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 12:49ㆍReview
배우 김신록의 누군가 할 때까지 일단 나라도 한다 연기비평
‘배우-작가’ 나경민, 성수연, 우범진이 써내려간,
<러브스토리>
크리에이티브 바키 @두산아트센터
글_김신록
<배우-작가>
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의 배우들은 자타 공히 ‘배우-작가’라 부를 만하다. 그간 만나 본 바키의 무대에는 누군가의 인터뷰 글, 녹취 음성, 책의 몇 구절, 노래 한 부분 등이 재료 그대로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그 구성은 배우들뿐만 아니라 연출가와 드라마터그, 조연출 등이 함께 완성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재료들을 해설하고, 조각을 이어붙이는 말하기로 연결해 내는 것은 모두 배우들의 몫이다. 바키의 무대에서 발화되는, 바키의 공연 대본에 올라 와 있는 모든 대사는, ‘다른 프로덕션보다 월등히 긴’ 바키의 연습기간 내내 배우들이 무수히 썼다 지우며 완성한 자신들의 말이다.
그런 바키의 배우-작가들이 이번 <러브스토리> 공연에서는 심지어 ‘소설’을 써내려갔다. 방문할 수 없는 개성공단을 배경으로 공연을 구상하다보니 장소를 경험하고 장소와 관계 맺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적극적인 ‘상상하기’의 방편으로 소설쓰기를 선택하고, 개성공단을 배경으로 생활했을 법한 북측의 인물들을 한 명씩 창조해낸다. 배우들은 자신들의 ‘상상하기’가 만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오해가 아닌 이해에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리서치를 통해 수집한 팩트와 상상을 직조한다.
공연은 배우들이 리서치 과정 중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계기와 고민, 구체적인 소설 속 ‘인물’을 생각하게 된 이유, 배우로서 인물에 접근해 가는 과정, 인물이 생활했을 북측과 개성공단에 대한 배경정보,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느낀 점 등을 제시함과 동시에 배우가 직접 자신이 그린 인물의 특정 순간을 재현하기도 한다.
<넘나들기>
나경민, 성수연, 우범진 배우는 각각 개성공단 통근버스 운전수 최송아, 개성공단 내 편의점 직원 김뿔, 개성공단 내 모 유통기업 노동자 리예매를 상상해낸다. 배우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이 생각해낸 인물의 직업, 생김새, 습관, 성격, 기질 등의 세부사항을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몸으로 구현하거나 장면으로 재현하기도 하는데, 관객들은 인물들이 만나는 환경과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배우들의 세부사항들을 따라가면서 인물들이 근무했을 ‘개성공단이라는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특히 성수연 배우가 자신과 자신이 창조한 김뿔이라는 인물과 개성공단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 공단이로 주체를 옮겨가며 나레이션을 하는 극의 도입부는, 관객에게 마치 앞으로 펼쳐질 세계의 실마리가 숨어있는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읽어내는 것 같은 기쁨을 준다.
사실 나레이션은 성수연의 녹음된 목소리로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고, 성수연은 나레이션에 맞춰 자신과 김뿔과 공단이가 경험하는 특정 순간들의 감각을 몸으로 구현한다. 그 주체를 넘나드는 몸은 ‘인물을 관통하는’ 혹은 ‘감정과 직결되는’ 개연성에서 벗어난 ‘현상’으로서의 몸인 동시에 상상 속 인물의 감각적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취해보는 ‘상상’으로서의 몸이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순간’은 이 극 전체의 중심이자, 그 중심을 구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배우들의 말하기는 자신으로서 말하기와 인물로서 말하기, 배우 자신에 대한 말하기와 인물에 대한 말하기, 인물이 속한 세계에 대한 말하기와 배우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말하기를 넘나든다. 세부가 확장될수록 관객은 개성공단과 북측과 남측과 서울과 내 삶의 주변으로 이어지는 점점 더 큰 풍경을 바라보게 되고, 때로는 인물의 눈으로 풍경 속을 거닐 게 된다. 풍경 속에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 감정, 지각이 반영되어 있다.
<‘자기이야기 하기’의 새로운 방식>
바키의 이번 작업은 ‘배우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배우 자신이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창조해 낸 인물에 기대어 있는 <러브스토리>의 배우들은 공동창작연극에서 흔히 행해지던 “저는 배우 ***입니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합니다.”와 같은 일방적인 자기고백 식 말하기에서 한 발 빗겨나 ‘배우의 자기 이야기하기’에 관객의 상상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효과적으로 마련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을 통한 경험하기는 리서치를 베이스로 한 연극이 가닿기 쉬운 교육적이고 계몽적인 전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골목길을 제시한다. 관객은 배우가 자신의 눈으로 인물을 바라보는 ‘성찰적인 순간’과, 인물로서 상상을 현실로 경험하는 ‘소박한 순간’을 함께 목격함으로써 논리와 상상을, 사유과 감상을, 이성과 몸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배우 나경민입니다.’라는 자기소개로 시작하는 나경민 배우의 말하기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나경민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하기에서 출발해서 최송아에 대한 말하기로 비중을 옮겨가는데, 관객들은 최송아의 가치관, 관심사, 통일에 대한 생각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갈수록 배우 나경민을 알아가게 되는 역전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마치 소설을 읽는 독자가 ‘인물이 곧 작가’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작가의 경험과 인물의 경험이 중첩된 아슬 한 이야기 속으로 적극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닮아있다.
<몸으로 되어보기>
우범진은 공을 들여 ‘인물의 몸’이 되어본다. 자신의 인물을 상상하면서 우범진은 ‘나는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그다지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착하고 순박하기보다는 주위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우리 주변에서 만나본 적이 있을 법한 사람을 상상해낸다. 우범진은 무대에서 인물에 외형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를 직접 몸으로 시연하는데,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한창 클 때 고난의 행군을 겪어서 키는 평균보다 작은 164cm입니다. 눈. 시선. 시야가 넓지 못하고 차안대를 낀 것 마냥 좁다보니 얼굴도 앞으로 쏠려 있어요. 또 집중을 잘 못하고 무언가를 깊이 있게 보지 못해서 시선이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계속 분산됩니다. 코. 눈치가 없고 분위기 파악도 잘 못하는 그는 후각신경도 떨어집니다. 축농증과 비염이 있어 늘 한 쪽 콧구멍은 막혀 있고 그래서 숨을 더 잘 쉬기 위해 입은 늘 벌려 있습니다. 입. 거칠고 욱하는 성격인 그는 어려서부터 참아야한다는 강박이 심했어요. 그래서 윗입술 근육이 늘 긴장되어 윗니를 가리고 있습니다. 손. 노동자의 손. 두껍고 굵고 짧아요. 작은 상처와 굳은살도 많고요. 움켜쥐는 일을 많이 해서 늘 계란을 쥔 듯이 오므리고 있고, 예민하지 못하고 둔한 성격이라 손가락도 늘 붙어 있습니다. 숨김도 없고 겁도 없는 그의 가슴은 당당하게 펴져 위를 향해 있고요. 힘쓰는 일을 오래 해온 그의 허리와 요추는 곧게 서 있습니다. 그래서 허리근육이 아랫배 근육보다 긴장 수축되어 있다 보니 고관절이 열려 다리가 벌어지고 발바닥은 팔자모양으로 섭니다.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성격답게 무게 중심은 발 앞 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우범진은 위와 같은 설명과 함께 자신의 몸의 해당 부위를 변형시켜 가는데 그 시도가 적극적이고 결과 또한 꽤 그럴 듯하다. 그는 변형된 몸으로 인물이 맞닥뜨렸을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재현해 낸다. 내 몸을 이용해 누군가의 ‘꼴’이 되어 보는 것, 누군가가 세상을 바라보고 냄새 맡는 감각의 방식을 경험해보는 것, 누군가의 근육의 긴장을 따라감으로써 그 근육에 새겨진 개인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 아울러 그 근육과 연결된 심리적 긴장을 이해해 보는 것. 관객은 우범진의 몸의 부분부분이 인물 몸의 구석구석으로 변형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리고 그 인물이, 혹은 인물의 몸을 한 배우가 풍경 속을 거니는 것을 바라보면서, 몸과 몸에 담긴 기억, 몸이 담긴 사회를 함께 감각해 간다.
<배우들이 구현하는 ‘동시대성’>
<러브스토리>의 배우들은 스스로에게 허구의 인물을 창조하거나 연기함에 있어 어떻게 지금, 여기, 나의 고민을 투영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범진 배우는 ‘내가 마음이 쓰이는 사람’을 창조하게 됐다고 고백하고, 나경민은 스스로의 바람을 담아 체제나 사회에 만족하는 인물을, 성수연은 젠더와 권력에 대한 최근 자신의 고민을 투영한 인물을 창조해낸다.
특히 성수연은 “이제 겨우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말들이 더 커다란 다른 말들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현실의 고민을 자신이 상상해 낸 허구 속 인물과 함께 탐색한다. 그는 ‘북한 여자’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고운 마음씨의, 착한, 다정한, 강한 생활력을 가진, 순수한, 순박한, 순종적인, 헌신적인, 신념이 강한, 강인한 여전사이지만 로맨스를 가슴에 품은, 한없이 자신감 넘치나 남자에게는 한 여자이고 싶어 하는,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얀’ 등의 이미지를 나열하면서, 이 ‘보편적인 이미지’란 결국 그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모습은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그는 이 보편적인 이미지와 반대선 상에 있는 ‘김뿔’이라는 여성노동자를 상상하면서, 캐릭터의 개성이나 중심 사건보다는 ‘보편에서 벗어난’ 인물이 일상에서 느끼는 감각적인 경험에 집중한다. 덕분에 성수연은 주장하지 않으면서, 김뿔에 빗대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느끼는 감각과 사유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물론 <러브스토리>의 경우는 배우들이 직접 인물을 창조했기에 인물 안에 배우 자신의 고민이나 관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투영할 수 있었겠다. 하지만 공연 내내 ‘배우=인물’로만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요즘 연극’의 경우, 혹은 심지어 공연 내내 인물을 연기하는 좀 더 ‘고전적인 연극’이라 할지라도, ‘배우가 자신이 재현하거나 제시하는 경험과 정보에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투영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는 ‘배우가 어떻게 연기적으로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의 핵심에 가 닿는다. ‘동시대성’을 ‘현대적인 형식실험’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다양한 형식의 다양한 작품에 출연해야 하는 배우가 꾸준히 지향할 수 있는 동시대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고민과 관점을 실제 그대로, 혹은 허구에 비추어 제시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현재적 고민과 소통의 가능성’이 아닐까.
<러브스토리>의 배우들은 상상하기를 통해, 그리고 상상 속 인물에 대한 분석을 통해 결국 ‘그 사람을 진짜로 만나고 싶은 마음’에 가 닿는다. 배우들은 무대 위의 말하기와 무대 밖의 말하기(팜플렛에 적은 배우의 글, 인터뷰, 관객과의 대화 등)를 모두 동원해, 긴 리서치와 상상의 시간 동안 썼다 지우며 쌓아 온 모든 과정이 결국 감정이 아닌 ‘수행으로서의 사랑’이라고, 그것이 곧 ‘러브스토리’였다고 고백한다.
*사진제공_두산아트센터
필자_김신록 소개_연극하는 김신록입니다. 오늘부터 잘 살아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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