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망각의 바다를 건너 온 제주의 바람 - 영화 <지슬>

2013. 4. 9. 10:13Review

망각의 바다를 건너 온 제주의 바람

-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

 

글_ 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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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문화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제주 사람들은 유독 죽음과 연관된 신화적 상상력과 믿음이 풍부하다고 한다. 조상의 묘를 가택과 떨어진 산등성이가 아니라 밭 한 가운데 두는 풍습이 제주사람들의 이런 무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 제주사람들은 일상에서 매일매일 죽음의 흔적과 부딪는 삶을 수용한 것일까. 예측 불가능한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들은 항상 주변을 맴도는 죽음을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곁에 두고 그에 대한 두려움을 무두질하는 편을 택한 것일까.

이런 맥락에서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는 감독 오멸이 제주 사람이 아니었다면 만들 수 없는 영화다. 1948년 미군정의 묵인 하에 3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 4.3 사건이라는 제주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그는 당시의 혼령들을 영화 속으로 직접 불러와 제를 지내는 방식을 택한다. 관객은 약 100분 동안 암전된 영화관 안에서 상처 입은 혼령들을 위한 제의에 동참하게 된다. 당연히 이 영화적 경험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푸른 밤제주를 향유하기 위해, 제주 밖 사람들은 그 그림 같은 풍광이 품어온 학살의 기억을 오랫동안 외면해오지 않았나. 어쩌면 오멸은 이 영화를 통해서 제주 밖 사람들에게 너무 쉬운 면죄부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세월 속에서 사는 유족들에 비하면 100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다.

<지슬>의 시작은 4.3에 대한 영화의 시선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한라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구름 낀 제주의 모습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신의 시점에서 바라본 제주의 하늘과 바다는 구분되지 않는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구름 흐르는 소리는 마치 혼령들의 울음소리 같다. 이 장면은 마치 누구의 울음이건 울음소리는 구별되지 않는다고, 울음은 그 곳에 고통이 있음만을 말할 뿐이라고 외치는 것 같다.

실제로 무고한 민간인들은 국군에 의해 학살되지만, 영화는 죄 없는 희생자와 잔인한 학살자의 이분법적 시선을 견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가해자의 윤리적 책임을 면해주는 것은 아니다.) <지슬> 속에는 이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데칼코마니 한 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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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학살에 고뇌하는 신병 박상덕과 한동수, ‘빨갱이를 향한 증오의 숙주가 된 고 중사에 비해 약에 취해 살육을 지도하는 김 상사는 군인 중에서 가장 다면적인 인물이다. 그는 사람을 죽인 칼로 과일을 깎아 먹는 살인귀의 모습과 함께, 폭도를 한 명도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박 일병을 괴롭히는 후임을 말리는 인간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다. 정길에게 밥을 달라며 징징대고, 뒷간을 가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김 상사의 모습도 지극히 인간적이다. ‘폭도 사냥이라는 살육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는 본능에 충실하고 주변을 챙기는 평범한 인물이다. 어쩌면 설문대할망의 현현인 정길이 김 상사를 보살핀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신은 삶을 욕망하는 자를 보듬을 정도의 아량은 가졌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김 상사의 비극은 삶에 대한 집착이 도리어 그를 집어삼켜 버렸다는 데 있다. 어쩌면 그도 처음엔 박 일병과 같은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에 대한 욕망이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탈영은 잡히면 사형이니까. 살고 싶기 때문에 그는 이 지옥도의 야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비규환의 롱테이크 학살 장면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김 상사의 얼굴은 텅 비어있다. 가혹한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는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타인도 자신만큼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괴물이 되었다. 결국 그의 폭주는 신(정길)에 의해 저지당한다.

이런 김 상사와 거울상 같은 인물이 마을 사람 중에 하나 있다. 바로 용필에게 시종 구박받는 더벅머리의 아무개 씨다. 그는 만철의 총을 탐내며 영화에 처음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 등장하는 구덩이 장면에서, 그는 만철의 총을 만져보자며 자신은 일본군 총을 만져본 적 있다고 자랑한다. 이에 용필은 당신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런 소리를 하냐며 쏘아 붙인다. 용필이 유독 그에게 살갑지 않은 이유가 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 마른 고추 연기가 가득한 동굴 속에서 그는 네 아버지 그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며 용필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가 죽게 만든 사람 중에는 용필의 아버지도 있었던 것이다. 가까워진 죽음 앞에서야 그는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네라며 회한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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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의 어떤 삶을 후회하는 것일까? 영화는 그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숨기고 있다. 상표가 군대에 붙잡힌 뒤, 그는 동굴 위치가 들통 날까 걱정하며 동굴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이에 용필은 그가 아이들 생각도 않고 이기적으로 본인 살 생각만 한다며 핀잔을 준다. 혹시 그는 예전에 살고 싶은 욕망에 그렇게 때때로 주변 사람들을 저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보니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죄 없는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득, 어쩌면 이 큰넓궤로 숨어들기 전, 그는 또 다른 김 상사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김 상사와 더벅머리 아무개 씨는 그저 생을 욕망하는, 평범한 정도로 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단지 역사의 순간에서 그들이 한 사소한 선택들이 그들 삶의 방향을 결정 했을 것이다. 둘은 그 순간순간에 이것이 훗날 무시무시한 죗값이 되어 돌아올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역사는 얄궂다. 시간차를 두고 서로 비슷한 삶을 살았던 그들이 교차하는 순간, 시대는 같은 방향으로 총을 겨누며 살던 그들을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에 놓았다. 영화는 과거의 가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가 되는 역사의 잔인한 굴레마저 놓치지 않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서로 비슷한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다른 태도를 취한다. 끝까지 전쟁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김 상사가 끓는 솥 안에서 고통스럽게 죄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더벅머리 아무개 씨는 용필에게서 잊어버리세요. 다 지난 일인데라며 진심어린 용서를 되돌려 받는다. 아마 이 장면은 제주섬이 영화 지슬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말일테다. 진심어린 사죄가 있다면, 제주는 언제든 진심어린 용서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이다.

다행히 지난 43, 4.3을 추모하며 두 번째 찾은 극장은 거의 매진이었다. 전국 관객 8만을 넘겼다는 소식도 함께 들려온다. 제주에서 불어온 이 바람은 우리의 망각을 질타하며 잊힌 망자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덕분에 늦게나마 산 자들은 그들을 다시 기억함으로써,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박현정

두부 같은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