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공연창작집단 뛰다 <고통에 대한 명상>

2013. 12. 2. 23:54Review

 

우리의 ‘감정’을 찾아 헤맨 여정

<고통에 대한 명상> 

공연창작집단 뛰다

 

글_김혜연

 

 

1.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이 종교는 우리가 고통 속에서 살아감을 강조한다. 고통은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면서, 신과 성자를 본받아 선한 행동을 해나갈 때 치유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고통은 괴로움의 족쇄에서 행복의 열쇠로 변한다. 그러나 이 곳의 고통은 참 조용하다. 나는 의심없는 믿음 앞에서 종종 다른 생각을 한다. ‘같으면서도 저마다 다른 것이 고통 아닐까? 고통을 참는 것만큼 드러낼 줄 아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감정이 흔해지고 있다. 온라인은 감정‘낙엽’이 1년 내내 떨어지는 곳이며, 현실은 감정 ‘평가’로 값을 매기는 곳이 되었다. 신인 탤런트의 오열에 명품 연기라는 칭호를, 가난한 이의 절망에 동정 또는 무관심으로 답하는 이 빠른 반응은 범람하는 매체들의 속도전과 무관하지 않다. 익어야 제 맛인 건 김치뿐만이 아니다. 요즘 세상은 날것의 감정일 지라도 쉽게 매료되고 쉽게 잊는다. 나는 감정 홍수 시대 속에서 매일 다른 생각을 한다. ‘감정을 소비하면서부터 가치가 낮아진 것은 아닐까? 감정이 다시 고귀한 영역으로 되돌아 올 방법이 없을까?’

종교는 귀납법으로 아우르는 보편적인 감정을, 미디어는 연역법으로 개인의 이야기에 덧붙은 감정을 퍼트린다. 그러나 오래되거나 익숙해지면 무엇이든 무뎌지기 마련이다. 계속되는 고백 속에 진정성을 붙잡기란 쉽지 않고, 끊임없는 사연들 속에 특별한 감정을 얻기란 어렵다. 이제는 심리나 자기개발 서적과 강의를 통해서만 감정 그 자체를 접하게 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될 정도이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예술은 여전히 숱한 감정들과의 교감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정갈하고 소박하다. 조용하고 어둡다.

작은 무대에서 전해오는 감상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기분 좋은 긴장이자 집중의 신호였다. 2미터 남짓 되는 원이 그려진 작은 무대 위에서 두 쌍의 배우들이 각각 ‘고래’와 ‘넉손이’이라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배우들은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무대 앞에 놓인 램프에 불을 밝혔다. 램프는 불빛 너머의 신을 향한 연희를 의미한다고 한다. 실제로는 그 너머에 관객들이 있다. 이 작은 불빛은 공연자와 관객 마음 속에 있는 신과 같은 ‘정성’과 ‘바람’의 영역을 뒤섞이게 할 매개체였다.

공연창작집단 뛰다를 떠올리면 먼저 독특한 오브제-인형, 가면, 소품, 무대-와 연기부터 생각난다. 독특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들은 외형적인 요소뿐 아니라 작품의 출발점에서부터 내면의 영역을 섬세히 이끌어내는, ‘일그러진 아름다움’이라고 명명하고픈 예술 창작 방법을 구현하는 단체이다. 또한 연구와 시도, 공유를 성실히 유지하는 가운데 지역에의 정착과 교류 (강원도 화천), 새로운 시연 방법 (유목연극), 해외 창작 워크숍 (호주, 인도 등)과 같이 공동체성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이 정보들은 이번 작품에서 다른 경험을 안겨 줄 변화의 지점에 놓여 있었다. 무대는 비움에 가까웠고, 배우들은 본인의 얼굴 그대로 관객 앞에 나섰다. 무대와 도구, 말과 연기에 제한을 둔 이유는 고통을 담기 위해서였을까? 몸부림칠 정도의 극한 고통을 압축해서 드러내니 소극장은 거대함과 황홀함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를 위태롭게 항해하는 배로 변하였다.

 

 

3.

- 고래: ‘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은 어디서 왔단 말입니까?’

음악보다는 읊조리는 소리에 가까운, 세 악사들의 연주가 울려퍼지면서 첫 번째 작품 ‘고래’가 시작되었다. 고행을 하는 두 운둔자의 이야기는 마치 신화를 닮았다. 침묵 가운데 있다가 문득 말을 내뱉기 시작한 고래의 행복이 고래의 말을 먹은 물고기들의 행복과 뒤섞이면서 고래에게 고통이 밀려든다. 말로는, 몸으로는 심정을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은둔자들은 강가로 도망쳐 온, 몸집이 작아진 고래를 불쌍히 여겨 돌보지만 이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시 커진다. 그러던 중에 큰 비가 내려 천지가 휩쓸리고 새로운 세계가 다시 시작된다. 고래는 침묵 속으로, 은둔자들은 고래 뱃속에서 수행을 이어나간다.

은유 가득한 잠언을 말과 몸짓, 소리와 리듬에 실어 눈앞에 붙잡아 온 두 명의 배우에게 주어진 30분이 영원과도 같이 느껴졌다. 특히 역할과 장면 전환에서 돋보인 리듬의 변화가 내 숨소리마저 물들어버렸다. 묵직한 고래, 통통 튀는 물고기, 각기 다른 개성의 육지동물, 그리고 느린 시간을 사는 고행자를 연기할 때마다 표정이며 말투, 움직임은 물론이며 각 대상들의 급격한 감정 변화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여럿이 한 몸이었으며 그 사이에는 경계가 없었다.

신화의 세계는 기승전결이 아닌, 순환하는 고리와도 같다는 말이 떠오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비로운 생명체인 고래에서 시작한, 언어로 상징된 욕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은둔의 신비로움을 품은 고행자에게까지 이르는 과정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 쉴 틈 없이 내달리거나 갑작스레 멈추던 작품 ‘고래’는 고통 또한 갈피를 잡기 어려운 자연의 이치와 맞닿아 있음을 가늠하게 하였다.

- 넉손이 : ‘고통스럽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건 고통을 느낀다는 것.’

‘넉손이’는 팔이 네 개 달린 사람의 이야기이다. 성별도 나이도 정확히 소개하지 않은 넉손이는 태어나자마자 가족에게 버림받고, 인간과 자연이 내는 고통의 소리에 취해 살아간다. 더욱 격한 고통의 소리를 찾아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 넉손이는 어느 날 자신처럼 버려져 우는 아기를 저주하면서도 어렵사리 보살피지만 끝내 아기는 목숨을 잃고, 넉손이는 낮게 엎드린 채 자신의 고통이 멈추기를 기다린다.

이 작품에서는 넉손이가 만난 사람들, 넉손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두 배우는 실제 자신들의 성별과 나이에 갇히지 않고 자유자재로 역할을 주거니받거니하며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넉손이의 연기는 배우들이 찾은 합일점이자 고통에 뒤틀린 표현의 결정체였다. 기괴함에 그치지 않고 연민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감상의 근간에는 넉손이와 넉손이를 둘러싼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키는 감정의 변화에 있다. 배우들의 눈동자와 손끝 하나에도 갖가지 감정들이 깊게 어려 있었다.

이 작품은 괴담에 가깝지만, 신화이며 동화이기도 하다. 게다가 해설자라는 역할이 없음에도 (‘고래’에서는 고행자가 이를 대신한다.) 고통을 안고 살아가거나 애써 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간과 공간에 묶이지 않고 생생하게 그려냈으며, 관객들에게 현장을 목격한 증인의 심정을 안겨주었다.

 

 

4.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많다. 인도에서의 창작 교류 작업과 전통연희 ‘꾸띠야땀’에서 얻은 영감, 두 남녀 배우 중심의 작품창작과 크리에이티브 가이드라는 독특한 역할로 작품의 방향을 잡아 준 연출가, 그리고 고통을 주제로 한 이야기와 몸짓은 장면에 맞춰 여러 소리를 덧붙인 악사들과 하나가 되었다. 절제의 미학이라는 말도 있듯이, 군더더기를 덜어냈으니 더욱 가볍고 격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N극과 S극이 만나면 극한 반작용이 일어나듯이, 무대와 소도구의 제약은 연기 쪽에서 겉잡을 수 없는 에너지로 쏟아져 나왔다. 어떤 몸짓은 고행과도 같이 느껴졌고,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고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자 하나의 감정을 누군가의 역할과 이야기를 빌어 만들다보면 자칫 관념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두 작품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보편적인 가치와 구체적인 내용’에 가까웠다. 또한 어떻게든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애쓰는 여타의 작품들과 다르게, 고통에 대해 여지없이 열어놓은 이야기 구조와 작품 안에서 성장하려 노력한 배우들의 모습이 돋보였다. 특히 오늘의 이 작품들은 다음의 또 다른 감정과 작품으로 나아가고 있는 과정임을 알아달라는 신호를 많이 보냈다. 그렇다고 이 작품들이 미완성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여러 완성작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좋은 작품은 여러모로 열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모두 거대한 홍수가 발생한다. 천주교에서의 세례를 연상시킨다. 세례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의식이며 이 때에 성수를 머리에 붓는다. 홍수와 성수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억지스럽지만, 지난 날의 고통을 끊어버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삶을 그려내는 상징으로는 물만큼이나 훌륭한 것이 없다. 홍수 뒤에 찾아 온 침묵은 이전 소음과의 단절이면서 다음 소음의 시작이기도 하다. 물론 고통이 외부의 변화로 끊어진 와중에 이 고통이 영영 사라졌을 지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될 지는 알 수 없다. (상징과 은유가 많은 작품들이어서 자꾸만 이리저리 파고들어 사유하고픈 욕심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좋은 작품들이다.)

이야기와 섞인 감정들은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날이 선 감각과 몸짓으로 잔뜩 끌어내었다. 연기와 이야기를 본 게 아니고 휩쓸렸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의 잔상은 기억 속에 짙게 남았다.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땀방울과 미세하게 떠리는 근육들, 공포와 분노 그리고 허망에 젖은 눈빛은 차갑게 식어가는 겨울에 접어든 이 때에 너무도 뜨겁게 다가와서 배우들에게 서툰 감상을 내비추지 않으려 애썼다. 그저 멈추지 않고 고통을 탐구하는 자세에 감사함이 일었다.

 

 

5.

두 작품을 아우르는 대제목인 ‘고통에 대한 명상’에 비추어보면, 고통은 끝맺음보다는 완화나 대안으로 풀어나가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통은 무자비하면서도 새 삶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껏 소리내어 울고, 소리지르고, 욕을 내뱉고, 뼛 속 깊이 감정을 삼키는 모든 고통의 표현은 맨 처음의 시대에서부터 내려 온 가장 본능적이고도 순수한 감정이지 않을까? 어쩌면 고통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감정의 표출이기에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고통을 극복하게 되면, 인생을 견딜만 한 것으로 여기게 해 준다.

처음에 이야기한, 감정이 단순히 공통의 약속이며 쉽게 소비하고 내뱉는 풍토 속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힘이 약해지는 오늘날에 대한 우려를 ‘예술’이 있기에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을 거듭 강조한다. 예술은 감정을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얕게 대하지도 않는다. 감정은 예술이 인간과 세상을 다각도로 바라보기 위한 나침반이며, 수없이 탄생하는 길을 따라 나선 여정이다. 공연창작집단 뛰다를 따라 나선 길 위에는 고통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여 마음껏 뛰어다닌 배우들의 발자국들이 가득 남아 있었다.

 

*사진제공_공연창작집단 뛰다 기획팀

**공연창작집단 뛰다 페이스북 페이지 바로가기 >>> www.facebook.com/tuida.page

 글_김해연

 소개_서울사람, 여자, 우주의 한 점, 블랙홀의 씨앗, 초콜릿과 고양이 사이에서 휴식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