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31. 23:17ㆍReview
갤러리에서 퍼포먼스를 보다 :
444개의 상처, 444개의 치유
"2013년 한국실험예술제"
글_정진삼
0. 들어가며
이 글은 2013년 한국실험예술제의 갤러리 퍼포먼스, "444초 퍼포먼스 릴레이" 를 목, 금, 토 3일간 보고난 후의 기록이다. 여기선 평가보다는 기록에 그 의미를 두고자 한다.
1. 플럭서스로 부터
홍대 앞에서 순수예술 축제를 표방해온 민간단체인 한국실험예술제는 1960년대의 플럭서스 전통의 가치를 표방한다. 플럭서스는 백남준과 존케이지를 비롯한 당대의 아방가르드한 예술가들이 시대정신과 자유로운 표현, 그리고 협업을 통해 실험정신을 드러낸 활동이었다. 이같은 정신을 받들어 한국실험예술제는 출발 당시부터 ‘퍼포먼스 아트’ 분야의 선구자, 계승자임을 자임했던 것이다.
허나 '다원예술 퍼포먼스' 나 '수행성 중심의 공연' 혹은 '포스트드라마 연극' 들이 실험연극, 아방가르드 공연예술계의 헤게모니를 가진 이후, 어쩌면 지금의 한국실험예술제는 조금은 시들해지고 조금은 시시해졌는지도 모른다. 주류에서 벗어나 비주류의 기치를 세우며 전개해오던 초기의 정신은 여전하다쳐도, 실험예술제의 공연들은 실험을 부르짖는 동시대 공연예술들과 어떠한 차별성과 변별력(극악하게 말해 경쟁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그대로 남는다. 과연 어떨까.
허무한 말이지만, 이러한 비교우위적 물음은 이 축제엔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제도권 내의 '진입을 통한 발전' 을 거부해온 아웃사이더는 '성장이냐 퇴보냐(혹은 유지냐)' 하는 딜레마적 질문은 그 질문을 던진이를 머쓱하게 만든다. 나름대로 자신을 추슬러온 축제에게, 진짜 고민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니까.
예술이라는 것이 - 자연스러운 '쾌' 감정의 발로이든, 혹은 근대적 미감과 예술의식이 제도화 한 것이든 - 이 축제에서 발발하는 놀라운 그리고 미결정의 사건들은, 일차적으로 비슷한 리그의 예술가에게, 이차적으로는 소수의 대중들에게 의외의 미학와 감동을 전달해준다. 강한 펀치력으로 상대를 뒤흔드려고 하는 것은 분명 아니리라. 작은 그러나 여럿의 쓰다듬이라고 해야할까. 혹은 소규모의 헤프닝들이 모여 만드는 난동이라고 해야할까.
11. 재야의 예술
그 힘이 미미하다고 할지언정, 개별적인 예술가들이 동인을 이루어 지속해온 이 독특하고 개성적인 축제가 의미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 오히려 다원예술이 적극적으로 공연예술계로 포섭된 현재 상태에서, 제도 바깥 혹은 재야에서 나름의 예술을 진지하게 혹은 발랄하게 탐색하는 모습에 오히려 관심을 둘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예술의 정도를 완성시키거나, 경계를 넘나드는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안의 미학,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유연한가,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수용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나 되나, 하는 태도로 난동을 즐겨 볼 수도 있겠다. 달리 말하면, 이 특별한 축제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제도 따위의 눈치보기나 경향에 맞춰 견줘보기 보다는 예술자연인으로써의 ‘나’ 자신의 의식과 감각이 중요한 것이다.
22. 나-들
이번 한국 실험예술제는 ‘우리’ 라는 사회적 구성체를 불러내 각성과 반성을 주입하기 보다는, ‘나’ 로써 축제에 임해줄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이 축제는 급하게 ‘우리’ 를 불러내는 대신, 수많은 ‘나-들’ 이 제각기 웃고 떠들면서 관람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구성 주체의 '다양성' 이 중요한 항목임을 되새기게 한다. (어쩔수 없이) 시대 흐름에 따라 힘이 약해진 실험-예술가들의 존재 함성을 하나의 묶음으로, 묘한 화음으로 불러내는 것이 본 행사의 매력일터. (물론, 이들이 내세우는 ‘시대정신’ 은 우리와 사회를 매개하는 냉철한 사회의식이기 보다는, 나와 예술, 나와 세계의 사적이고 은밀한 관계, 즉 자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33. 444의 컨셉
444초 릴레이 퍼포먼스는 과거 실험예술제가 해왔던, '배틀' 형식이나 혹은 제한없이 허용된 러닝타임하에 마냥 늘어졌던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 압축적이고 리드미컬한 진행을 위해 도입된 방식이다. 죽을 사(死)를 연상시키는 ‘444’ 초는 동양적인 늬앙스를 가지는 동시에 ‘죽음의 제의’ 와 ‘삶의 형식’ 을 교차시키는 시공간적 가이드라인을 작동시킨다. 엄밀히 말하면, ‘팀’이 아니라 ‘개인’으로 움직이는 실험예술가들에게 공간의 발견 혹은 공간예술의 실천은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크게 욕심내지 않고, 예술가 개인에게 허락된 응축된 시간을 집중력있게 선보였다. 빈무대에 1인 아티스트. 그리고 그가 준비한 오브제로 관객의 절대적 주의와 감각을 집중시키고자 한 것이다.
44. 관객의-
관객의 입장에선 죽음을 상징하는 그 시간 동안, 시간의 죽음이 아닌 예술의 살아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실제로 작품들의 구성 또한 제의적인 요소와 죽음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가 많았다. 한편으로 관객들은 자기 앞에 놓여진 실험예술이라는 어려운 상대를 무한정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주어진 시간에 맞춰 예술작품들을 해석하고 풀어낼 임무도 부여받았다. 타임 ‘카운터’ 라는 직책은 관객들에게 압박감이 아닌 해방감을 주었으며, 다양한 작품들을 보다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자비(mercy)로운 한국실험예술제의 관객들은 자신과 맞지 않는 작품의 경우에는 속으로 “What's next?” 를 되뇌이게 하며 기대감과 흥분감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간의 공유와 함께 갤러리라는 공간의 공유는 실험예술이 벌어지는 지금, 여기가 시선이 다발적으로 열려있는 장소이며 따라서 시각적 자극만을 탐하는 관음증적 공간이 아니라, 소규모의 광장임을 인식시켜주었다.
55. What is Next
올해 한국실험예술제는 “What is Next?”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한편으로 홍대 앞과 제주를 연결하는 ‘아트로드’ 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이들이 원래 갖고 있었던 야성과 생태주의적인 의미를 다시 의제화하고자 했다. 결국, ‘도시’ 라는 반예술적 상대, 자본주의적 괴물과 거리를 두려는 2000년대말 실험예술제의 화두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작가들은 이러한 도시와 나의 상황을 예술의 장면으로써 표현하고자 했다. 부연하자면, 이제 실험의 의미가 ‘아방가르드’ 보다는 ‘모험’ 에 가까울 때, 아트로드는 이러한 탐험을 위한 ‘길 찾기’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6. 12월 12일 첫 인상.
갤러리 퍼포먼스는 서교예술실험센터 1층에서 거행된 이번 실험예술제의 메인 프로그램이다. ‘444’ 초라는 시간제한을 두고 릴레이식으로 공연이 이어진다. ‘4’ 라는 숫자에 죽을 사(死)의 늬앙스를 더했다. 어두움을 강조했으나 실상 7분 24초라는 러닝타임이 더욱 명쾌하게 다가온다. 5분과 10분 사이에서 자신의 퍼포먼스를 압축 전달해야 하는 실험예술가의 아이디어 구성이 실로 기대가 됐다.
맨 처음 무대에 올라간 애기보살 부아진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무당. 그녀는 무속음악을 BGM으로 등장하더니 이내 비트에 맞춰 굿종을 흔들어댄다. 무당은 신세대 춤꾼들이 할법한 분절된 몸짓을 선보이고 이내 흥을 요구하는 손짓을 보여준다. 마이크에 대고 신내림 언어를 줄줄 읊다가 뚝, 그친다. 선글라스를 벗고, 가발을 벗자 짧은 민머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절을 하니 공연이 끝났다. 444초라는 설정과 헤프닝에 가까운 내용이 워밍업이 안된 관객들에게 낯설음을 불러일으켰다. 반응도 마뜩찮다. 극장이든, 갤러리든 혹은 거리든 이러한 퍼포먼스의 세계로 차원이동을 하기위해서는 초반의 진입장치가 필요하다.
문정규 작가는 “커플끼리 온 사람은 누가있을까요?”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삼십명 가량 모여앉은 관객들이 두리번 거리며 눈치를 본다. 아직 이들의 마음이 ‘덜’ 열린 탓이리라. 참여를 종용하는 애타는 예술가의 질문에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저요~” 를 외친다. 거기에 다행히(?) 한 쌍의 커플이 추가로 무대 위에 올랐다. 예술가가 아닌 세 명의 일반인은 서로 꼭지점을 이룬다. 예술가는 떨어뜨려 놓은 이들을 흰색의 포승줄로 묶기 시작한다. 무대 위에 끌려온 일반인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이다. 예술가는 진행이 쉽지 않자, 시덥잖은 멘트를 날린다. “많은 사람들이 묶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자원하여 올라온 여성관객이 “편안함?” 이라고 대답하자 예술가는 당황한다. “안 묶여봤죠” 라고 대답하고 이내 일반인 참여자들을 둘둘 묶기 시작한다. 어느정도 묶음이 완성되자, 예술가는 ‘관계’ 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를 하고 퍼포먼스를 마친다. 반전을 통해 사유를 바라는 예술가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강도와 몰입이 약해던 지라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다.
77. 성능경
성능경 작가의 퍼포먼스를 묘사하기 이전에 그의 존재를 살펴본다. 그는 70년대 사회체제 비판적인 행위미술을 시작한, 한국 퍼포먼스의 선구자 그룹에 속하는 1세대 실험예술가이다. 현재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한다. 실험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젊은이들을 위한 장르이던가, 를 생각해보면 외관상 어울리지는 않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본 축제에서 노익장을 과시한다. 성능경 작가는 등장하면서 뒷벽에 못을 하나씩 박는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훌훌 벗고, 이를 걸어놓은 다음, 미리 준비한 왕의 복장인 시스루 황금망토를 걸친다. 그리고 그가 시작하는 것은 자위행위. 미리 불러놓은 어린 여자스탭이 벽에 붙어 숫자를 하나씩 부른다. 444가 되기 전까지 자위를 할 모양이다. 관객들은 그의 도발에 아낌없이 넘어가주려는 듯 흥미로운 얼굴이었다. 타임오버. 그리고 그의 자위는 분출하지 못했기에 실패인듯 하나, 그는 미련이 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88. 현장
첫째날은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축제의 전체적인 그림이 아직 덜 그려졌다고해야할까. 운영에 있어서 경험이 부족한 스탭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공연의 릴레이 과정 또한 깔끔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축제의 공간 ‘데코’ 가 덜 완성되어서인지, 기지로 삼은 서교예술실험센터가 맨 몸을 드러냈다. 전반적으로 목요일 밤이라는 시간도 관객들이 참여하기에는 애매한 시간대였다. 첫날 관객들은 대체로 행사의 관계자와 중년층, 그리고 외국인이 다수였는데, 기존의 축제관객층을 고려할 때, 젊은이들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특이하게 많았다고 느껴진 것은 바로 카메라를 든 촬영관계자들이었는데, 객석의 앞자리를 다수 점한 것과 이들이 내는 셔터소리 등등은 실상 관극을 방해할 정도로 과한 것이기도 했다. 실험 예술의 헤프닝, 라이브 아트가 현장 기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 것은 ‘현장’ 그 자체를 앞설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99. 예열
실험예술제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갤러리 퍼포먼스는 그 이름에서부터 ‘미술’ 장르를 은연중에 호명하고 있다. 따라서 요청되는 것은 일종의 ‘큐레이팅’ 이라고 할수 있는데, 바꿔 말하면 이는 관객이 즐거워질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며,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여러 접속 창구를 개방하는 기획적인 노력일 것이다. 아쉽게도 첫날 갤러리 퍼포먼스에 있어서 디테일한 큐레이팅은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날 찾아온 관객들은 조금은 뻘줌했고, 예술가의 (작품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발휘되는)거칠고 강압적인 태도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실험예술제는 축제의 연속성을 가지고 꾸준히 지켜봐야 그 의미와 가치를 따져볼 수 있는 축제이다. 그런 연유로 첫날의 프로그래밍과 축제운영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미학적인 진단으로써 후퇴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진정한 미학을 발견하게끔 만들어주는 ‘예열’ 의 시간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첫날은 다소 아쉬웠다.
100. 12월 13일 두번째 날
첫날과는 다르게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지인들이기도 했고, 순수 관객이기도 했다. 금요일이라는 점 때문에 홍대를 찾은 뜨내기 관객들도 있었다. 허나 호들갑스럽게 자신의 관객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이 곳이 홍대 앞임을 증명했다. 더러 축제와 어울릴것 같지 않은 어린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갤러리 퍼포먼스 444의 첫 번째 주자는 독일에서 온 Andreas Stedler. 얼굴을 포함하여 전신에 하얀색 분칠을 하고, 벗은 몸을 드러낸 채 락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의 움직임은 단순히 박자를 타는 움직임이 아니라 마치 신령한 무당의 몸놀림처럼 느껴졌다. 짤막한 퍼포먼스가 끝나고 전환장면에서 등장한 김백기 예술감독은 이 아티스트가 일반인임을 강조하며, 그의 춤이 ‘죽음의 춤(danse macabre)’ 의 개념에서 따왔음을 일러주었다. 다음 퍼포먼스를 위해 무대가 정리될때, 예술감독의 설명은 대체로 ‘너무 해석하려고 들지 말자’ 와 ‘예술과 삶의 경계는 없다’ 로 요약될수 있는데, 가끔 그러한 구호말고 작품과 맞아떨어지는 명료한 설명이 이어질 때 관객의 관람은 크게 용이해졌다.
111. 나비다, Peter Rosvik
두 번째 예술가는 한국의 나비다. 미리 준비한 전신거울을 중앙에 놓고 이를 통해 자신의 몸을 비쳐본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동작을 따라하는 거울과 놀더니, 이내 객석의 관객을 호명하여, 거울놀이를 시작한다. 파트너를 바꾸는 것은 쾅! 하고 귀에 내리꽂는 효과음. 거울놀이에 길들여진 관객들은 이내 나비다의 수행보다 앞서나가 그녀를 따라하는 호기로움을 보이기도 한다. 이 장면은 서로 맞절을 할때는 정겨움으로, 도저히 따라할수 없는 물구나무서서 노래하기 할때는 괴로움으로 나타났다. 이 퍼포먼스를 실로 관객들이 더욱 재미있어 했는데, 그럼에도 정해진 시간마다 울리는 쾅, 하는 굉음이 흥겨움을 종결시켜 여운을 자아냈다.
세 번째는 Peter Rosvik. 그는 데스메탈의 과격한 사운드 아래 맥주 한모금을 들이키고는 담배를 피며 무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손에든 검정색 락카로 붉은 장미 한송리를 검은 꽃으로 만들었다. 뒤이어진 퍼포먼스는 더욱 과격했는데, 탈색한 꽃을 벽에다 세게 내리쳤다. 그리곤 검정 범벅으로 얼룩진 자신의 옷을 오려 자신의 배에 대고 ‘타카질’ 을 하였다. 많은 관객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자신의 배에 행해진 자해의 순간들이 통증의 자극으로 전해오는 듯 했다. "What is next" 라는 축제의 캐치프레이즈가 벽에 붙었고, 잠시나마 관객들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듯 했다.
123. 박기영, 김형기와 아이들, 사토유키에
곧이어 등장한 참가자는 박기영 아티스트. 청각장애를 가진 그녀는 말없이 행위예술을 시도하였다. 먼저 남자 관객 한명을 무대로 불러들이고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전한 뒤, 자신의 목뒤에 벽돌을 달고 일종의 ‘버티기’ 를 시도하였다. 남녀의 애틋한 관계를 형상화하듯, 그리고 서로다른 입장에서 불통하는 한계상황을 드러내듯, 박기영은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 과정을 끈기있게 지켜보는 것이 이 퍼포먼스의 핵심이었다. 아이스크림은 점점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극기를 이룬 후에, 상대 남자의 목에 벽돌이 걸리는 관계 역전의 순간이 찾아오자 관객들은 깔깔거리며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실로 울림이 있는 퍼포먼스였다
다음은 김형기와 아이들이라고 해야 옳겠다. 아버지와 자녀들, 그리고 자녀의 친구로 구성된 이 조합은 축제의 예술감독이 누누이 말하듯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나듦의 순간을 보여준다. 최연소 4살 출연자 이후의 연소자란다. ‘숲’ 이 백그라운드 음악과 영상으로 펼쳐진다. 나무 장군의 복장을 한 아티스트와 아이들이 일렬로 돌다가 칼싸움을 하고 그 맥락없는 전개 이후 중앙의 나무로 우뚝 선 김형기. 아이들이 퍼포머로 나와서인지 공연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다. 아이들은 춤추고, 나무 주변을 뛰어놀다가 고요하게 막이 내린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헌신이 핵심적인 의미인지, 혹은 자연을 억압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어적으로 접근한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애매했다. 다만, 생태적인 매시지는 분명했다. 예술가가 생태적인 존재를 표명하며 스스로 그 안으로 뛰어들 때, 순수함을 위해 동원된 아이들은 다양한 의미해석이 가능한 또 하나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다음 타자는 밴드 곱창전골의 기타리스트 사토유키에. 역시나 그가 들고나오는 것은 기타. 허나 그는 연주하지 않는다. 존케이지의 <4분 33초>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 사토가 뛰어난 기타리스트라는 맥락을 안다면, 그가 기타를 뒤집어 놓고 치는 흉내를 내는 것이 얼마나 감질만 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MR을 틀어놓고 열심히 기타싱크를 하던 그에게 관객들은 환호성으로 화답하며 동참한다. 사토 유키에의 연주하지 않는 기타 연주회가 끝났고, 관객들은 천연덕스럽게 박수를 보냈다.
200. Frederic Krauke, 이명환
Frederic Krauke는 올해 실험예술제의 출연 예술가 중에 가장 괴짜라고 할 수 있었다. 펑크 스타일로 자신을 드러낸 그는 면도칼로 단단하게 엉킨 자신의 머리를 삭발해나간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한편으로 준비한 물고기의 속을 칼로 파낸다. 신체를 헤집는 그의 손이 거침없고 과격하다. 물고기를 난자하는 장면과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장면이 교차되는데, 어느 순간 그의 머리통에 선명하게 베인 상처가 드러난다.
예기치 않은 자해에 이어 프레데릭은 자기옷을 찢으며 점점 물고기와 같은 나체로 변해간다. 결국 전신을 숨김없이 드러낸 그는 생선을 붕대로 감아 응급 처치를 시도하고, 자신도 깔고 누운 카페트를 여밈으로써 강렬한 퍼포먼스의 대미를 장식했다. 관객들은 다소 거칠고 폭력적인 퍼포먼스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으나, 시종일관 진지하게 의식을 수행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끔찍한 장면에서는 어른, 어린이 관객 너나할 것 없이 난색을 표명하였다.
이어지는 이명환의 무대에서는 자전거가 핵심 오브제로 차용되었다. 어떠한 자전거인가. 뒤가 없는, 그러니까 앞만 있는 두 개의 핸들이 장착된 자전거다. 그런 연유로 이 자전거는 탈수는 있되, 전진할 수 없는 자전거이기도 하다. 본래 자전거의 기능이 후진이 불가능한 이동수단임을 감안할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자전거의 출현은 의미심장하다. 서로 다른 방향을 갖고 있기에 이 자전거가 할수 있는 일이란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일이다. 실제로 퍼포머는 이 자전거를 양쪽에서 운전하면서 원을 그리며 무대를 돌았다.
여느 예술가와는 다르게 작가 이명환은 본 퍼포먼스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아프리카 가나지역의 죽음의 강이라는 ‘오다(Oda river)' 지역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되었다는 것. 광산지역 개발과 맞물리면서 가속화된 아프리카 지역의 환경파괴를 보고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앞뒤가 각각 똑같은 모양의 자전거가 무대를 빙글빙글 도는 것 뿐이었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삶의 방향성 상실을 은유로서 보여주고자 했다. 더불어 생태적인 메시지를 중심에 둔 작가의 의도가 신선했다. 지난 2012년의 실험예술제 테마가 다름아닌 ‘바퀴’ 였는데, 이러한 작품을 통해 과거의 퍼포먼스가 환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인간을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과 기술 그리고 문명이 오히려 인간과 자연을 억압한다는 간명한 의미가 빛을 발했다.
222. 생태주의
실험예술의 경우, 그 개별적인 존재들의 함성은 생태주의와 만날 때 파급력이 강해진다. 즉, 우열관계, 위계관계가 아닌 종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죽음을 이겨내고자 하는 생명의 차원에서 예술의 가치가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즉, 어떠한 생명이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실험예술의 축제 속에서 드러나는 여러 예술작품은 모두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이 일순간 인간에게 무용하게 보일지언정, 다른 존재를 해치는 행위가 아닌 이상 우리는 그것을 보호하고 아껴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234. 12월 14일 (토) 세번째 날.
축제가 3일째에 접어들었다. 본격적인 주말의 시작이어서인지 거리에도 그리고 축제 공간에도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관계자를 중심으로 관객군을 형성했던 첫째날과 둘째날과는 다르게 다양한 층위의 관객들이 실험예술과 마주하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필리핀에서 온 여성작가, Vim Nadora의 무대. 만신을 연상시키는 빨간색 한복의상을 입은 여성 퍼포머가 등장했다. 마이크에 대고 구슬픈 소리를 한 곡조 뽑는다. 출처를 명확히 따져 알 수 없는 무악(巫樂)이지만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음향편집이 가해진 굿음악은 에코의 효과로 미스테리함이 가중되었다. 무당의 맞은편 에어캡을 막으로 삼아 둘러 내린 또 하나의 무대. 막 뒤에서 붕대를 칭칭감은 미이라가 누워 있다가 괴성을 지른다. 무당의 조문을 뒤로하고 군가의 소리가 덧입혀지고 전쟁의 효과음들이 공연장을 뒤덮는다. 하울링과 노이즈 섞인 사운드가 반복되면서 관객들의 불편한 감성들이 자극된다. 막 뒤의 시체는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데, 그는 천천히 준비한 우산과 쓰레기통을 도르레를 통해 하나씩 걸어 올려보낸다. 최종적으로 막을 걷어내는 무당. 그리고 일어나 사라지는 ‘앞서’ 죽은 자. 이 퍼포먼스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위령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작품은 무속을 표방하는 듯 했지만 차려진 재단 위에는 붉은 색의 십자가가 강렬하게 그 이미지를 뽐냈다. 무당은 중간중간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짖었고, 찬송가를 노래하는 등 기독교적 색채를 강하게 발산하였다. 연극에서 '종교' 가 차용될 때, 그것은 대체로 희화화된 형태로 반어적이거나 우화적인 의미를 갖는데, 이 헤프닝에서는 진지한 '제의식' 의 성격이 강하게 두드러져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321. Tizo All, 이미지 무브먼트 웍스
한 남자가 나와 벽에 풍선 붙인다.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한 그는 완전한 나신이 되자 그는 총을 들어 풍선을 겨눈다. 벽에는 신체의 각 부분이 스크리닝 되는 중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신체를 겨누고 자기의 주요 부위를 쏘아 터뜨린다. 이어 괴성을 지르며 객석을 누빈다. 하나씩 빵 빵 터지는 풍선에 관객들은 깜짝깜짝 놀란다. 이미 남자의 가릴 것 없는 나신을 보고 객석은 숨을 죽이고 있었던 터. 한켠에선 나레이션이 들려온다. “다음은 무엇인가? (What's next?)" 라는 모티브 문장을 가지고, 계속 질문이 이어진다. 환경정책 다음은 무엇인가? 다음 챔피언은 누구인가? 다음 위기는 무엇인가? 다음 아이폰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도래할 수많은 ‘다음의 것’ 에 관한 질문들이 남발되는 과정에서 남자는 다음의 것들이 과연 좋은 것인지 우리에게 반문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을 파괴하는 권리를 주장한다. 머리위에 매달린 거대한 풍선까지, 모조리 터져버린 다음 그는 장렬히 퇴장하였다. Tizo All 의 퍼포먼스 였다.
이미지의 색채가 도드라지는 공연이 이어졌다. 이미지무브먼트 웍스의 퍼포먼스다. 하얀가면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두 명의 배우가 번개를 안고 등장한다. 이어서 노란색 의상을 입은 여자가 노란색 휴지더미를 들고 있는 원을 그리며 무대를 찬찬히 걷는다. 진중한 느낌의 첼로 선율이 무겁게 내리깔린다. 품에서 빨간 실타래를 꺼내는 검은 망토의 사나이들. 이들은 공간을 여기저기 이으며 서성댔고, 여자는 그 사이를 통과하며 발레와도 같은 섬세하고 느릿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바닥에 흩뿌려지는 종이와 제각기 얽혀드는 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첼로음악이 초현실적 시간의 이미지들을 구동시켰다. 그리하여 연상되는 것은 죽음. 실내에서의 공연을 마친 공연자들은 장외로 사라졌다. 빈 무대의 영상 속에서 이들의 야외판 퍼포먼스가 다시 선을 보인다. 이 작품은 외려 ‘아름다움’ 을 숨기는 여타의 실험예술제 공연들 중에 기존의 미적인 요소들을 차용하여 꾸민터라 이질감이 강했다. ‘이미지-무브먼트’ 라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시각적인 장면들로 전체 흐름을 완성하였다. 함께 배치된 작품들에 비해 과히 얌전했고, 다소 무난했다. 심심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333. 장영지, Andreas Stedler, 이영현
장영지는 서정적인 춤을 보여주었다. 빨간색 천으로 몸을 감싸고, 하얀 가면을 들고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처연하고 감성적인 음악 탓인지 몰입이 자연스러웠다. 앞서 나온 퍼포먼스를 이어받은 듯 바닥에는 노란색 휴지들이 가득했는데, 폐허 속에서 춤을 추는 여성의 우울한 분위기가 독특하게 느껴졌다. 둘둘 몸을 싸고 있던 천이 풀려나오며 감춰져있던 예술가의 얼굴이 드러난다. 빨간 색 천을 이용, 가면의 눈을 통과시키는 동작에 이르자, 피눈물을 흘리는 페르소나의 이미지가 선명해졌다. 이를 등에 업으니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굴레가 떠올랐다. 예술가는 최종적으로 가면을 쓰고 빨간천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가면과 천, 그리고 춤으로 이뤄진 단조로운 구성이었으나 주제의식을 흩트리지 않고 돌진해 나갔다. 이전까지 느껴지지 못한 서정성과 아름다움에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실상 한국실험예술제는 ‘남성성’ 혹은 ‘수컷’ 이라고 불리우는 존재성이 강하게 발휘되는 축제이다. 아마도 그것은 실험예술이 갖는 거칠고 과격한 면모가 부각되어서일 것이다. 한편으로, 개별성과 단독성으로 세상과 맞설 때 취하는 하나의 포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축제에서는 부드러움과 내밀함의 여성성이 드러나기 어려운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작품이었다. 관객들은 장영지의 서정적인 춤에 잠시 말을 잃었다.
Andreas Stedler 는 실험예술제의 기간동안 매일매일 색다른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 내용도 주제도 늘 다르다. 말총머리에 괴상한 복장이 눈에 띄어 어느덧 축제의 명물이 되었다. 팬티만 입은 그가 등장하여 벽에 두장의 대자보를 붙인다. 그리고는 준비한 솥을 중앙에 놓고 물속에 얼굴을 쳐박는다. 아마도 그가 선택한 행위는 ‘잠수’ 인 것이다. 과연 444초라는 게임의 룰을 지킬수 있을 것인가. 100초도 지나지 않아, 숨을 몰아쉬면서 그가 잠수를 마친다. 흠뻑 젖은 얼굴로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한해 아프리카를 떠나는 난민들의 죽음 가운데 상당수는 익사사고로 죽는다.’ 알고보니 보트피플로 본토를 떠나 유럽으로 향하다 죽음을 맞이한 그들을 추모하는 퍼포먼스 였다는 것. 단순히 숨 오래참기의 놀이로 여겨졌던 퍼포먼스가 갑자기 숭고한 순간을 맞이한다. ‘죽음을 기억하라’ 는 메멘토 모리적 의식이 기저에 깔린 이번 실험예술제에서 간단한 수행으로 진중한 의미를 전달하는 갤러리 퍼포먼스의 취지에 합당한 작품이었다.
뒤이어 등장한 이영현 작가의 오브제는 백설기. 그는 탐욕스럽게 떡을 먹는 연기를 표현한다. 우걱우걱 씹고, 으깨고, 잡아 뜯는 그리하여 떡먹기 퍼포먼스가 실행되었다. 처음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퍼포먼스 처럼 보였다. 허나 그는 그 떡을 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감을 감퇴시키는 연기가 이어졌다. 무대 곳곳을 돌아다니며 퉤퉤, 하고 떡을 뱉어낸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속으로 삼키지 않고 ‘씹어댈’ 뿐. 그리곤 다시 입안의 음식물을 배설한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그는 바닥에 떨어진 떡을 다시 줍는다. 관객들의 우려가 섞인 예측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사방에 배설된 자신의 토사물을 합친다. 그리고 손으로 짓이겨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다시 입에 넣지는 않을까, 관객들이 걱정을 하는 찰나 떡이 된 떡을 벽에다 던진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떡.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시 뱉어내지만, 결국 다시 자신이 소화할 수밖에 없고,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간명한 메시지를 담은 자기성찰적, 자기위해적 퍼포먼스였다.
345. 한관희, 그리고 파시즘
이번에는 젊은 실험예술가인 한관희의 무대. 그는 ‘안녕들하십니까’, 라는 시의적 멘트로 시작했다. 자신을 때릴 기회를 준다며 관객들을 무대로 초대한다. 조용히 앉아 관람하기만 했던 관객들은 이제 활기차게 무대로 올라가 예술가를 팰 준비를 한다. 관객들은 무대 앞쪽에 준비된 몇 개의 양초가 다 꺼질 때까지, 퍼포머를 ‘매’ 타작 할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자신이 만든 룰이므로 괜찮다는 구타의 합법성을 알리는 예술가의 모습이 안쓰럽다. 관객들은 예술가의 폭력성 못지 않은 자신의 폭력성을 감추지 않으려는 듯 몸을 풀었다. 열댓명이 올라간 무대는 금세 가득 찼고, 그들의 오른 팔에는 빨간색 완장이 둘러졌다. 무엇을 하려는지 대략 예상가능한 퍼포먼스이기는 했지만, 이 헤프닝을 진행하는 희극적인 예술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퍼포먼스가 시작되자 집단구타가 시작되었다. 1인을 향한 집단적 린치는 비록 1분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신나게 한관희 작가를 내리쳤다.
1부가 끝나면 곧바로 2부가 이어진다. 예술가를 때렸던 관객들이 일렬로 서서 비닐에 묶인다. 한관희 작가는 아까의 매가 아직도 고통을 수반하는 듯 찡그리면서 락카로 비닐위에 나치의 문양을 그리고 준비된 자료를 읽는다. 파쇼. 이것은 하나로 묶다, 하나의 묶음이라는 뜻을 그 어원으로 갖고 있다는 말.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규율과 제도에서 벗어난 개별적인 존재를 용납지 않는 전체주의의 단일성과 거기서 비롯된 폭압성을 관객들이 체험하게 해준 씁쓸하면서도 즐거운 퍼포먼스였다. 급격한 의미화로 냉각될 수 있는 갤러리의 분위기를 희극적인 한관희 작가의 캐릭터가 부드럽게 해주었다. 실험예술제의 작품들은 이렇듯 물리적인 자기피해 혹은 자기손해를 감수하면서 관객들에게 촉각적, 즉각적 감각을 일깨우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이 유쾌한 자극이냐, 혹은 불쾌함만 유발하느냐, 하는 것이 어쩌면 관객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399. 신진식
신진식 작가의 무대에는 세명의 여자배우들이 등장했다. 전면에 투사되는 444초의 타임 카운트. 배우들은 무대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한다. 배경음악으로 선택된 것은 농악풍의 길놀이 음악. 세명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행위는 간단하다. 하나씩 옷을 벗는 것. 이들은 시계를 끌르기도 하고, 자신의 속옷을 벗어제끼기도 한다. 관객들을 관음증으로 인도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다. 관객들을 살펴보니, 여성 관객들은 비장하게 쳐다보고 있고, 남성 관객들은 침을 삼키며 보기도 한다.
어느덧 시간은 반수가 훌쩍 넘었고, 무대중앙엔 옷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금세 가벼워진 차림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여자배우들은 중요부위를 전혀 노출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옷을 벗으며 위성처럼 중심을 돌고 있다. 앳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여자배우들이 완전히 노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가 드러나자, 이제 관객들은 관음증적인 시선을 거두고, '노출' 과 '은폐' 에 대한 사유를 지속시켜 간다. 야성/야만 공동체는 와해되고, 다시 실험예술제로 돌아왔다. 이 퍼포먼스는 한정된 시간을 이용하면서 남녀간에 작동하는 시선의 관계와 허물벗기라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활용하였다. 444초가 되자 딱, 종이 쳤다. 자신만만했던 배우들은 살짝 수줍은 표정으로 극장을 빠져나갔다.
404. 유도화, Matt, 한큐와 관객들
이어지는 작품은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명쾌한 극이었다. 유도화 작가는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내리치는 손을 부각시킨다. 타이핑하는 액션은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점점 과격해지고 거칠어지는 모습에서 이 작품이 '키보드 워리어' 에 대한 것임을 짐작케한다. 그리고 종이를 접어 비행기를 날리는 퍼포머. 화면속의 키보드는 빨갛게 물든다. 객석에서 비행기를 잡은 관객들이 종이를 펴보면 나비의 그림과 글귀가 적혀있다. 유도화 작가는 함께 읽기를 요청하고, 관객들은 그 악플이 달린 글귀를 소리내어 읽기 시작한다. 험담과 악플로 이젠 익숙해져버린 수사들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없다. 이 작품의 제목은 "버터플라이 효과" 라고 한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엄청난 태풍을 만들어낸다는 말. 여기까지는 평이한 전개라고 할 수 있었는데, 유도화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자기 스스로 악담을 함으로써, 자기반영적 창구를 하나 더 발견해낸다. 이게 내 작품이야. 뭐라구? 그래 나 작가다. 조까라. 라고 '리플라이' 함으로써 왜곡되고 편파적인 대화의 일그러짐을 구현해냈다. 악플을 근절합시다! 라는 캠페인성 퍼포먼스로 완결되는 찰나, 작가는 한마디의 조롱섞인 말을 툭 던진다. 이게 무슨 악플근절이야, 하하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기승전결을 종잡을 수 있고, 빠르게 의미화에 달성할 수 있었던 유머러스한 공연이었다.
Matt는 간단한 줄을 가지고 벽에다 프레임을 만든 뒤 자기 자신을 그곳에 안착시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 스스로 박수를 받는다. 작가의 자아도취는 셀프카메라를 찍는 대목에서 더욱 웃음을 유발하는데, 스스로 작품이 되어 우쭐해하는 모습에서 희극적인 장면이 도처에서 만들어졌다.
이어지는 무대는 한큐의 작품. 그러나 시작부터 무대는 텅 비어있다. 예술감독이 작가를 찾기 시작하고, 기다리다 지친 객석에서 제한시간을 외치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으로 올라가는 숫자가 100을 넘고 200이 넘는다. 그리고 무대로 뛰쳐나가 함께 숫자를 세는 관객들. 작가없는 퍼포먼스는 관객들이 444를 세면서 막이 내렸다. 한큐는 오지 않았지만, 작품은 실험예술제에 도달했고, 관객들은 이를 함께 즐겼다.
432. 개별성
한국 실험예술제가 그 시작부터 간직하고 있는 고유한 가치는 바로, 예술의 개별성일 것이다. 즉, 제도에 편입되거나, 무리를 지어서 편먹기, 편가르기, 혹은 연줄을 이용하여 예술의 권위를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예술가들의 독립적인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특정 예술집단이나 예술계가 아닌 개인들의 조합 혹은 그 개인 자체로 존재하는 예술가에 대한 이해와 관심, 더 나아가서 예술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이들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과 나' 라고 하는 관계이다. 결국 실험예술제가 질문하고자 하는 것도 예술적인 것과 대면한 '나' 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다원예술축제들이 공동의 '사유' 를 중시하고, '사회' 와의 관계에 포커스를 두었다면, 실험예술제는 나의 감각, 나라는 실존에 초점을 둔다. 이러한 실존은 결국 나를 억압하는 사회와 예술계에 순수하고 단일하게 맞서는 개체들을 양산할 것이다. 이러한 '맞섬' 은 의식적인 차원에서 세련된 메시지 보다는 오히려 거친 언어와 사보타쥬를 구성하는 '펑크적' 성격으로 축제에서 나타났다.
444. 펑크성, 생태성
실험예술제의 예술가들은 얼핏 보면 분열적이며, 거칠고, 시니컬하다. 무정부주의적이기도 하고, 반체제적이며, 자학적이기도 하다. 이국적인 색채 또한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이들이 살아가는 나름의 솔직한 방식이며, 기성에 굴종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펑크적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반항적 순수청년의 삶’ 에 주목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용인하는 관객의 열린 자세가 필요할 진대, 축제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만들어줄 '워밍업' 의 자리와 실험예술로 진입하는 프롤로그의 장치들이 필요하겠다.
이러한 '펑크성' 과 함께 이번 축제에서 주목한 것은 생태적인 입장이었다. 갤러리에서 벌어진 많은 작품들이 공들여서 만들어진, 혹은 최첨단의 기술을 이용해서 제작된 작품이기 보다는, 예술가 자신의 '몸' 이라는 원초적인 미디어와 간단한 의상과 소품을 이용한 극적인 장면만들기가 많았다. 실상 '로우테크' 라고 불리우는 방식을 취하여 기계나 극장의 효과 대신 자신의 몸으로 미학적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시각만큼이나 촉각이나 후각을 이용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죽음' 을 큰 화두가 내재되어 있는 서울에서의 축제는 제의적인 작품이나 생명존재의 소멸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엿보였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환경 메시지로 발언한 작가들도 있었다. 이는 아마도 이들이 주장하는 '삶과 예술' 의 일치라는 테마가 죽음에 항거하는 것이 예술이고 삶이기 때문이라는 명제 때문이리라. 따라서 극단적인 자유로서의 자해와 자폭은 생태적 의미를 강조하려는 수행적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졌다. 이들은 난동의 장에서 444개의 치유를 위해, 444개의 상처를 냈다. 고통을 수반하겠으나, 그것은 분명 어제의 아픔을 딛고, 나을 것이며 나아질 것이다.
*한국실험예술제 페이스북 바로가기 >>> https://www.facebook.com/keaf2013
**사진=ji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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