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2. 11:22ㆍReview
그린피그 <원치않은, 나혜석>
난 술 먹었나, 떡 먹었나
김민승 작 / 윤한솔 연출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
글_김해진
1. 친구가 물었다. ‘어려워. 화자가 누구야?’
<원치않은, 나혜석>을 함께 본 친구가 내게 물었다. ‘어려워. 화자가 누구인 거야? 노라인 건가?’ 질문을 듣고 보니 ‘아, 그 부분이 헷갈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사실 화자가 누구인지는 눈여겨 보지 않았었다. 다만 이 나혜석이 그 나혜석을 찾고 있지만 저 나혜석이 그 나혜석인지 혼란스러워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화자는 떠도는 무엇, 떠도는 누구이다. 화자는 현재를 떠도는 나혜석 본인이면서 동시에 나혜석으로 분장한 탐험가이기도 한다. 무대에는 에이포 용지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그건 나혜석 관련 논문과 책에서 복사한 것들이다. 나혜석의 자화상에서 튀어나온 듯한 차림의 배우가 허리를 숙이고 신중하게 자료를 찾는다. 단발 머리에 파리한 얼굴, 보라색 벨벳 정장을 입었다. 배우는 나혜석의 자화상이 위작이라는 견해가 있다는 것도 말하고 입센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를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한다. 그림 속 얼굴이 서양인의 이목구비를 닮았고 옷 또한 서양의 복식이라고 언급하면서 말이다. 만약 나혜석의 자화상이 정말 위작이라면 관객들 앞에 선 이 배우의 역할은 ‘거짓’이 된다. 정체가 모호한, 왜곡된 혹은 전혀 알 수 없는 나혜석에 거짓이 보태어지게 되는 셈이다. 만약 그림 속 얼굴이 나혜석이 좋아했다는 노라라면 나혜석이 투사된 또 다른 인물이 배우에게 덧입혀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연극 안에 나혜석은 있나. 어떤 나혜석을 찾아가려는 것일까. 신기루다, 신기루. 예술도 예술가도 왜곡되고 박제화 되기 십상인 걸. <원치않은, 나혜석>은 그 과정, 혹은 사이사이를 탐험한다.
2. 친구랑 대화했다. ‘그런데 그 질문 말이야.’
공연을 함께 본 또 다른 친구는 그린피그의 장점은 포착한 제재를 현재화해내는 데 있다고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2012년에 공연된 <두뇌수술>도 1945년에 진우촌이 쓴 <망향>을 현재의 시간과 충돌시킨 경우였다.(참고:blog.naver.com/sunamu/50145445171) <원치않은, 나혜석>도 나혜석이 2년 동안 운영했다는 화실 ‘여자미술학사’의 자리를 찾아가며 알게 된 나혜석의 면면들을 현재의 시간 속에 부려놓는다. 문헌마다 ‘여자미술학사’의 주소지가 다른데 하나는 종로구 수송동 146-15, 또 다른 하나는 종로구 수송동 46-15이다. 각 자리에는 고층 건물과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마침 월요일이라 미술관은 휴관이다. 현관에선 안내음이 흘러나온다. 관객들은 무대벽에 비춘 영상을 통해 이 과정을 볼 수 있다. 영상을 통해 실마리 혹은 단서들을 접해서 그런지 이제와 돌이켜보니 공연 전체가 나혜석을 찾아가는 게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단서들을 착실히 모아서 퍼즐처럼 맞춰보아도 나혜석은 좀처럼 일관된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다만 <이혼 고백장> <母된 감상기> 등의 글을 통해 ‘모성은 여자의 본능이 아니’며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고 발언해 세간의 지탄을 받았던 나혜석이 말년에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렴풋이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바깥’에서 죽었다는 것. 사회의 시선, 제도, 관념, 기대, 게다가 공연 <원치않은, 나혜석>이 던지는 질문의 바깥에서 죽었다는 것. 살다가 죽었다는 것.
어떤 질문인가. 공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이혼한 후 위자료를 받지 못해서 궁핍했던 가운데 파리에서 연애했던 최린에게 12,000원 배상 소송을 걸었다고 전한다. 정조는 취미라고 당차게 발언했던 그녀가 이혼의 피해자인 양 불륜상대에게 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 물어오는 공연 앞에서 나는 한 인간이 과연 한 가지의 신념과 철학으로만 일생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함께 공연을 본 친구는 그 질문의 방향이 실제 삶과는 뭔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선 누구나 자신의 소신이 흔들릴 수 있고 그게 바로 비극이지 않겠냐는 친구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나혜석이었다면 어땠을까. ‘난 돈이 필요해. 그래. 당신네들이 날 재단하는 그 시선을 역으로 이용해주지. 한번 당해봐라.’ 이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가난한 나혜석은 분열된 자기를 합리화했을지도 모르겠다.
3. 친구 없이 생각했다. ‘난 술 먹었나, 떡 먹었나.’
“자네 무엇 먹었나.”
“술 먹었지.”
“얼마나 먹었나?”
“두 개 먹었지.”
“이 사람아 술도 둘이 있나 또 떡 먹었군.”
들어가서 마누라에게 말한 즉,
“술도 두 개가 있소? 다음에는 두 잔이라고 하시오.”
떡 먹었다는 사내에게 무슨 남자가 떡이냐고, 술 먹었다고 하라고 하니 사내는 다음부터 술 먹었다고 하지만 얘기 중에 그가 떡 먹었다는 게 탄로가 난다. 나혜석이 지은 이야기로 조선중앙일보의 우스운 이야기 공모전에서 당선됐었다고 한다. 위에 옮겨놓은 것은 이야기 의 일부다. <원치않은, 나혜석>에서 배우 전선우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다. 목소리도 분위기도 고양되어간다. 처음에는 이게 어디가 웃긴 걸까 생각하다가, 웃긴 얘기라고 하니 또 그 자체로 우습기도 하다가, 배우가 울듯이 목소리를 높이니 희안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이 공연의 매우 착실하고 꼼꼼한 대본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었다. 2013년에 와서 이상한(?) 유머가 되어버린 이 이야기에는 관객의 상상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이 공연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혜석은 ‘정조는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라고 한 바 있어서 그런지 저 떡이 이 떡 같아 보이고 그런다. 사내를 주인공으로 해서 지은 나혜석의 이 이야기가 역으로 여인에게도 있었을 금지와 허용의 목록을 생각하게 하고, 우스운 이야기에 나오는 어수룩한 사내와 악처의 이미지를 상상하게도 한다. 공연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면서도 또 그 자체로 이야기와 현실의 묘한 도치를 보여준다. 아니다. 이야기 속의 사내와 여인의 역할 구분은 이제 와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왜 떡 먹었는데 떡 먹었다고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그 이야기가 아니라 내 글이 웃겨지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 연작 시리즈를 함께 도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특정 인물에 대한 관심이었다기보다는 ‘예술가’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한솔 연출과 내가 공통적으로 ‘사라진 예술가’에 주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어느 순간에는 화려함으로 반짝이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던 몇몇 예술가들이 있다. 물론 그러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의 저열한 흥미를 끄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삶의 부침(浮沈) 한가운데에서 이들이 오롯이 부여잡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개념이 바로 ‘예술가’였다는 점은 우리를 자극 이상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나는 그 지점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과 ‘예술가의 삶을 산다는 것’ 사이의 개념적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것은 오해와 희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인 동시에 예술하기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 작가 김민승의 글 중에서
떡 먹었는데 술 먹었다고 해야하는 상황을 예술과 예술가의 괴리라고 해본다. 먹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체면치레 해야하는 비루한 일상과 충돌한다고 해본다. 부자 예술가와 가난한 예술가를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예술이 뭐지? 예술은 방인가? 인천아트플랫폼의 다소 황량한 저녁 시간에 조용히 모여든 열 몇 명의 관객들 사이에서 나혜석의 공간이었던 여자미술학사를 생각하고 이곳 예술가들의 스튜디오를 생각하고 또 내 방을 생각한다. 여자가 글을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던 버지니아 울프도 떠오른다. 마음 한켠에서 언제적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는 목소리도 들려오지만 더 웃긴 건 내 삶이 그 언제적보다 더 올드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내 방에서 머리를 긁적인다. 난 술 먹은 사람인가, 떡 먹은 사람인가. 무얼 먹었다고 말하고 있는가. 무얼 먹은 걸 들키게 되었나. 나는 그냥 좀 우스워지고 싶다. ■
(사진제공 = 인천아트플랫폼)
필자_김해진 haejinwill@gmail.com 소개_판단하기보다는 경험하기 위해 글을 쓴다. 공연예술을 보며 한국사회를 더듬는다. 2013년에는 인천아트플랫폼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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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인천아트플랫폼 공동기획 프로젝트 "극단 그린피그-원치않은, 나혜석" 플랫폼 초이스 Platform Choice : Platform Choice는 예술인(단체)들에게 우수한 작품발표의 기회를 제공하고, 복합문화예술매개공간으로서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예술향유의 기회를 증진시키고자 진행하는 인천아트플랫폼 공동기획 프로그램입니다.
공연정보 내용출처 : 인천아트플랫폼 홈페이지 http://www.inartplatfor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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