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동네방네 <왕, 죽어가다>

2012. 11. 16. 23:24Review

 

극단 동네방네 <왕, 죽어가다>

생각, 예찬, 아쉬움

 

글_강말금

 

공연을 기획한 '다리' 로부터 첫 공연을 보고 리뷰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연극에 초대받고 싶고 좋아하는 극단 동네방네에 작은 힘이라도 되고 싶어서 쓰겠다고 했다.

연극은 참 좋았다.

매력적인 리뷰를 써서 관객들이 이 연극을 보게하고 싶은데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잘 못 쓰겠다. 요즘 글을 안 쓴다.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좋다. 먹는 거 자는 거 악기 만지는 거 노는 거 만드는 거...... 인간으로 태어나면서 받은 감각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 같다. 불행한 인간의 삶에.

그래서 글은 어떻게 될지?

 

 

1. 생각

연극의 기본 재료는 배우, 공간, 텍스트가 아니라 관객의 주의, 경청, 시선, 사유이다.

연극은 관객의 예술이다.

<연극인류학> 유제니오 바르바

 

왕, 죽어가다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극장은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생각으로 가득찼다. 훌륭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연극을 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왕이 죽어가는 과정이 연극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연극 초반에 왕비가 왕에게 당신은 한 시간 반 후 연극이 끝날 때 죽을 거라고 얘기한다. 연극은 정말 왕이 죽으면 끝난다. 그 한 시간 반 동안 왕은 부정하고, 인정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기억을 잃고, 시력을 잃고, 죽음을 맞는다. 그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내가 겪었던 죽음을 생각했다.

아버지와 삼촌과 큰아버지의 죽음이다.

아버지는 이 년 정도 앓다가 암병동에서 돌아가셨는데 다른 사람들이 암병동에서 죽어가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돌아가셨다. 왕이 죽어가는 과정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생각이 많이 났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많은 죽음을 보아왔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죽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유언하나 남기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죽음은 가장 가까운 죽음이었기에 아직도 왜 그랬을까 나는 어떻게 맞게 될까 그 급작스런 단절을... 등등 생각하게 된다.

삼촌은 알콜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젊은 나이였기에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삼촌은 무엇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고독을 생각하게 한다. 큰아버지는 십 년이 넘게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밥을 거의 안 먹고 술로 살아왔던 사람인데 얼마 전에 가랑잎처럼 되어서 돌아가셨다. 모든 죽음은 자잘한 생활에 집중하고 사는 우리에게 먹먹한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과 죽음 그 자체의 거리를 생각하면 결국 겁이 난다.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배우들의 입을 통해 흐르는 이오네스코의 주옥같은 말에 따라 이 생각도 하고 저 생각도 한다. 삶의 아름다움. 삶의 덧없음. 인간의 가여움. 그 인간 중에 나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생각이 그치지 못하고 맴맴 돈다. 결국 공연 끝나고 친구하고 술을 마셨다.

많은 사람이 그랬을 듯.

이오네스코는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우리 모두의 죽음, 인간의 죽음을 품을 만큼 넓고 깊고 힘있고 예의바르다.

 

 

2. 왕, 죽어가다 대본 예찬

참 좋은 희곡이다. 이오네스코가 쓰고 이정은씨가 번역하고 김덕수씨가 각색했다. 고전이 깊고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나는 이오네스코의 작품이 처음이었는데 그가 쓴 다른 희곡을 읽은 사람들도 이 작품이 가장 좋게 느껴진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원작도 너무나 좋지만 각색도 잘 된 것 같다.

부조리극이라고 한다. 사실 옛날부터 부조리극 부조리극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다. 조리가 없다는 뜻인가? 공연을 본 후 친구에게 ‘부조리’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그대로 넘어와 결과적으로 오해된 단어라는 얘기를 들었다. 어느 철학 선생님은 부조리를 ‘터무니없음’으로 번역한다고 하는데 더 이해하기 쉽다고 느꼈다. 모두다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술잔을 들고 내가 내린 오늘의 연극에 대한 결론은

인간 삶의 터무니없음을 조리있게 이야기하는구나.

이다.

삶의 터무니없음을 이야기하는데 주옥같다. 책이라면 밑줄을 긋고 한숨을 크게 쉰 다음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구절로 가득 차 있다. 아름답다.

 

 

3. 김종태 배우 예찬

김종태 배우는 왕 역을 맡았다. 연극을 보는 내내 감탄 감탄을 연발하며 보았다. 그는 희곡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긴 독백을 통으로 자기 말로 이해하고 있으며, 장면의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현학적인 말들을 읽어주고 있지 않다. 정확히 연극의 언어로 현장에서 재미있게 재현한다.

이오네스코의 주옥같은 대사도 그의 입으로 들은 것이다. 김종태 배우였기 때문에 이오네스코의 말이 더 빛이 났는지도 모른다.

아는 분께 후에 들은 얘기로 김종태 배우는 연극원 재학시절 학교에서 왕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에게 여태까지 한 연극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이 뭐냐고 묻자 대학에서 했던 ‘왕은 죽어가다’였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건너건너 들은 얘기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상적이어서 쓴다. 종태 배우에게 그 역할에 대한 큰 사랑과 내공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종태 배우. 좋은 사람. 공연을 한 번 같이 한 일이 있다. 따뜻하고 착하고 똑똑한 연극 만드는 사람. 나는 이오네스코와 김종태 배우 때문에 이 연극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4. 아쉬움

떨리는 첫 공연이다. 몇 가지 아쉬움을 얘기할까 한다.

공연은 초중반까지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잘 가다가, 뒤로 가서 힘을 잃는 감이 있다. 관객은 왕이 죽으면 연극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연극을 보는데, 뒷부분이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체감하는 시간은 러닝타임보다 더 긴 느낌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뒤가 덜 만들어진 걸까? 마지막에 펼쳐진 마거릿과 왕의 황천길 장면은 중요하고 아름다운 장면인데 솔직히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중후반의 내용이 좀 더 분명해지고 리듬이 타이트하게 되면 좋겠다.

첫째부인과 둘째부인의 관계가 더 생생하게 질투관계로 표현되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같이 본 친구는 첫째부인과 둘째부인이 죽음에 대한 왕의 상반된 내면을 투영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하더라도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질투 관계는 더 분명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대사지만 현학적인 면이 많아 귀를 쫑긋하며 연극을 보게 되는데, 어떤 대사들은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기 보다는 내용이 들리지 않았는데, 그것을 놓치면서 연극의 흐름을 놓친 감이 있다. 말의 내용을 더 잘 들려주셨으면 좋겠다.

예찬이건 아쉬운 점이건 모자란 내 눈에 들어온 것일 뿐이다. 첫공을 아름답게 올려주신 모든 제작자분들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누구보다 배우분들에게. 암전도 없고 음악도 거의 없고 배우들 퇴장도 없다. 배우와 텍스트의 힘으로 가는 연극이다. 12월 2일까지라고 하는데 몸 상하지 않게 체력관리를 잘 하셨으면 좋겠다.

언제 다시 한 번 보러갈까? 이 주 후 쯤 한번 더 보면 이야기는 더 단단해지고 배우들은 더 유연해져있겠지. 시간이 허락한다면 막공도 보고 싶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한 시간 반을 권하고 싶다.

 

***사진출처 : 가톨릭 청년회관 공연기획팀 "다리"  

필자_강말금

소개_서른다섯. 여자. 부산. 배우. 무교. 술. 가난. 천사. 전사. 

 

 

   공연일시 ▶ 2012년 11월 8일 (목) - 12월 2일 (일) / 평일 저녁8시 ┃ 토,일 낮3시 ┃ 화 공연 쉼

   공연장소 ▶가톨릭청년회관 다리 CY씨어터 (2호선 홍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50m)

   원작 Eugène Ionesco ┃ 번역 이정은 ┃ 각색 김덕수 ┃ 드라마터그 정영훈

   연출 유환민 마르첼리노 ┃ 출연 김종태, 최희진, 정다움, 이형훈

   제작 극단 동네방네 ┃ 기획 가톨릭청년회관 다리 070-8668-5796 www.scyc.or.kr

   ■후원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청소년문화사목부

   ■담당 다리 프로그래머 소우 010-4876-4576 cycdari@daum.net

드라마터그 글

정 영 훈

<그림 같은 시절> 작,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007

<영원한 너> 작,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12

<달아나라, 편지야> 구성/창작, 가톨릭청년회관다리 CY씨어터, 2012

내 뒤에 남는 시간이 영겁이라면, 만남은 순간과, 이별은 영원과 섞인다. 당신을 다시 보지 못하기에, 우리의 시간은 포개지지 않는다. 이별에 어찌 형식이 없겠는가. 한소끔 울고, 마른 눈물 두어 종지 흘리는 것이다. 이 ‘한소끔’, ‘두어 종지’에 관한 이야기에 슬픔이 고이는 건, 그것이 여기 있어 거기에 없는 ‘남겨지는 자’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나는, 거기에 있어 여기에 없는 당신의 빈자리를 바라본다. 애도는, 이별의 극한일 당신의 죽음 앞에서 벌이는 내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잔치다. 나는, 슬픔을 울음으로, 내용을 형식으로 겨우 버틴다.

<왕, 죽어가다>는 ‘사라지는 자’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지만, 끝끝내 혼자서 죽는다. 산 자 모두에게 남겨진 죽음을 혼자 겪을 수밖에 없는 사태-하지만 나는 숲 속 들개나 바다 속 고래일 순 없어서, 내 몸의 기별로 내게 닥친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이 격절의 사태에 이미, 항상 당신의 말이 있다(폐하께 알려드립니다. 폐하께서는 곧 돌아가십니다). 이 말은 밀어내고 싶은 말이지만(난 멀쩡해. 왜 날 놀려? 거짓말이야), 밀어내지지 않는 말이다(이제 당신한텐 결정권이 없어요. 아픈 것조차 막을 수 없잖아요). 말은 힘이 세다.

<왕>은 사라지는 자 베랑제가 자신에게 닥친 첫 선고의 말을 수락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질 때’의 공포는 늘 나타나는 것이어서, 그는 헛된 명령과 갈급한 애원 사이를 오고가는데, 마가릿에 의하면 이는 ‘그의 세계가 특별나지 않다는 증거’일 뿐이지만, 그의 죽음이 개별적 세계의 온전한 소멸임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왕>이 베랑제의 내면 풍경을 극 전체를 통해 드러낸 것이라면, 다시 말해 유아론(唯我論)적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베랑제의 몸에 깃드는 죽음은 시간의 와해와 공간의 붕괴, 그리고 인물의 순차적 퇴장, 즉 한 세계의 소멸로 완성된다(왕이 죽으면 땅은 꺼지고 천제는 사라져요). 사라지는 자가 사라짐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서의 의식(儀式)-그러니, 남겨지는 자에게만 애도가 필요한 건 아니다(<왕>의 첫 제목이 <Les cérémonie>였다).

온수 주머니 차고 휠체어에 앉은 베랑제가 줄리엣에게 말한다. ‘하루에 같은 길을 두 번 걷다니! 위로는 하늘이 있고! 하루에 두 번 하늘을 쳐다볼 수 있어. 숨을 쉬면서. 우린 숨을 쉰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지. 생각해봐. 분명히 넌 모르고 살았을 거야. 숨 쉰다는 건 기적이야’ …어리벙벙한 상태지만, 죽음 저쪽에서 이쪽 삶을 들여다보는 자의 말이라니, 또 이 연극이 닫히는 순간 죽을 자의 말이라니, 조금은 믿어볼만 하지 않은가.

그러니, 비루한 생이여, 다시, 다시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