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 10:11ㆍReview
“우리는 모두 쉬게 될 거에요”
-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바냐 아저씨>
글_성지은
"우리는 쉬게 될 거에요! 천사들의 소리를 듣게 될 거고, 보석이 깔린 하늘을 보게 될 거고, 지상의 모든 악과 우리의 모든 고통이 온 세계에 가득한 연민 속에 묻혀 가는 것을 보게 될 거에요. 우리의 삶은 조용하고, 평온하고, 달콤하게 어루만져질 거에요. 나는 믿어요, 믿어요... 불쌍한, 불쌍한 바냐 아저씨, 울고 있군요... 아저씨는 즐거움을 모르고 살아왔지요.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아저씨, 기다려요... 우리는 쉬게 될 거에요... 우리는 쉬게 될 거에요!"
_ 19세기 러시아 희곡의 거장인 안톤 체호프의 작품 <바냐 아저씨>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고 있다. “4막으로 이루어진 시골 생활의 광경.” 극 중 많은 상황과 대사들은 19세기 러시아 시골의 많은 부분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보드카나 차와 같은 작은 것들에서부터, 왕진 온 의사나 영지를 가진 교수 등 중심이 되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체호프가 이 희곡을 쓴 1897년으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2013년, 도무지 왕진이나 영지 같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서울의 어느 극장에서는 한 극단이 “체호프의 원형”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바로 2013년 프린지 페스티벌 참가작인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바냐 아저씨>이다.
_ 2013년의 연극은 희곡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등장인물과 배경, 대사 하나 하나 까지 희곡을 그대로 옮겨놓았고, 그렇게 해서 이를 ‘정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극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주연들이고 조연들은 주연들의 말과 감정을 받아 이야기를 지탱한다. 이는 아마도 거의 모든 전통적인 ‘정극’의 특징일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교훈 또는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주연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어쩔 수 없이 주연들의 눈빛과 손짓이 인상에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개성 넘치는 조연들은 일종의 양념이 된다.
다페르튜토의 <바냐 아저씨>에서도 주연들의 행동은 크고 넓고 세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후 뇌리를 사로잡는 것은 주연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조연들의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며 특별한 감정변화가 없는 젤레긴과 유모. 극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 것은 ‘주연들’, 즉 아스뜨로프와 옐레나 같은 인물들이었지만, 극의 기반을 다지고 완성을 만든 것은 젤레긴과 유모였다.
_ 희곡에서 유모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노파”로 설명된다. 다페르튜토의 유모는 극의 시작을 알리는 암전이 있기 전에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어나와 관객석 바로 앞 테이블과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이 노파를 맡은 배우는 아주 마른 몸을 가진 머리가 짧은 남자다. 하지만 그가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을 90도로 구부리고 마른 근육이 있는 길고 앙상한 팔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후 시장 슬리퍼를 지 익 지 익 끌며 아주 느리게 이동할 때면, 이는 영락없이 삶에 단물이 다 빠져버린 노파의 모습이다.
젤레긴은 희곡에서도 그다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인물이다. 이 가문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 온 ‘오른팔’ 같은 사람이지만, 부인과 이혼한 후 아이들 양육비를 꾸준히 대 주고 있을 만큼 심성이 착하고 무르다. 다페르튜토의 젤레긴을 특징짓는 것은 부처님 같은 미소와 쩝쩝거리며 끊임없이 먹는 행동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허허 웃고 눈앞에서 논쟁이 일어나도 계속 먹어댄다. 상황이 좋아지면 방긋 웃으며 기뻐하고 상황이 나빠지면 눈물을 글썽이며 안타까워한다.
젤레긴과 유모는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가만히 자기 자리를 지킨다. 이들 눈앞에서는, 명망이 높지만 은퇴한 늙고 병든 대학교수와 그의 젊고 아름다운 두 번째 부인, 전부인의 딸과 그 삼촌, 그리고 교수를 진찰하러 온 매력적인 의사 이렇게 서로 다른 다섯 명이 한 공간에 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 사랑, 질투, 갈등, 시기, 연민. 이렇게 누군가가 울고 웃을 때, 젤레긴과 유모는 술잔을 기울이거나 차를 권하며 그/녀를 위로한다. 그 모습은 여느 극 조연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져버리는 주연들을 다독인다. 하지만 사건이 끝나고 기억에 남는 것은 변함없는 모습의 젤레긴과 유모다.
그것은 아마도 극의 결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극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한 질곡이 마무리되었을 때 그것이 행복이라고 또는 불행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은 실패했지만 어떤 사랑은 성공했다. 이 한 여름밤의 꿈같은 소란 속에서 젤레긴과 유모는 마침내 일상으로 돌아왔음을 안도한다. 여전히 큰 감정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이들의 안심 섞인 한숨과 익숙한 손놀림에서 지난 시간과 감정의 덧없음이 보인다. 그리고 이 때, 극이 주는 교훈 또는 감동, 말하자면 극이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여느 극에서는 볼 수 없는, 조연들이 극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갈등이 좋게 또는 나쁘게 해소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갈등이 지나간 후의 평이한 일상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만들어낸 주연들보다는 갈등이 없어도 상관없음을, 오히려 크나큰 힘이 몰아닥치지 않은 것이 행복임을, 더 나아가 인생의 소용돌이와는 상관없는 일상이 더한 행복임을 보여주는 조연들의 존재가 극을 완성하는 것이다.
_ 이것이 바로 체호프가 자신의 희곡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삶’의 모습일까. 그리고 다페르튜토가 다시 보여주고자 했던 ‘체호프의 원형’일까. 극의 가장 마지막, 모든 사람들이 떠나간 후에 일상으로 돌아온 소냐는 아직도 사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바냐아저씨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바냐아저씨, 기다려요. 우리는 쉬게 될 거에요. 우리는 쉬게 될 거에요.” 지금까지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던 모습과는 달리 침착한 소냐는 유모로 분한 듯 바냐아저씨를 위로한다. 이 모든 것을 겪고 난 후 소냐가 배운 것이 이것이라면, 그리고 모든 것을 겪고 난 후에도 바냐아저씨가 배우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면, 체호프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영원한 안식에 대한 희망이라고 감히 짐작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마치, 극의 클라이막스가 지나가고 소냐가 비탄에 빠져 있을 때 소냐를 다독이던 유모처럼 말이다. 유모는 소냐의 등을 쓰다듬으며 느리고 단조롭게 말했다.
“모두 다 지나갈 거에요. 거위들도 저렇게 꽥꽥 거리지만 갑자기 꽥꽥거리기를 멈추죠.”
그렇게 해서, 모두 다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쉬게 될 것이다. ■
*** 사진 출처_ 가림토
기획의도
본래 연극이 가졌던 미덕을 되돌아보고,
시대를 관통하는 연극의 즐거움을 환기, 공유하려 한다.
작품설명
바냐는 교수의 세속적 행동 때문에 그에 대한 미움이 커지는 동시에 교수 부인 옐레나에 대한 사랑은 깊어만간다.
교수의 딸이자 바냐의 조카인 소냐는 아버지의 주치의 아스트로프를 짝사랑한다. 소냐는 새엄마 옐레나의 도움을 받아 아스트로프의 마음을 확인해보기로 하지만, 엉뚱하게도 옐레나와 아스트로프가 격정적인 키스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우연히 이를 목격한 바냐는 충격을 받는다.
때마침 일가친척을 불러모은 교수는 바냐와 소냐가 함께 관리해왔던 영지를 팔아 도시생활을 할 것을 제안하고 바냐는 바보처럼 일만 하면서 살아온 자신을 책망하며 교수에게 총을 겨누지만 불발된다. 다음 날, 교수부부는 영지를 떠나고, 바냐와 소냐는 다시 일에 파묻힌다.
출연진/제작진
드라마터그 / 변인숙
쩰레긴 / 김정화
마리나 / 박형범
바냐 / 오륭
세레브랴꼬프 / 양정윤
무대미술 / 남경식
옐레나 / 김선아
소냐 / 이명하
아스뜨로프 / 박희철
아티스트소개
홈페이지 : http://www.dappertuttostudio.com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다페르튜토’(어디로나 흐르는 - 탈장소성을 의미)와
‘스튜디오‘(장소특정성을 의미)의 두 단어조합으로 이루어진 공연팀의 이름이자, 공연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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