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큐영화 <춤추는 숲> 숲이 춤춘다 살아야겠다

2013. 6. 1. 03:04Review

 

숲이 춤춘다, 살아야겠다

다큐영화 <춤추는 숲>

 

글_유햅쌀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한편의 시를 떠올렸다.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맨 마지막 연의 시구를 떠올렸던 것 같다. 어쩌면 모든 독해는 오해에서 시작하는 것, 이므로, 그 시가 어떻고 또 어떤 내용인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이 영화의 미학에 대해 그 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그야말로 광풍이다. 도시와 산과 숲은 애초부터 함께 있을 수 없음을, 도시 건설 초기부터 누가 알려주기라도 했는지 하루가 멀다하면 파내고 뿌리 뽑는-뽑히는 나날들이 계속된다. 재개발 바람은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나무를 뽑고 흙을 퍼 나르는 행위는 극심한 중증으로 이어졌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연은 이제 도시의 대립항이 되었다.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을 자연은 이제 인공적으로 조성해야 하는 것으로, 어느 공간 안에 배치해야 하는 것으로 이상하게 그 가치가 역전된 것 같다. 게다가 이제 사람들은 지어진 건물을 삽시간에 폭파시키고 공권력을 투입해 거기 살던 사람을 공격하는 극도의 잔인함까지 저지르고 있다. 도시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시대다.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고 사라진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춤추는 숲>의 성미산 마을은 참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래서 감독이 ‘세그웨이’를 타고 촬영하면서 보여주는 성미산 사람들의 모습은 부러우면서도 어딘가 낯설다. 별명을 부르고-불러주는 이웃들의 인사가, 미소가, 화답이 낯선 시대가 됐으므로. 아마도 고독한 사람들은 성미산 공동체의 쨍한 풍경을 보면서 도시의 삶,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는 서로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 신뢰가 있다. 이 불신의 세상에서 ‘공동육아’부터 ‘협동조합’까지 가능한 도시의 공간이 있었던가 생경할 정도로. 영화에서 그곳은 ‘숨 쉴 곳’으로 ‘부모 세대와는 달리 살 수 있는 곳’으로 표현된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성미산 저 너머에는 빽빽한 도시 빌딩들이 가득하지만 빌딩 숲을 지나면 사람들이 지켜낸 산이 있고, ‘힐링’같은 가식적인 포장으로는 절대 쫓을 수 없는 진짜 ‘관계 맺기’의 삶이 있다.

 

 

하지만 성미산에도 개발광풍이 불어오고 그들의 평화롭던 삶은 절박한 것으로 바뀐다. 아이들의 또 다른 이름인 나무를 지키는 일은 몸으로 포크레인을 막아내는 것으로만 이뤄낼 수 있다. 사람들이 파괴적인 기계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몸으로 숲을 지키는 일, 그것뿐이다. 처참히 스러지는 나무들, 산비탈에 우뚝 선 포크레인, 공사 장비들, 그 사이에 숲을 지키려는 천막 안의 사람들, 새벽에 몰래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달려 나온 사람들, 다치는 사람들, 나무를 부여잡고 우는 사람들, 성미산 안의 아이들, 그리고 ‘생명에는 주인이 없다’며 ‘이 산에는 너무 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고 말할 줄 아는 승혁이, ‘실패’ 뒤에 오는 감정의 균열까지, 개발광풍은 평화로운 이들의 삶에서 너무 많은 폭력들을 마주하게 했다. 산을 밀고 학교를 짓겠다는 욕심, 그 욕심이 신화가 됐다. 그리고 그 욕심이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

이 지점에서 <춤추는 숲>은 성미산이라는 대안적 도시공동체의 삶을 담아내는 영화에서 도시개발이 생명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영화로 변화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카메라의 눈은 투명하고 맑고 화사한 마을 풍경을 담다가, 어둡고 흔들리는 화면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가 노이즈 섞인 생을 갈구하는 사운드로 변화해가는 것을 응시한다. 그 안에서 카메라는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들, 슬픔과 웃음과 눈물과 좌절과 어떤 희망을 함께한다. 그렇게 카메라의 눈은 성미산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마주치면서 삶을 함께하고, 같이 바라보고 같이 느낀다. <춤추는 숲>이 여타 공간 다큐와 다른 지점은 여기에도 있는 것 같다. 카메라와 영화 기법의 미학을 떠나서라도 성미산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와 실패에 맞서는 이야기, 실패하고 마는 이야기, 그럼에도 공통의 연대감들을 통해서 ‘하하하-’ 웃을 수 있는 이야기는, 카메라가 직관적으로 삶을 이면을 비추는 다큐의 그것이라기보다는 극영화에서 보여주는 어떤 희망의 내러티브로 비춰지기도 한다.

 

 

‘냅둬유’의 미학

이 희망의 내러티브를 완성하기 위해 성미산 사람들은 이 절박한 순간에 새로운 시도들을 이어나간다. 비록 그 시도들이 현실 도시의 삶 앞에서 좌절되고 말지만, 그들에게 ‘실패’는 싱겁고 기운 빠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그 시도에 대해 새롭다고도 얘기했고, 대안적인 것이라고도 얘기한다. 이들은 마을회의를 열고 끊임없이 대화를 요구하고, 마을운동을 정치의 형태로 바꾸기 위해 주민후보를 직접 뽑아 선거운동을 펼쳤고, 100인 합창단을 조직해 노래를 불렀다. 삶의 영토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물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들이 가진 것, 서투르더라도 함께 해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새롭기도 하고 대안적이기도 한 이 방식들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실패할까 두려워 제대로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들이다. 사람이 다치고 숲이 다칠 때 ‘냅둬유-’라고 유쾌하게 노래할 수 있는 것, 산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시를 읊는 것, 실패 이후에 오는 지독한 현실-돈과 처벌과 책임-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좌절을 좌절로 끝내지 않는 것, 그것이 <춤추는 숲>이 그려내는 ‘냅둬유’의 미학 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미학은 잃어버린 산을 다시 지켜내는 것, 거기에 장승을 세우고 한바탕 풍물패와 놀며 제사지내는 제의적 잔치, 성미산이 있기에 마을이 있고 마을이 있기에 성미산이 지금과 같을 수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것,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마을의 사람들을 묶는 공동의 기억을 새기는 것으로 완결된다. 모든 자연,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분투했으나 좌절했을 때, 분투 안에서 폭압된 개발논리에 희생된 숲의 정령들을 위로하는 그 마을잔치 말이다.

 

 

도시와 숲이 대립항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들 눈에는 숲의 땅이, 나무가, 꽃이, 새싹이, 지렁이가 모두 돈벌이에 불과한 것 같다. 이 폭력이 계속된다면 서울은 영영 고향이 될 수 없는 상실의 땅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성미산은 춤춘다. 마을 사람들도 춤추고 노래한다. 잃었으나 잃지 않았다. 산이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산이 있고 사람들이 있다. 이 척박한 도시 서울에도 꽃은 피고 나무가 자란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 떠올린 시의 한 구절 앞에 한 마디 더 붙이고 싶다.

“숲이 춤춘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필자_유햅쌀

  소개_시트콤같은인생살이를위해, 재미진무언가를찾습니다. 인간은유희적동물이니까요. 

 

 

 춤추는 숲(Forest Dancing) 2012

 감독_강석필 / 출연_이창환, 유창복 등

 배급사_스튜디오 느림보 /  장르_다큐멘터리

 춤추는숲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d_forest2013.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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