개의 에피소드이며, 이상적인 문인들의 왕국을 지나, 궁녀 운영과 김진사의 비극적 사랑, 단종과 사육신의 억울한 죽음, 병자호란 때 절개를 위해 죽음을 택한 여인들 등 원통하고 분통하게 죽은 자들의 사연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공연의 현실적 서술자이자 꿈 속 세상을 돌아다니는 존재들은 죽은 쪽에도 산 쪽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영원 속에 유폐된 채 배회한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해 있으나’ 이름 없이 부유하면서, 이름만 남기고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을 찾아다니며 무대로 불러내는 행위를 반복한다. ...어쩐지 영원히 반복할 것만 같다. 여기서 잠깐, 두렵다. 우리가 누군가. 성실하게 연습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살다보면 훌륭한 예술가가 될 줄 알고 연습실과 술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느새 바람 휑휑부는 소비시대 한 가운데 놓이게 된 문화예술 종사자들 아닌가. 발을 들이기엔 비참할 것 같고 발을 빼기엔 비겁할 것 같아 영원히 경계선을 벗어나지 못할 듯 싶은, 다소 난감한 상황의 어이없는 존재들.

그들은 싸구려 서커스 단원 같기도 하고, 음울한 음유시인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들이 불러내는 원혼들, 이름만 남고 죽은 자들의 사연은 원한 맺힌 피의 절규라기보다는 구경하는 자의 시선, 경계의 시선, 광대의 시선, 술집의 시선, 유희의 시선, 먹고 싸는 것의 시선으로 재구성된다. 왜냐하면, 바라보는 서술자가 ‘세상에 존재해 있으나 아무도 그들을 모르는 어이없는 존재들’이니까. 그런데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끊임없이 외치고 분노하고 비틀다가 에라 안 들리면 말든지 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존재감을 없앤 것인지, 혹은, 지금에 있어, 이름만 남고 죽은 자들을 불러주는 건, 이름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자들이나 하는 어이없는 행위가 되어버렸다는 건지...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긴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름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어이없는 존재들’임을 누차 강조하는데, 그 자조와 한탄 뒤에는 그럼, 이들은 원래 이름을 가지고 세상이 알아야 할 존재라는 것일까? 무대 위의 인물이 이름을 얻으려면 역할로서 유의미한 행동을 해야 할 텐데, 이 공연은 이들이, 여기서, 즉흥을 통해 현존의 시간, 유희의 순간 속에서 살아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뜬금없이, 고뇌하는 예술가를 향해 날아오는 악의에 찬 한마디를 떠올린다. ‘너 좋아서 하는 일 아니야?’

그래, 이들이 존재감 없음을 통해 자신들의 시선과 이야기가 진정 중요한 것임을 역설하려 했다면 모더니즘의 정체성, 숙련을 통해 만들어진 꿈의 세계에 위치했어야 하지 않을까. 반면, 유희의 리듬 속에 들어가려했다면 전제에 대해 되뇌이고 뒤돌아 볼 필요 없이 또 다른 창조의 세계, 포스트모던 속에 분자로 화하는 모습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또 잠깐! 이 공연은 잼 퍼포먼스가 아니었나. 나는 왜 객석에 앉아 그들의 존재감과이야기를 붙들고 조물락거리며 뭔가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는 것일까.


그만큼 이 공연에서 텍스트는 비중이 커 보인다. 그리고 방대하다. 또 하고 싶은 말이 분명 있는 것 같다. 이 텍스트는 연기자와 무용수에 의해 구현되는데, 발화의 내용과 순서, 시점, 그리고 움직임의 기보가 짜여져 있다. 이미 절반 이상의 영역이 돈 터치의 영역이다. 커다란 덩어리가 고정되면 나머지는 장식을 다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어진다. 그래서 음악이나 영상, 조명의 영역은 텍스트를 구현하는 퍼포머들의 순간적인 정서를 증폭하거나 상황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 외에는 커다란 흐름에서 어찌할 수가 없다. 한 점에서 무한히 퍼져나가며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는 가지들과 지류들의 우연한 번져나감이 아니라, 흩어진 점점들이 한 점을 찾아 모이려는 운동을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연기와 무용을 중심으로 스탭들이 ‘옳은’ 선택을 해나가는 조심스러운 과정, 마지막 공연을 향해가는 오픈 리허설에 가깝게 보인다.

방대한 서사는 즉흥으로 인해 희석되어지고, 즉흥의 자유는 서사로 인해 발목잡힌다. 이 둘이 만나기를 잘했을지는 작가 김민정과 연출자 김민정을 따로 만나 묻고 싶다.


난 축적되고 허물어지고 재구성되는 긴 과정의 반을 보았다. 이 공연이 어디에 이르렀을지 참 궁금한데,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자들만이 경험했겠지.


<꿈 속을 거닐다 - 몽유록>은 입 맛에 딱딱 맞는 익숙한 기호들을 입 안까지 넣어주는 그런 공연도 아니고, 그렇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진정성과 문제의식, 이 시대에는 너무나 귀하고 귀하다. 또 반성과 성찰은 밑거름이다. 그런데 반응을 넘어 사유에 이르는 것, 우리를 이끌고 또 다른 세계에 이르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생각은 자유로처럼 이렇게 매끄러운데 말이다.

보충설명

* Jam Performance <꿈 속을 거닐다 - 몽유록>
오픈스테이지 :
11월 10일(토) 4시, 7시, 11일(일) 4시
메인스테이지 : 11월 11일 (일) 7시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 극장
제작: 무브먼트 당당

* <몽유록>은 조선중기에 크게 유행한 문학 양식으로,
서술자가 꿈 꾸기 이전의 자신을 유지한 채 꿈 속 세계로 들어가 일련의 경험을 한 뒤 현실로 되돌아와 그 체험 내용을 스스로 서술한다는 환몽구조를 가짐. 몽유록은 현실의 사람들이 비현실적 꿈을 통해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는 현실비판의식과 서사성을 내포한 고전문학장르. 한 인물이 꿈 속에서 다시 태어나 현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몽자류>와 비교됨.

** 이미지 제공_무브먼트 당당(사진 최홍준)

필자소개

* 홍은지
그 동안 주로는 공연 문화 영역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 함께 해 왔다.
이것저것 관심이 많고 다소 산만해서 여러 종류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거운데, 아무래도 소심한 몽상가인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