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15. 23:42ㆍReview
현재는 완성이 아닌 진행이므로
극단 이안 「로베르토 쥬코」
글_ 박연츌
“거기 누구야?”
엘시노어 성벽을 지키던 햄릿의 친구들이 그랬듯, 로베르토 쥬코가 갇혀 있는 감옥의 간수들은 그들 앞에 선 이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상한 나라에서 온 이상한 이름들이 나오는 이상한 연극, <로베르토 쥬코> 앞에 앉은 우리들도 이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만 짙은 어둠 속에서 가냘프게 배우 눈 앞만 비출 뿐인 손전등에 의지해서 이게 무엇인지 짐작할 뿐입니다. 간수들 앞을 로베르토가 유령처럼 ‘통과하듯’ 지나갑니다.
어둠이 걷히고, 눈 앞에는 하얀 모래밭이 펼쳐집니다. 아니, 소금밭입니다. 아니, 눈밭입니다. 그 눈밭을 푹푹 밟으며 로베르토는 엄마를 파묻습니다. 눈밭에, 아니, 소금밭에, 아니, 모래밭에 파묻습니다. 듣자하니 로베르토는 아버지도 죽였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나쁜 사람인가봅니다. 그러니까 엄마도 목졸라 죽이겠지요. 그렇지요. 부모를 죽이면 나쁜 사람이지요. 그런데 부모를 죽여야 나쁜 사람이 되는 건데, 부모를 죽인 이유가 나쁜사람이어서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린 다만 짙은 밝음 속에서 우리 눈 앞만 가냘프게 비추는 인과관계에 의지해서 짐작할 뿐입니다. 엄마의 머리카락 사이로, 귓구멍 속으로 모래 알갱이가, 아니, 소금 알갱이가, 아니, 눈 알갱이가 스며듭니다. 아들에게 죽임당한 엄마는 스며드는 알갱이들을 털어내지 못합니다.
눈이 똥그란 여자아이가 들어옵니다. 간밤에 있었던 연애의 달콤함을 안고 돌아온 집에서 여자아이를 기다리는 것은 언니의 숨 막히는 희생과 오빠의 움켜쥔 주먹, 아빠의 술 냄새 나는 욕설, 엄마의 멍든 눈입니다. 여자아이의 똥그란 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끊임없이 외칩니다. 쥬-코. 내 사랑만이 날 이곳에서 구원해줄 것이라고. 사랑이란 게 그렇지요. 무엇을 얻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사랑일수록, 사랑은 벼랑 끝에 설 지라도 앞으로만 달려갑니다. 여자아이의 똥그란 눈은 그렇게 달리기 시작합니다.
알 듯 모를 듯 웃음짓는 로베르토의 눈은 그 옛날 베를린 어느 동상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있던 감정 없는 천사처럼 도시의 곳곳을 응시합니다. 홍등가 쁘띠 시카고 아가씨들의 허무한 가슴속을, 그 거리를 지키던 형사의 슬프게 굽은 등을, 열차 끊긴 전철역에서 탈선한 열차처럼 길을 잃고 만 노인의 머쓱한 예의를 응시합니다. 하얀 눈밭, 아니 소금밭, 아니 모래밭 위 도시에서 휘청이는 많은 사람들 사이로 알 듯 모를 듯 웃음짓는 로베르토의 눈 역시 달리기 시작합니다. 눈 내리는 아프리카를 향해 달립니다. 아니, 눈 내리는 아프리카를 딛으며 달립니다.
걸려 넘어지고 얻어 맞으면서도 로베르토는 코뿔소처럼 점점 거침없이 달려만 갑니다. 걸려 넘어지고 얻어 맞으면서도 여자아이는 코뿔소처럼 점점 거침없이 달려만 갑니다. 마주보고 거침없이 달려만 가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납니다.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사 한 명과 아이 한 명을 죽인 살인자 로베르토의 알 듯 모를 듯 웃음짓는 눈과 여자아이의 똥그란 눈은 그렇게 다시 만납니다. 그렇게 벼랑 끝에 섭니다. 그리고 태양을 향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무엇을 본 것일까요. 로베르토는 누구였을까요. 왜 그토록 달려만 간 것일까요. 로베르토는 인과율의 가냘픈 손전등 불빛을 계속 벗어나 통과합니다. 로베르토는 유령입니다. 로베르토는 천사입니다. 로베르토는 눈 내리는 아프리카입니다. 로베르토는 이 모든 일들의 이유이자 원인이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래밭, 아니 소금밭, 아니 하얀 눈밭 위 외로운 도시와 사람들일 뿐입니다. 차가운 도시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에 ‘원인’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완성이 아닌 진행이기 때문입니다.
극단 이안- 로베르토 쥬코
2010 1018-1019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작/ 오경택 연출
내 안에 살아있는 검은 천사, 로베르토 쥬코
<로베르토 쥬코(Roberto Zucco)>는 사무엘 베케트 다음으로 20세기에 이름을 남길 극작가로 거론되는 프랑스의 극작가 베르나르-마리 콜테스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작품이면서 그의 작품 중 논란의 여지를 가장 많이 남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양친을 살해하고 수감된 후 이태리의 한 감옥에서 자살한 수코(Succo)라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쓰여 졌지만 각각의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은 콜테스의 상상력 속에서 새롭게 재창조 된다. 이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감옥이기에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탈주하려는 쥬코의 여정을 통해 우리 안에 숨어있는 검은 천사와 대면하게 함으로써, '지금. 여기'라는 현대성의 잔혹함을 처절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배우는. 혹은 배우의 몸은. 텍스트를 여는 존재가 된다. 특히 쥬코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을 일인 다역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사실적인 인물 구축에서 벗어나 몸으로 쓰는 시를 통해 은유의 언어를 만들어 냄으로써 텍스트와 몸의 사이, 몸과 공간의 사이, 몸과 시선의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키고자 한다.
이 작품은 관객이 서로를 마주볼 수밖에 없는 공간구조를 기본으로 그 안쪽과 뒷편을 주요 연기공간으로 이용한다. 관객들이 허구의 세계인 극 공간을 바라보며 그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관객의 모습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하려는 의도이다. 관객들은 이러한 공간적 구조를 통해 무대와 관객 사이의 다층적인 의미망을 체험할 것이다. 또한 공간에 존재하는 오브제들은 상황의 재현을 도와주는 설명적인 기능을 거부하고, 장면의 본질을 은유적, 상징적으로 형상화시킨다. 선별되고 압춥된 오브제들의 물질성(materially)는 배우의 신체성(physicaility)과 연결되고 충돌하여 새로운 공연언어를 만들어낸다.
박연츌
발꿈치를 들고 걷습니다.
twitter_@TheatreImaginer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 청사진을 풀어 헤치는 워크맨 주술사에게 -「온다 아키 Aki Onda」 (0) | 2010.11.18 |
---|---|
[리뷰] 네가 그랬다고 나는 말할 수 있는가 - 극단 뛰다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 (2) | 2010.11.17 |
[리뷰] 수면 위의 이펙터는 비상하는 물고기처럼 - 「aRing - MUNG」 (0) | 2010.11.16 |
[그림리뷰] 외교마찰리뷰 - 상상만발극장 「아이에게 말하세요: 가자지구를 위한 연극」 (4) | 2010.11.16 |
[리뷰] 링키지프로젝트2010 '열혈예술청년단'의 「불안하다」- 극장 공간의 해체 혹은 전복? (0) | 2010.11.11 |
[리뷰]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 극단 바람풀 <디아더사이드> (0) | 2010.11.10 |
[리뷰] 인형 영화의 거장 '이지 트릉카'의 <한 여름밤의 꿈> (1) | 2010.11.10 |
[리뷰] 독립으로부터의 독립, 변방으로부터의 변방 - 「다페르튜토 스튜디오」클로징 공연 (2) | 2010.11.09 |
[리뷰]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미학-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개막작 <크리스마스 스타> (1) | 2010.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