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1. 13:16ㆍReview
하나님, 아버지
- 모순적인 두 세계에 ‘칼방귀’를 날린다.
글_Daitch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인간 분류기준을 가지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주변 지인 중 90%를 ‘디오니소스형’과 ‘아폴론형’으로 구분한다. 디오니소스형은 청년정치활동이나 예술활동 혹은 뭔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일을 한다며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낮에는 기성세대가 ‘뻘짓’으로 규정할 만한 일을 하며 분주히 젊은이의 정력과 시간을 탕진하고, 저녁에는 알코올을 앞에 두고 그들이 벗어나고 싶은 세상과 만들고 싶은 세상을 토로하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폴론형의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종교적인 경건함을 추구하며 매주 일요일에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는 교회 언니오빠들이다. 이들은 대기업에 다니고 부모님에게 순종하며, 굳이 무리해서 체제를 벗어나거나 부정하기 보다는 그 체제 속에서 실리를 챙기며 다소 지루하지만 안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물론 아폴론형에 속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디오니소스형의 사람들이 마시는 평균적인 술의 양에 비하면 가히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미 눈치를 챈 이들도 있겠지만, 이 두 유형을 분류하는 개인적인 기준은 ‘술에 대한 선호도와 섭취량’이다. 하지만 이 두 유형의 사람들, 즉 전자의 ‘술 마시며 뻘짓하는 이들’과 후자의 ‘대기업에 다니며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구분하는 본질적인 기준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하나님과 아버지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그들의 삶의 모습 전반을 확연하게 특징짓는 것이다.
디오니소스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성체제의 전복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로 ‘지상의 아버지’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두 분 모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흔히 자기 자식에게 기대했을 만한 구실-명문대, 대기업 취직, 참한 배우자와의 결혼-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머리로만 이해하거나 혹은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허나 매 순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그분의 순리에 따라 사는 아폴론형의 사람들은 지상의 아버지에게도,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도 순종하며 착실하게 살아간다.
인간이라면 늘상 의식할 수밖에 없는 차원이 다른 두 분의 아버지 중에서, 지상에 있는 아버지는 물리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만든 사람이자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 놓은 사람이다. 굳이 프로이트의 도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아버지를 정복하고 넘어서기 위해 살아감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지상의 아버지!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나를 만들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지배하는 권력이자, 동시에 언젠가는 뛰어넘고 싶고 짓밟고 싶은 구태의연한 기성의 체계로 상징된다. 이런 상징성 때문인지 ‘아버지’라는 말에는 사랑이나 애잔함 보다는 치열한 투쟁의 이미지가 교차한다.
1. 지상의 아버지 - 투쟁
“나 스스로 나의 노래들을 관찰하건대 ’가족‘이 등장할 때는 언제나 명확한 심리적인 풍경이 있다. 아버지는 잔혹하며, 어머니는 울고 있고, 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거대한 단절이 있으며 그것은 인종적 간극만큼이나 거대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우주인이며 그들은 지구인이다. 그건 그들에게나, 나에게도 커다란 비극이며, 상당한 양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깜악귀, <칼방귀> 3호, p.42)
‘눈뜨고 코베인’의 보컬이자 송라이터인 ‘깜악귀’는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인 풍경을 위와 같이 고백했다. 그가 글에서 이미 밝혔듯 ‘눈뜨고 코베인’의 2집 <Tales>에는 유독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엄마는 옆집 아줌마가 물어보면 아빠는 영국으로 출장 갔다고 이야기하라며 나에게 당부하는데 나는 자꾸만 아빠가 벽장 안에 있는 것 같고(“아빠는 벽장”), 아버지는 죽기 전에 나에게 지구를 지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두었으나(“지구를 지키지 말거라”) 나는 아버지 제사를 지낼 생각이 없어 아버지 납골묘에 내가 먼저 들어가 누워있을 예정이다.(“납골묘”)
눈뜨고 코베인 2집
엄마는 왜 자꾸 아빠가 먼 나라로 출장 갔다고 이야기 하는 걸까? 나는 왜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싶지 않은 걸까? 벽장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아빠가 벽장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스쳐가는 생각. 아빠는 본인이 의도해서가 아니라 아빠를 숨기고 싶었던 타인에 의해 그 깜깜한 곳에 숨겨져 있다! 아빠는 죽은 걸까 살아있는 걸까? 아버지를 벽장에 넣은 건 엄마일까 나일까? 물론 아빠는 정말 출장 중일지도 모르지만, 이 마뜩찮은 기분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내가 아버지를 벽장에 넣은 것 같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를 벽장에 넣고 싶은 이유는 아버지가 나와 달리 어른들의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어른들의 언어를 배우지 못해서 그 언어가 힘들고 불편하다. 그래서 차라리 아버지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그를 매장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나 아버지를 벽장에 넣지 않아도 우리는 또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언어에 대항할 수 있다. 언어는 없지만 몸은 갖고 있으니 “몸의 언어를 갖게 되기를 갈망”하며 ‘몸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다.(송은지, <칼방귀> 3호, p.48) 신기하게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우리는 미리 그것을 알아서 설익지 않은 젊은 무리들은 홍대 앞에 모여 음악을 하거나, 마로니에 공원 주변에 모여 연극을 하거나, 혹은 지면과 화면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싸질러댄다.
눈뜨고 코베인, “아빠는 벽장” MV
아버지에게 투쟁한다는 건 기존의 언어에 대항해 새로운 몸의 언어를 갈구하는 일, 하지만 정작 아버지가 ‘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라고 물으면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저도 제가 이런 걸 한다고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그냥...... 하고 다녀요.” (진상태, <칼방귀> 3호, p.47)
2. 아버지만 회자되어 섭섭한 ‘어머니’에 대하여
그런데 왜 우리는 ‘아버지’라는 상징만을 사용하는 걸까? 어른이라면 어머니도 있는데 듣는 어머니 섭섭(?!)하게도 프로이트든 라캉이든 인간의 정신을 성적담론으로 풀어내는 이들은 ‘아버지’만을 주요 능동 대상으로 다룬다. 어머니는 ‘나’와 동일시되는 존재이거나 아버지라는 세계에 지배당하는 수동적인 부속품처럼 치부되는 느낌이랄까.. (주의!-본 글의 필자는 그저 프로이트의 겉만 보고 하는 이야기이니 프로이트 전공자들은 관대히 흘려 들으시길!)
그런데, 동북아시아의 이 조그만 나라에 ‘어머니’와 ‘여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열어준 대단한 인물이 등장했다. 생물학적으로 명백히 여성이지만 상징적으로 거의 남성과 같은 ‘박여사’님. 아니, 이제 우리는 그녀를 ‘각하’라고 불러야 옳다. 그녀가 한국의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함의를 제켜두고도, 그녀는 정신분석의 맥락에서 ‘어머니’도 ‘아버지’ 못지않게 우리가 극복해야할 대상임을, 생물학적인 성(性)보다는 구사하는 사회적 언어와 권력의 사용 방법에 따라 성(性)적 규명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필자가 프로이트를 깊이 공부한 전공자였다면 한국의 최초 여성대통령이 이 세대 젊은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분석해보고 싶으나, 안타깝게도 글쓴이는 평범한 백수이기에 대신 <칼방귀>에 실린 ‘단편선’의 글 “어떻게 살아야 하나?”(<칼방귀> 3호, pp.50-53)를 추천한다. ‘단편선’은 이 글에서 앞으로의 5년 동안 문화업 종사자들이 맞이할 열 가지의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이런 와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여덟 가지의 생존 전략을 상세히 제시한다. 문화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 여자’가 곧 국가이게 된 현 상황에서 언더그라운드 일꾼들이라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글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똘똘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전략을 제시했음에도 글쓴이는 결국 짧고 굵게 ‘모두의 무운을 빌며’ 글을 끝맺었다.
3. 하늘에 계신 아버지 - 사랑
아버지든 어머니든 지상에 있는 앞선 이들이 극복의 대상이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여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고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는 존재다. 이러한 신의 사랑에 감복한 이들 중에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도 있고 혹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설파하며 종말론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들도 있다. 신이라는 존재가 실체가 있든 없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믿음을 굳건히 지키는 사람들에게 신이란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이자 진리이기에 이에 대한 전복이나 투쟁 자체는 꿈꿀 수조차 없다.
그러나 신이 아무리 완전하다 할지라도 이를 믿는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믿는 신을 믿으면서도 엇나가거나, 혹은 애초에 신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목사님 엄마를 두었고 종교적 믿음이 강했지만 20대 초중반에 이상한 짓을 많이 했다는 ‘퓨어킴’은 “하나남의 사랑을 받는 엄마의 딸은 힘들어!”라고 노래하고(퓨어킴 인터뷰, <칼방귀> 3호, p.22), 반면 어떤 이는 ‘불신지옥’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반기독교 활동을 하기도 한다.(정진용, <칼방귀> 3호, p.18)
인간이 신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역시나 필자의 매우 제한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후자의 사람들-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교회에 다니며 착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건 성령에 가득 찬 행복한 웃음을 짓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종교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이란 인간을 참 행복하게 만드는 구나!’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작년 10월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인 마석가구공단에서 ‘믹스라이스’가 주축이 되어 지역주민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데 판을 벌였다는 “마석동네 페스티벌”은 한편으로는 매우 종교적인게 아니었을까 싶다. 믹스라이스는 그들이 한 작업이 “초대하는 것, 서로가 서로를 청하는 것,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믹스라이스, <칼방귀> 3호, p.67)이라 했는데, 그 ‘청함과 응답’이라는 페스티벌의 형식은 신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종교적인 관계와 거의 같은 구조를 띄며 동시에 음악 페스티벌과 종교적인 체험이 산출해내는 ‘숭고’라는 감정적 효과 역시 비슷하기 때문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지상의 아버지에게 대항하기 위해 몸의 언어를 갈고 닦은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듯하다. 판을 벌이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 시공간에서 모두는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하나로 녹아들어간다. 그리고 그 녹아들어감은 때때로는 지상의 아버지를 긴장시키고 또 다시 하늘의 아버지를 감복시킨다.
그래서일까? <칼방귀>를 다 읽고 나서는 일상적으로도 자주 접하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두 유사 단어의 나열이 굉장히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무한한 사랑의 완전성을 상징하는 존재와 뛰어넘고 싶은 애증의 존재. 사랑과 투쟁, 이상과 현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마치 동일어 처럼 중얼거리곤 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그럼에도 우리는 곧 이 두 단어의 모순성은 망각한 채 또다시 습관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중얼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깜악귀’의 말처럼 “모든 사회의 기반 전체를 송두리째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 에 이끌려 노래를 하지만, “그런데 사실 그건 불가능하고 몽상일 수밖에 없”으니까!
Daitch (daitch88@gmail.com) 여자, 백수, 어설픈 낭만주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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