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카구치 교헤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 북리뷰

2013. 5. 22. 02:48Review

 

 

셀프혁명의 가능성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 북리뷰

사카구치 교헤 지음/ 고주영 옮김  

 

글_김종우

 

  책에 대한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와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저자인 사카구치 교헤는 와세다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지만 건축은 하지 않고, 노숙자가 만든 천막집에 꽂혀 그것을 연구하고 또 실제로 짓기도 한다. 그는 그런 집들을 ‘0엔 하우스’라 명명하는데, 그것은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거부하는 태도로 읽힌다. 사실 이런 태도는 사카구치 교헤가 처음은 아니다. 삶이 곧 예술이라고 주장했던 ‘요셉 보이스’나 도시생활자의 스펙터클을 전복시키려 했던 ‘상황주의자’들이 그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가 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나 주인 없는 땅을 주목하는 것은 이미 몇 십 년 전에 건축가이자 미술가였던 ‘고든 마타 클락’이 했던 <위조 토지> 작업과 유사하다. 허나 이런 식의 작업에서는 누가 먼저 했느냐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왜 천막집을 짓고 왜 독립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가에 대한 대답 말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과 함께 저자가 일본 한복판에 ‘신정부’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다. 책의 뒤표지에는 저자의 이런 생각이 두 문장으로 정리되어있다.

 

쉼 없는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만의 독립국가를 만들어라!

 

  리뷰를 써야한다고 했을 때는 처음부터 비판적인 시선을 바탕에 깔고 책을 읽게 마련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에서는 더더욱. 때문에 나도 사카구치 교헤가 쓴 이 책,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를 읽으면서 계속 ‘불가능성’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물론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럴 때 책읽기는 보통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과 불신이다. 전자의 경우 독자는 저자에게 납득당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열렬한 지지자가 될 수도 있다. 허나 후자의 경우 독자는 당연히 저자를 비판하거나 무시하게 되고, 어쩌면 그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강화하는 데에 책의 논리를 이용할 수도 있다.

 

A Mobile House’s Village. © Kyohei Sakaguchi

 

  그런데 나는 앞서 이 책이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썼다. 불가능이라고 말한 즉시 나는 이 책에 대한 나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불가능이란 어떤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불가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현실주의자다. 그렇다면 나는 현실주의자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현실주의자를 납득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현실주의밖에 없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물론 사카구치 교헤도 이 점을 간과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절대 이상주의의 방식으로 독자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이상주의는 대체로 선동의 방식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모두를 감싸 안고 가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허나 이게 바로 이상주의의 함정이다. 모두를 위한 것은 언제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도 짧기 때문이다. 사카구치 교헤는 시간이 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실천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카구치 교헤는 ‘나로부터 시작’하라고 말한다.

    사회 시스템은 제로로부터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삶’은 그렇게 할 수 있다. (p.54)

    제로에서 시작하는 생활을, 주거라는 것을, 자신만의 인생을 생각한다. (p.255)

이러한 관점은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라는 책의 제목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나만의’라는 단어가 제한하는 것은 비단 뒤의 두 단어뿐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 전체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동시에, 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물론 사카구치 교헤가 이것을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본래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고를 시작하는 사람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에 다다르게 된 것이리라.

    나는 항상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생리적인 반응을 근거로 사고한다. 그런 식의 사고는 보통 왕따 취급을 받지만, 몸으로 느꼈던 것은 나중에도 계속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이다. ‘생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학교나 기업 등 상식을 중시하는 사회와는 다른 레이어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생리적인 것은 매우 일반적인 감각으로도 느껴진다. 생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사고’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만 생리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생각의 계기다. (p.80~81)

 

"0엔 하우스"를 위한 설계도 ©Kyohei Sakaguchi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맹점이 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개인(저자)의 성향과 능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책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불가능한 것에 대한 성취를 말하는 책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때 저자가 노리는 것은 분명 ‘나 같은 사람도 쉽게 할 수 있으니까 당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겠지만, 독자는 ‘당신 같은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부끄럽게도 열등감이었다. 아래와 같은 구절을 살펴보면, 왜 ‘나로부터 시작’이라는 개념이 내게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는지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계획이다. 나는 계획쟁이다. 내 계획법은 간단하다. 내가 제법 기운을 내면 할 수 있는 양의 절반 정도를 하루 작업량으로 정하고, 그것을 길게 지속한다. (p.180)

    지금 젊은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속수무책이 될 것이다. ‘누군가 해주지 않을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p.193)

    그래서 나는 토론이라면 언제든지 받아들인다. 누가 말을 걸어오든 답변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단정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비판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열 받지 않는다. 제대로 된 논의를 불러올 수 있다. 비평을 불러올 수 있다. (p.205)

 이런 구절들은 특히 3장 이후, 저자가 자신의 논의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에서 주로 등장한다. 혹자는 이 열등감 또한 당신에게만 해당하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사유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사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경험담’일 수밖에 없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경험담이란 결국 ‘성공담’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인 사카구치 교헤는 이 책이 단순한 경험담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굳이 얘기하자면 그는 이 책이 하나의 ‘혁명담’으로 읽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사카구치 교헤는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후기에 해당하는 부분)를 이런 글귀로 장식한다.

   무언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혁명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성공담이란 절대 혁명담이 될 수 없다. 성공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혁명이란 집단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이 성공담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이 책의 장르를 무엇이라 규정해야 하느냐는 것.

 

사카구치 교헤의 "움직이는 집" at exhibition "혁명 연습", Watarium museum

 

 사실 책이란 것을 굳이 어떤 장르로 분류할 필요는 없다. 허나 나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히게 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읽혀져야 하는가가 몹시 궁금해졌다. 사카구치 교헤식으로 말하자면 그 궁금증이 나에게 ‘생리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때문에 나는 곧바로 인터넷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이 책을 사회학일반 또는 사회복지학일반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인문학서적이라고 불릴만하다. 하지만 그런 분류는 단순한 편의성에 기초한 것이고, 아마 사카구치 교헤도 이런 분류는 싫어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책의 목차를 훑어보았다. 그 중 눈에 띄는 몇몇 부분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 / 불평해도 소용없다 / 밑바닥에 떨어졌다면 / 모르는 것은 잘하는 사람에게 맡긴다 / ‘되돌릴 수 없다’ 전법 / 돈은 돈으로 재미있다 / 계획을 세운다, 일과를 지킨다 /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 인생은 다시 살 수 없다 / 단호한 결정이 중요하다 / 절망의 눈이 깨어나게 한다

 이 목차에서 무언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자기계발서다. 나는 이 책이 다른 의미에서의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나로부터 시작’이라는 개념 또한 자기계발서가 애용하는 말하기 방식이다. 허나 나는 이 책을 시중에 있는 자기계발서와 완전히 같은 층위에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사카구치 교헤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맞서는) 일말의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단순한 자기계발서라고 명명하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비관주의자나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허무주의자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밖에 안 된다. 이런 논리로는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다. 심지어 인간의 삶까지도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점에서 이 책을 이해해야 할까? 

 

작년 서울 대학로 아르코극장 옆에서 집 만들기 공연을 수행하고 있는 사카구치 교헤, 이 작품은 서울 변방연극제 참여작으로 관객들에게 선을 보였다 (사진=코르코르디움 제공)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주의자의 눈으로 이 책을, 사카구치 교헤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찌됐든 현실주의밖에 없다. 불가능한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따져본 뒤, 거기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보는 것 말이다. 사실 이건 모든 혁명가의 태도일 것이다. 체 게바라가 했던 유명한 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와 같은 태도 말이다. 그렇다고 사카구치 교헤를 체 게바라와 동일선상에 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총을 들지도 게릴라가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질문을 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소유’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 어쩌면 이것이 과거의 혁명가들과 맞닿아있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를 문제 삼는다는 건 총을 든 게릴라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소유의 부정 - 사카구치 교헤가 노숙자들에게서 본 것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스즈키 씨의 ‘살아남기 방법’을 보면서 시스템은 제로에서 만들어낼 수 없지만,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은 제로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가 집을 획득하는 행위는 완전히 정치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동시에 철학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이 ‘살아간다’ 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59)

 그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했으되, 맨 처음 그 가능성을 노숙자로부터 발견했다.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노숙자와 사카구치 교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식적인 세계 안에서 노숙자의 삶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카구치 교헤의 삶은 ‘용감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그가 제시한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가능성을 드러내는 방식에는 수긍할 수 없었다. 이건 비단 내가 느낀 열등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주의자의 본성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현실주의자는 일말의 가능성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많은 가능성에 투자한다. 그렇기에 ‘용감한 시도’를 감행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그의 의도대로 지금 당장 뛰쳐나가 그와 같은 삶을 방식을 실천하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신 사카구치 교헤란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고, 그의 삶과 열정이 부러웠으며,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이 책이 또 다른 층위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함께 하나의 독립국가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카구치 교헤의 모습 © Kyohei Sakaguchi

 

  이 책은 ‘혁명담’으로 읽히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차원에서 자기의 계발 가능성을 일러주는 책으로 읽히는 데에는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다른 차원이란, 일반적인 삶과 일반적인 성공과 일반적인 소유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시중에 있는 어떤 책이 노숙자의 삶을 본받으라고 말하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를 어떤 장르로 정의 내려야 할까? 나는 이 책을 ‘자기 혁명서’라 부르고 싶다. 나로부터의 혁명은 극히 협소한 차원에 있는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허황되어 보이지 않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혁명은 거창하지 않다. 아주 사소한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당신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적어도 훨씬 더 편안해질 수는 있다. 사카구치 교헤는 독자에게 아마 이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사진출처

1. 온라인 교보문고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 표지

2.3.6. "0엔하우스" 온라인 웹페이지 >> http://www.0yenhouse.com

4. 일본 현대미술 온라인 전시장 웹페이지 >>> http://www.azito-art.com/topics/exhibition/kyohei-sakaguchi-practice-for-a-revolutiontells-us-that-we-wont-die-without-money.html)

5. 서울 변방연극제 블로그 >>> http://blog.naver.com/mtfestival 

 

   글_김종우((gusukzine@hanmail.net)) 

  소개_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놀지만 취하지 않으며,

         나이가 들어도 아직 중2병인 대한민국 남자, 글쓰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