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물쭈물 꿈꾸는 움직임 - ① 서툰 몸짓의 시작

2011. 7. 28. 17:12Feature

우물쭈물 꿈꾸는 움직임
- ① 서툰 몸짓의 시작


글_ 김혜정




32살, 하고 싶은 걸 할 테야


용을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데는 여자들 밖에 없잖아. 남자들 많은 모임을 하지. 인라인 스케이트나 산악 자전거 모임 같은…”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덧붙이셨다.
“올해는 시집을 가야 할 텐데.”
어머니는 모른다. 남자가 많은 동호회라고 꼭 좋은 남자가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서른이 넘어서 결혼을 못하는 것보다 서른이 넘어도 하고 싶은 걸 못하는 게 더 문제야.”


그렇다. 나는 하고 싶은 건 해 본다. 아니,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맞는 편이겠다. 스물 아홉이 끝날 무렵, 나는 열병 같은 사랑을 겨우 끊어내고 서른이 되었다. 불안과 혼돈의 스물아홉에 비하면 서른이 되는 것은 그냥 하룻밤이 지나가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별 것 아닌 서른을 맞으며 나이 값을 하며 살기로 했다. 내가 생각한 ‘나이 값’이란 흔히 말하는 ‘나이 값’은 아니다. 나는 이만큼 나이 먹은 ‘나’를 그 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자유롭게 해 주기로 했다. 아무도 값을 쳐주지 않아도 내 나이에 내가 ‘값’을 쳐 준다고 해야 할까.


서른이 되었을 때 그런 결심을 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간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사회에서 강요하는 역할과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의 욕망을 누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제도권 안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받는 여성이 되었지만, ‘나’라고 할 수 있는 자아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나의 의지로만 선택한 것들은 무엇이 있었을까.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선택한 많은 것들은 나의 본능과 욕망을 누르고 선택한 것들이었고, 내가 지금까지 선택하고 결정한 많은 것들의 이면에는 그렇게 움직이도록 한 많은 작용과 다른 힘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시선이기도 했고, 때로는 내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이기도 했다.

 



나를 찾는 도전을 시작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기로 했다. ‘왜’ 해야 하고, 하고 나면 ‘무엇’이 좋고, ‘어떻게’ 하는 지는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어서’한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가 트위터에서 리트윗으로 보내 준 - ‘성인을 위한 무용 공연 체험 프로그램-우물쭈물 꿈꾸는 움직임’ 이라는 메시지를 받고 ‘우물쭈물 꿈꾸는 움직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물론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뒤에도 망설였다. 취미 삼아 하는 운동으로는 몇 개월 발레 학원을 다녀봤지만 ‘무용 공연’을 하기엔 나이도 많고, 학교 축제 때 춤은 춰 봤지만 이건 순수 예술인 ‘무용’이다. 그래도 포스터에 써 있는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런데 참가신청서가 이상하다. 장르가 ‘무용’인데 참가신청서 어디에도 키, 몸무게, 경력을 쓰는 칸도 사진을 첨부하는 칸도 없다. 대체 무엇을 보고 뽑는단 말인가? 다만 참가동기와 자기소개를 하는 두 칸만 나눠져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프로젝트의 주최 이름이 ‘똥자루무용단’이다. 뭔가 수상하다. 그래도 서울문화재단과 서교예술실험센터가 후원한다니 이상한 ‘야매’ 집단은 아닐 것이라 안심한다. 다시 봐도 무용단 이름이 ‘똥자루’라니, 수상하지만 저항감과 비틂이 느껴지는 이 무용단의 이름에서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 프로젝트는 정말 나를 자유롭게 하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만 같은 기대가 생긴다.

 



내 몸의 자유를 허하라

6월 18일 오리엔테이션, 이제 무용 체험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연습 일정과 공연 계획안을 받으니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두 분 안무자(석수정- 석도사, 허 웅- 앨리스)의 공연 계획안을 받으니 걱정이 앞선다. 감성을 일깨우고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생각만해도 쭈뼛쭈뼛해지는데, 한 달 간 연습을 하고 7월 17일 오디션을 통해 공연에 설 무용수를 뽑는다고 한다. 서바이벌은 아니라고 하지만 왠지 부담스럽다. 석도사님의 공연 주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바로 오늘 춤을 춘다- “I Am Today”’, 앨리스 샘의 공연 주제는 ‘I’m the Alice(part2 가식)’이다. 공연 주제를 보며 한 편으로는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한 편으로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찾고, 가면을 쓰고 포장한 나를 넘어설 수 있겠다는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다음날 시작된 첫 수업, 아직 서먹한 참가자들은 서로 어색한 거리를 유지한 채 몸을 풀고 수업을 준비한다. 문득 중, 고등학교 무용 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일주일에 한 시간,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참 좋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섰을 때 무용실 거울에 비춰지는 나의 길고 깡마른 몸이 싫어 거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까. 나는 누가 나를 보는 것보다 내가 나를 확인하는 것이 더 민망하고 불편하다. 안무가 선생님들은 연습실에 거울이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하지만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방에 거울이 있으면 나는 어디를 쳐다 봐야 할까. 이번 프로그램에서 내가 내 몸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이 내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의 과잉을 넘어설 수 있을까

그런데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서 내가 부딪힌 문제는 몸의 문제라기 보다는 감정의 문제였다. 몸이나 동작의 테크닉은 내가 전공자가 아닌 이상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부담이 없다. 하지만 감정 표현은 내 안의 갈등과 연결되어 있어 그 감정을 느끼는 것부터가 어려움이었다. 까칠한 성격은 춤을 출 때도 불편하다.




석도사님 수업에는 언제나 감성 컨텍이 포함되어 있다. 처음에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컨텍 수업을 하면서 가까이 서기 시작했다. 아이 컨텍(eye contact)에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신체 접촉을 하고 서로의 공간을 느끼고 호흡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눈길을 피하는 파트너와 애써 눈길을 맞추려 발돋움을 하고 주변을 맴돌 때 나는 구차한 ‘구애자’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맹수와 눈을 맞추는 ‘조련사’가 되기도 하고 조련을 당하는 ‘짐승’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난 조련을 당하는 ‘짐승’ 쪽이 더 편하다는 것을 느끼며 내 안에 ‘마조히즘’이 숨겨진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설마…?)


이렇게 조금씩 컨텍 수업에 익숙해질 무렵, 몰입이 되지 않고 내 감정의 흐름이 끊어진 순간이 있었다. 연습의 깊이가 더해가며 석도사님은 다양한 감정을 설정해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갔는데, 새로운 컨텍은 위협하는 소리를 내며 한 사람을 몰아가는 설정이었다. 그 상황에 동참하다가 어느 순간 내 감정만 그들과 분리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컨텍 수업의 상황에서 분리된 채 현실의 경험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무용수가 아니라 현실 속의 ‘나’로 떨어져 존재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겪고 있었던 폭력적인 상황과 현실에서 느꼈던 공포와 분노가 감성 컨텍에 개입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부터 나는 내 감정을 조절하고 객관화하여 표현하는 것을 가장 큰 고민으로 안게 되었다.




감정의 문제는 앨리스샘 수업에서 더 두드러졌는데, 앨리스 샘의 수업은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시작되었다. 한 통의 편지 같은 이 이야기를 앨리스샘은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앨리스샘의 수업은 감정의 흐름에 나를 맡겨야 했다. 앨리스샘은 노래의 주인공처럼 사랑의 아픔과 미련을 표현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그 아픔이 표현되는 것이 두려웠다. 아니 표현되는 것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내가 그 아픔을 내 몸으로 느끼고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는 쪽이 맞겠다. 춤을 추면서 지난 경험과 감정이 오버랩 될 때 내 감정의 흐름은 자꾸만 끊어졌고,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다시 꺼내어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표현하지 않고 억누르는 춤은 내게도 보는 이에게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용 체험을 통해 나를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감정은 나를 옭아매고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연습 기간 동안 이러한 감정의 과잉을 넘어서고 불편하지 않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내게는 풀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오디션, 무용수가 되다

오디션은 그 동안 연습한 석도사님, 앨리스샘의 안무와 햄릿 3막 1장의 두 구절을 즉흥 극으로 표현하는 과제가 제시되었다. 무용수들의 오디션 현장도 이런 것일까. 분장실에서 대기하던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 ‘나는 가수다’ 대기실을 떠올렸으리라. 그리고 분장실에서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이 오디션에서 어떻게 되든, 이 시간이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거에요.”

오디션에 선다는 것, 한 달 간 무용이라는 순수 예술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긴장한 탓에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벅찬 호흡과 저절로 반응하던 내 몸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프로그램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누린 게 아닐까. 그렇게 오디션 무대에 선 우리들은 무용수가 되었다.

 




서툴지만 나의 몸으로 시작하는 날갯짓



한 달의 연습 기간을 거치며 나는 천천히 내 몸이 깨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와 조금만 살갗이 닿아도 반사적으로 움츠러들던 몸이 신체부위를 이용한 컨텍에도 긴장하지 않고 때론 까르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우리가 만든 ‘햄릿’에서 알 수 있었다. 오디션을 앞둔 석도사님 수업에서 우리는 ‘햄릿’의 3막 1장을 즉흥극으로 표현했는데, 다른 사람의 춤이 아니라 ‘나의 춤’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한 석도사님의 말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각자의 숨결이 살아있는 움직임을 모아 하나의 극을 만들어냈다.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우물쭈물하던 우리가 무엇에 홀린 듯 내면의 감성을 표현해냈다는 사실과 그것을 이끌어낸 안무가 모두 놀란 시간이었다. 그리고 앨리스샘의 춤을 연습하는 동안 나의 감정은 조금씩 차분해져 갔다. 매번 앨리스샘의 수업 시간이면 나는 그 아픔을 대면해야 했지만, 회피하지 않고 그 때의 감정과 시간들을 대면하면서 내 감정이 조금씩 안정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앨리스 샘의 수업에서 나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서툴지만 내 감정을 자유롭게 두는 법을 알게 되었다.

 


 

오디션까지 연습을 거치는 동안 나는 조금씩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 몸을 바라보고 내 몸의 움직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치유’의 첫 단계는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앞서 내 감정을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만나고 나를 치유하는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라 기대가 생겼다. 그것은 아주 더디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무대에 서는 순간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춤을 통해 나의 몸은 물론이고 슬픔, 미움, 분노, 미련, 그리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까지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틀 안에 가두고 옭아맸던 ‘나’를 이제는 조금 자유롭게 날아오르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가 무대에 서게 되는 이 가을 쯤이면…

 


똥자루 무용단 - 우물쭈물 꿈꾸는 움직임

우물쭈물 꿈꾸는 움직임은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지만 우물쭈물 망설이는 성인을 대상으로 하여, 현대무용을 알아가면서 벅참을 느끼도록 한다. 그 대장정의 결과는 9월 4일 문래예술공장에서 창작무용공연 발표로 선보일 예정이다.

cafe.naver.com/dance2011



 


필자소개 _김혜정(우물쭈물 꿈꾸는 움직임 참가자)

존재론을 넘어선 관계론을 지향하며 세상과의 소통을 꿈 꿉니다.
하지만 너무 쉬운 소통을 경계하며 관계의 진정성에 가치를 둡니다.
중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만남과 소통이 있는 배움을 만들어가는 중 입니다.
지금은 무용공연 프로젝트에 참가하여 몸으로 소통하는 법을 익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