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말문이 막혔던 시간 말문이 트였던 공간 : 얼라이브아츠 코모 <벙어리시인>

2011. 11. 21. 15:01Review

얼라이브아츠 코모 <벙어리시인>

 글_정진삼
사진_얼라이브아츠 코모 & 정순구 


1.


문을 연다. 여관에 들어선다. 좁다란 복도. 사람들이 빼곡하다. 머리 높이만한 문이 있다. 사람하나 누울 자리. 바닥에는 종이들이 가득하다. 낮은 창문. 살짝 시큼한 냄새. 바닥에 기댄 중절모의 반바지 사나이. 누군가 잠들어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방을 옮겨 다닌다. 복도의 끝. 화장실. 돌들이 떨어지는 소리. 우리의 머리 위에서 소리들이 쏟아지고 있다.

통의동 보안여관. 그 곳에 서 있다. 나무 천장. 얽혀있는 선들. 노출된 회벽. 솟아나온 새끼 못들. 바닥에 수북한 종이들. 공간을 만지작거리며, 소곤대는 관객들. 광대를 연상시키는 큰 코트자락을 스치며 지나가는 누군가. 벙어리 시인이다.

우리는 공연에 들어와 있다. 특정 장소에서 작품을 관람하기 보단, 그저 특정한 ‘상황’ 속에(in situation) 놓인다는 말이 어울리겠다. 우리 중에 술래를 찾듯 벙어리 시인을 발견하고 그의 뒤를 밟는다. 그는 더디게 누워있었다가, 앉아있었다가, 조심스럽게 걸어서 복도를 빠져나온다. 계단에 선다. 완만한 속도. 침묵. 그리고 암전.

1부가 벙어리 시인이 잠자는 시간이라면, 2부는 벙어리 시인이 깨어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를 따라 2층으로 간다. 뼈대만 남은 작은 폐허. 방들은 모두 열려있다. 시인은 빛을 손에 쥐고 걷는다. 파편의 말(言)들. 변조된 목소리. 잡음.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구름의 영상. 시인은 준비된 테이블에 앉는다. 시를 쓴다. 단어를 쓰고 문장을 쓰고 행과 연을 완성한다. 편린의 말들이 들려온다. 사사롭다. 그는 일어선다. 다시 문턱을 넘고, 기둥을 잡고, 사람들을 지나 저편으로 흘러간다. 영상은 그보다 먼저 일어나 일찍 도착한다.



우리는 상황 속에서 빠져와 공연을 지켜본다. 클라리넷 부는 악사를, 프로젝터를 들고 움직이는 디자이너를, 흘러가듯 움직이는 무용수를 본다. 창문 너머 옆집의 기왓장이 보인다. 반대편 창가에서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도 보인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다.

시인은 예닐곱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옷을 걸어 놓고 행위를 취한다. 다가 갈수 없게 띠가 둘러져 있는 곳. 시인의 뒷 벽면에 영상이 투사된다. 영상은 흐릿함에서 선명함으로, 느린 속도에서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클라리넷의 모노톤 음색은 소음과 화음을 이룬다. 신체적 표현이 격렬해짐에 따라 감정도 차오른다. 공연의 클라이막스. 이것은 드라마였는가. 다시 침묵. 감정도 잦아든다. 아직 끝은 아니다. 시인은 띠를 넘어 다시 우리들 사이를 비집고 온다. 나무 기둥에 걸터앉는다. 눈을 가린다. 담배 피는 영상이 스친다. 그는 고개를 숙인다. 음악이 끝났다. 누군가 창문을 열었고, 현실의 공기가 들어왔다. 이제야 끝이다.


2.



서울 종로구 통의동 2-1번지에 보안여관이 있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청와대, 남쪽으로 내려가면 시내(市內)다. 길 건너엔 경복궁이 있다. 처음 들어보았을 법한 동네에 작달만한 2층의 벽돌 건물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다. 1930년대에 문을 열었다.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변했다. 종전까지 여관이었다고 한다. 서울 곳곳이 성형을 통해 나이를 숨기는 요즘, 이 곳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다.

공간에 들어서면, 마냥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여기에 묵었던 과거의 인물들. 사연을 가지고 숨어들었던 이들. 피로에 지친 하루를 달랬던 이들. 13개의 방. 쌍으로 혹은 혼자서 쭈그려 잤던 쪽잠. 개개인의 내밀함. 누군가는 여관 밖 세상의 소동과 소란을 피해, 적막하고 고요한 이곳에 처박혔을 것이다.

여관에는 벙어리 시인이 묵었던 내력이 있다. 1930년대 서정주 시인은 여기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화사한 시도 쓰고, 음울한 시도 썼다. 친일(親日)하는 문장도, 자조하는 탄식도 이 닳고 해진 회색 벽에서 나왔다.

공간의 낡은 속성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거리를 복원케 한다. 역사적 공간에서 문화적 공간으로 변했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지켜 볼만 하다. 누군가가 많이 찾아와서 과거의 시간을 상상하고,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 꿈꾸기 위한 업종은 유지될 것이다. 하룻밤 머물기 위해 배를 정박하는 곳. 아마 이 공연도 그렇게 머물 곳을 찾아 흘러 다니다 좋은 뭍에 배를 댄 듯 하리라.


3.


얼라이브 아츠 코모(como). 콜렉티브 모먼트(collective moment). 시간을 채집하기. <벙어리 시인>은 이들이 정체성이 구현된 작품이다. 공간을 발견하고 숨은 기억을 복원시키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기억을 재생시키기 위해 공간을 탐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은 극장에서, 공장으로, 다시 여관으로 이동해왔다. 공간들은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어서인지 시인이 말문을 열기엔 적당하다. 극장에선 서사가, 공장에선 투쟁이, 여관에선 비밀이 발설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그 기억들을 내러티브로 구성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뚜렷한 줄거리 대신 세밀한 감각과 그에 의거한 의미들을 자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내러티브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나름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관 문을 여는 것이 시작이라면, 연출가가 창문을 여는 것은 끝이리라. 중간은 벙어리 시인이 벙어리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시인은 사방이 닫힌 1층에서 입을 다물고, 벽들이 열린 2층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다. 보안여관이 가지고 있는 아날로그적인 건축언어(구조)는 그대로 작품의 뼈대로써 사용되는 것이다.

코모는 ‘시간’ 을 육화(肉化)하는 여러 방식을 선보인다. 일단 시간의 살을 채워나가는 것은 무용수의 운동과 음향이다. 무용수는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방들을 서성인다. 관객의 급한 시계를 공연의 느릿한 시계에 맞추고자 하는 의도적 행위다. 한편으로 공명감이 느껴지는 한 대의 클라리넷 연주와 벽들이 허물어지듯 느껴지는 개발 소음, 시계의 초침소리로 이루어진 음향은 ‘시공간’을 재생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코모가 다원적인 방식을 통해 복원하고자 하는 시간은 현대의 속도를 거스르고자 하는 시인의 특이한 시간인 셈이다.


계단을 통해 올라간 시인은 본격적으로 기억을 뒤진다. 2층은 여관의 느낌이 무색할 정도로 꿈의 세트장 같다. 느슨했던 시간들이 점점 조여온다. 조용했던 중개언어들도 그 발화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문자언어가 출몰하고, 선율은 무한정 지속되고, 이미지들은 벽을 타고 떠돈다. 소리와 빛, 몸짓, 말소리 등이 급격하게 한 덩이 유기체가 되어 혼란을 가중시킨다. 시인의 고통을 공감하라는 지시인지, 의미해석을 지연시키려는 연출인지, 혹은 또 무엇인지 관객은 판단의 기로에 놓인다. 제목마냥 역설적인 의문들인 것이다. 두려움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순간들. 자발적인 유폐 속에서 꿈꾸는 탈출. 군중 속에서 가중되는 고독. 벙어리이자 시인인 우리들.

무용수는 공연 중간에 관람하는 우리들에게 다가와 몸을 만지기도 하고, 슬쩍 그 곳에 글씨를 쓰기도 했다. 모두를 흔들어 깨우려는 행위마냥 물리적인 접촉은 그치지 않는다. 관객들은 어색해하기도 했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공연의 끝, 창문이 드르륵 열리면 세상의 소리와 공기가 들어온다. 현실 감각으로 돌아온다. 관객들은 저도 모르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급격하게 몰려온 상징들을 일일이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인지, 좁다란 공간에 숨죽이며 몰려있었다는 의식의 환기인지, 고독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맛보기 싫었는지 그 이유는 저마다에 있을 것이다.


4.


현대인에게 앞만 보고 달려가라, 하는 것은 마치 정언명령과도 같다. 그 명령은 마치 미래를 향해 질주하라, 속력을 높이라, 하며 채찍질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옛 기억을 지우고, 새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 틈새의 시간들 대신 거대한 사건 만을 남아있게 하는 것. 우리의 삶은 그러한 메커니즘 속에 저도 모르게 비슷해져 간다. 데이터 뱅크와 이미지 트랙에 더 많은 기억이 저장될수록, 우리가 문화를 기억하려는 의지와 기억할 수 있는 역량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코모의 <벙어리 시인> 은 시간 찾기에 대한 여정이었다. 따로 또 같이 떠난 여행. 찾으려고 했던 기억들이 완벽하게 복원된 메모리처럼 그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외려 거기에 동참하려던 우리들이 몰입 속에서 거부된 기억들이 올라오는 체험을 했고, 남의 기억들이 내 것처럼 관객 자신을 현혹하기도 했다.

투숙자들의 지난날을 추억하게 만들고, 시인의 잃어버린 기억들을 추적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게 했던 체험. 그 강렬함 속에서 받은 인상은 우리가 스스로의 기억을 복원하는 데에도 공포를 느낀다는 것. 자신의 것을 자신이 낯설어 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현대인의 삭제 명령은 실제로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는지. 반성은 공연이 지난 후 아주 늦게야 도달했다.

우리 시대의 보잘 것 없는 역사와 시간의 장소는 점점 자기를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취가 느껴지는 곳이야 살아남겠지만, 이를테면 ‘여관’ 은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 여관의 이미지란 좁고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 아니던가. 역설적으로 이슈(issue)를 가진 통의동 보안여관은 살아남았다. 낡고 가난함을 상기시켜주는 공간은 그 가치를 통해 오히려 존재하게 된 셈이다. 이 공간은 이제 문화적 아우라를 뿜어내고, 끊임없이 의미를 생산해내야 하는 고급스런 사명을 부여받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사명은 그 공간에서 영감을 떠올린 예술가들의 몫이리라. 중요한 것은 살아남았다, 라는 사실 보다도 지금 여기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일 것이다. 얼라이브 아츠 코모의 <벙어리 시인>은 그 공간의 가능성을 되짚어본 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추신.

재미있게도 인터랙티브 미디어라는 현대의 공연양식이 복원한 것은 근대적 예술가의 영감, 그 기원적 순간이다. 디지로그의 달성, 얼라이브 아츠 코모의 미학적 성취다.
 


서정주

덧없이 바라보던 벽에 지쳐

불과 시계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속 반딧불처럼 가물거려

정지한 「나」의

「나」의 서름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