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걸판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친구야>

 

2013 서울연극제/미래야 솟아라

결코, 지킬 수 없는 것들

극단 걸판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지켜줄거야 친구야>

 

글_유햅쌀

 

 

  어떤 선택을 한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 선택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그래서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서-어떤 선택은 적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므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선택으로 얻게 될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인지, 버려도 포기해도 그래도 나는 끝내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그래도 괜찮을 지 고민한다.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지켜줄거야 친구야>(앞으로 <세상>)는 수많은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덧붙이자면 선택의 갈림길에서 영원히 갈라져버릴 친구의 이야기이고, 선택의 결과가 유동적으로 변화할 때마다의 상황들을 다룬 코미디, 아니, 비극이다. (모든 코미디가 비극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면”이라고 가정했지만 그것은 영원한 가정에 머무를 뿐이고, “세상이 바뀌어부렀고 공과 사는 구분을 허야”라고 강조하지만 공사가 결코 구분될 수 없는 애매한 영역은 영원히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그 때 한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있었다. 순사보조원이 된 ‘만석’과 소출과 함께 소작쟁의를 일으켜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혀버린 ‘천석’, 그리고 독일 사람이 썼다는 그 책 『자본론』을 읽고 혁명의 주동자가 되려 하는 ‘소출’, 헌병이 된 ‘덕수’. 이 넷의 숨고 숨겨주는 관계와 쫓고 쫓기는 추격이 <세상>의 중심 서사를 이끌어간다.

  이들은 지주와 소작인, 오른쪽과 왼쪽, 미국과 러시아, 이 완연히 이분법으로 나뉜 것 같은 세상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악덕 친일파, 빨갱이 좌익사범이 되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다. 공과 사를 명백히 둘로 나눌 수 없듯이 이분법의 세계를 결코 쪼갤 수 없게 만드는 가느다란 연결고리, ‘사랑’과 ‘우정’이라는 추상적이고도 애매한 감정들이 규정짓기와 나누기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만석은 자기 집 광에 숨은 천석을 숨겨 줄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의 자전거와 순사 옷을 들려 보내 마을을 지나 산을 넘어 화전민 마을로 피신하라고,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으니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는 얘기를 덧붙여 보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이미 갈라섰으나 끝내 갈라설 수 없는 관계를 지속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그런데 “너도 알제, 요놈의 세상은 절대로 바뀌지를 않는단 말이여!” 단정했던 세상이 “바뀌어부렀”다. 해방 이후 지주였던 만석의 아버지는 처단되고 만다. 모두가 자신들이 선택한 이념대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다 빨갱이 소탕이 지속되던 나날들 사이에서 만석과 천석, 소출과 덕수는 다시 만난다. 선상님의 딸 비밀당원 순옥과 덕수의 여동생도 다 함께. 지난 세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친구는 또 아군과 적군이 되고 적군과 아군이 된다. 이들이 밀어냈다가 밀려났다가 하는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는데 연극은 이 싸움을 거창하고 스펙터클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다른 전쟁서사처럼 치열하고 끈질긴 폭격과, 총격 장면을 빠르게 병치시키기 보다는 장면 곳곳에 만담의 그것마냥 농담과 아이러니를 배치했다. 토벌 장면에서는 경쾌하고 유쾌한 음악이 흐르며 친구들의 싸움은 오히려 코믹한 몸의 부딪힘으로, 오른쪽과 왼쪽의 이념으로 툭 나뉜 남매의 싸움은 오빠-여동생의 천진하고 소소한 다툼으로 이어진다. 참으로 우습고도 기구한 팔자들이다.

 

 

  6.25가 찾아오고 미군정시대가 흐르면서 세상은 또 한 번 바뀐다. 그러면서 이 친구들은 또 다른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아메리카-모스크바라는 글로벌한 선택지가 또 한 번 선택의 막다른 길목에 기다리고 있다. 이 선택지가 들어오면서 마을은 이내 사라졌고, 만석이 “우리 집 광의 수난”이라 표현한 부딪힘의 순간들은 더 이상 반복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이 길고 긴 관계는 끝이 난다. 이들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분단의 장막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제는 숨을 수도 숨겨줄 수도 없는 상태. 쫓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관계. 서로에게 총을 들이대면서도 지겹게도 마주쳤던 과거의 순간들은 또 다시 세상이 바뀌었으므로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조차 없는 완벽한 물리적 구분의 상태로 이행하게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는 세상과 그 때마다의 선택의 순간들에 찾아오는 비극들을 세계에서 개인으로, 개인에서 세계로 치환하는 연극이다. 거대 이념의 서사는 작은 마을의 서사로, 개인들의 관계 사이로 파고들어 균열을 발생시킨다. 연극은 급진적 혁명을 꿈꾸는 이들과 혁명을 막으려는 이들로 극명하게 나뉜 것처럼 보여주다가도, 세계는 결코 그렇게 나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이들의 선택은 잘 살아보기 위함이었으며(만석, 덕수) ‘사랑’이라는 낭만의 무엇이었다가(덕수의 여동생), 농사짓다가 깨달은 지배-피지배의 상처(소출), 어쩌다 깨달은 불평등(천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렇게 인물들의 선택의 갈림길은 끊임없이 교차하다가, 만석의 집 안에 있는 ‘광’이라는 하나의 무대로 집약되면서 완전히 돌아서기 어려운 ‘함께 살기’의 고민들을 끌어안는다. 중간 중간마다 눈물이 있지만 웃음이 연극 전반을 이끌어나간다. 선택 앞에는 잔혹한 망설임이 있지만 이 연극은 이 망설임마저 희극으로, 농담과 우스갯소리로 바꾸어놓았다. 그럼에도 망설임 끝에 얻은 선택은 돌아서면 짠하고 아린 후회의 기억이기도 하고, 코믹함은 냉소의 또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 세상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하다는 진리, 그 아이러니가 개인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 시간들, 그래서 결코 지킬 수 없는 것도 있는 선택을 <세상>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너를 말이여-”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코미디. 그리고 “난 널 지켜줄거야 친구야”라는 뒷말을 영영 덧붙이지 못할 비극, 이 지난한 선택의 삶을, 그리고 그 선택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세상>은 그려내고 있다. ■

 

 

***사진제공 : 극단 걸판

필자_유햅쌀   소개_시트콤같은인생살이를위해, 재미진무언가를찾습니다. 인간은유희적동물이니까요.

 

**2013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극단 걸판 <세상 무슨일이 있어도 난 널 지켜줄거야 친구야>    출연 김태현, 류성, 차준호 강동효, 최현미, 이정미    스탭 박정길, 황재민, 박기태　 /   작+연출_ 오세혁    * 작품소개   "세상이 정신없이 바뀔 때마다 서로를 정신없이 숨겨주었던 두 친구의 이야기!"  아버지의 강압으로 얼떨결에 순사보조원이 된 만석에게 소작쟁의를 일으켜 수배자가 된 천식이 얼떨결에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적으로는 체포하고 체포당해야 하는 사이이지만 죽마고우였던 만석은 차마 천식을 체포하지 못하고 자기 집 광속에 숨겨주고, 도망까지 시켜준다.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으니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는 한마디와 함께.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도때도 없이 바뀔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자기집 광속에 시도때도 없이 숨겨 주었던 별 볼일 없는 두 단짝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극단 걸판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cafe.naver.com/gul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