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9. 07:08ㆍReview
한 줌 또는 한 움큼의 윤리
<혼마라비해?>
극단 실한
글_권혜린
극단 실한의 <혼마라비해?>는 뜻을 알 수 없는 제목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제목의 의미가 결말 부분에서 밝혀진다는 점에서 수수께끼 같지만 전체적인 의미를 잘 담았다. 미리 말하자면 ‘혼마’는 ‘진짜’라는 일본말, ‘라비’는 ‘좋다’는 라트비아어, ‘해’는 한국말로서 삼국의 언어가 섞인 것이다. ‘진짜 좋아해.’ 또는 ‘진짜 좋아해!’가 아닌 ‘진짜 좋아해?’가 제목이라는 것은, 즉 마침표나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가 붙어 있다는 것은 자이니치 문제의 해결이 아닌 유보 상태로 결말을 남겨 두었다는 것이며, 가능한 것은 현실적인 해결이 아닌 감정적인 해결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게다가 감정적인 해결조차 쉽지 않음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그만큼 자이니치에 대해 그동안 간과했었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는데, 작가의 자기 반성적인 고민이 극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마음을 흔든다. 작가가 실제로 일본에서 직접 자이니치와 만났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극에서도 작가 역할이 나와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다. 그만큼 극 중에 나오는 영주라는 인물이 실제 작가처럼 보일 정도로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역사적·사회적·정치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스포츠 경기에서 다소 감정적으로 환기되는 민족 공동체 속에 포함되지 않는 자이니치의 존재를 비로소 고민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로만 일관하지 않고 유머를 곁들여서 즐거운 분위기도 만들어 주었다.
외부인과 내부인의 경계에서
영주는 극작가인 동시에 체험자로서 작가/등장인물의 이중 구조에 해당하는데, 이는 만세상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외부인/내부인의 경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2009년, 24살이었던 영주는 마사루 극단의 한국어 자막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극단에 있던 지숙과, 지숙이 살던 하숙집인 만세상회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과의 인간적인 관계와 그 속에서 드러나는 내외부의 갈등이 극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만세상회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따뜻함이다. 하숙집과 만세상회를 겸한 주인인 광식은 영주에게 많은 한국 음식들을 해 주면서 정을 나누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주가 한국인이라는 말에 반색한 광식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면서 김치, 잡채, 불고기를 가득 차리는 등 환대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광식이표 김치’는 영주가 한국에 갈 때까지도 선물로 딸려 가는 정(情)의 상징이다. 붙임성 좋고 활발한 영주 역시 자연스럽게 광식, 광식의 아들 현규, 중학생 우진과 어울리면서 내부에 원활하게 섞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손님-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동족’을 만난 것처럼 환영받는 평화로운 분위기는 조국에 대한 ‘동상이몽’이 나타나면서 갈등의 씨앗을 품는다. 결정적인 순간은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을 본 영주가 그들을 간첩으로 오인하면서부터이다. 좌불안석인 상황에서 불편한 기류가 흐르는 식사 자리는 영주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비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는 ‘조선’이라는 단어가 서로에게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만세상회 사람들에게 그것은 식민지에서 해방되기 전의 북쪽을 의미하며, 영주에게 그것은 남한과 분리되어 있는 북한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니 조선족이 아닌 조선‘적’으로서 한글을 배우기 위해 북한 교육을 받았으며 조선의 국적을 주장하는 만세상회 사람들이 북한 사람도,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닌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영주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본말만 사용하지 않는데 이로 인해 나타난 언어적인 균열 역시 비중 있게 보여 주고 있다. 극이 시작되면 한류의 영향으로 배용준 플래카드를 든 일본인에게 광식이 한국어 발음을 교정하는 장면을 재미있게 그려낸다. 과외는 현규가 우진에게 시를 읊게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그 시가 북한의 시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영주가 온 뒤에는 북한 시가 남한 노래로 옮겨 가는 것으로 한 번 더 변화한다. 영주가 ‘필’을 살려서 2PM의 「니가 밉다」를 우진에게 가르치는 모습은 새로운 변화겠지만 우진이 한을 담은 「아리랑」 노래를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은 공통성을 암시한다. 현규가 이미 그 노래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또한 현규는 우진에게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는데, 영주가 끼어들어 ‘골품 제도’의 발음을 교정해 주는 등 함께 참여하면서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만든다.
이렇게 영주가 내부자에 가까운 쪽으로 가는 듯하지만 미묘한 지점이 있다. 북한 시를 읊는 장면에서도, 대중가요를 말하는 장면에서도 웃음이 나왔는데 과연 그것이 같은 웃음일지 의문이 든 것이다. 대중가요에서는 영주가 ‘과녁에 화살을 쏘듯이’ 가르치는 방법이 신선해서 웃음이 나왔다면, 북한 시는 그 내용과 어눌한 발음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는 점에서 관객의 입장에서도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나 하는 자기반성이 든다. 그렇다면 관객 역시 감정 이입을 하면서도 낯섦을 느낀다는 점에서 내부자/외부자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뿌리를 이어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광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물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있다. 우진과 현규가 일본어로만 대화했을 때 광식이 우리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동질적인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는 말일 수 있지만, 당위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경험적으로 자기 자신을 잃을 것 같은 뿌리 없음의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현규가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쓸 수도 있다고 항변하자 그러다가 일본이 된다고 다시 반박하는 광식의 말이 이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몸짓도 이들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차별 앞에서 많은 좌절을 겪게 된다. 능력과 상관없이 존재가 거부당하는 비애가 드러나는 것이다.
혐오와 인정의 거리에서
극의 앞부분처럼 영주가 내적 갈등만 지닌 채 언어와 역사 과외를 하며 훈훈한 분위기로 가면 좋겠지만, 세상의 시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이니치로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불인정하는 이들을 애써 외면할 때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그들을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혐한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이를 비판하는 영주에게 광식은 그들을 ‘쪽바리’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말에서 오히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한 체념의 태도가 엿보인다. 이렇게 시위마저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만세상회 사람들과 달리 홀로 분개하는 영주는 반대 시위를 하려고 하지만 광식은 영주가 다칠까 봐 말린다. 영주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광식의 인간미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자 영주는 ‘쓰는 존재’로서 각성한다. 거리를 지나가다 옷이 찢겨도 무력하게 있어야 하는 존재들을 보면서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옷이 찢긴 우진의 친구를 인터뷰하고, 아무도 돕지 않아 공포를 느꼈다는 증언을 듣는다. 심지어 혼자 걷는 게 무서워 택시를 탔는데도 당해도 싸다며 모욕적인 말까지 들었다. 피해자들은 여기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원래라는 게 있을 리 없다. 그럴수록 영주는 더 적극적인 투사가 되어 지숙에게 통역을 부탁하면서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독일의 사과가 대단하다고 하는 게 바보 같다’, ‘도움을 줬으니 고마워해야 한다’라는 등 그 자체로 폭력적인 언어는 견고한 방패가 되어 영주의 말을 튕겨 낼 뿐이다.
그러나 영주는 포기하지 않고 인터뷰 기록들을 정리하여 2011년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는 블로그에 기록들을 올리고, 자이니치에 관한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현규가 유명한 록스타가 되었다는 좋은 소식도 들린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한국 공중파에서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얻었지만, 독도에 관한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비난받는다. 사과해도 쉽게 용서받지 못하는 등, 실력과 상관없이 록스타로서의 그의 존재는 한국/일본에 속하지 않은 국적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다. IMF 때 자이니치들이 몇천억의 성금을 모아 조선에 보냈는데도 인정받지 못하듯이, 불인정의 근거에는 논리가 없고 개선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편견이 뿌리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주와 지숙과의 갈등도 심해진다. 우진이 한국 대학교에 가고 싶어 영주에게 상담을 요청하자 영주는 처음에는 찬성하지만, 지숙에게서 영주가 조선 사람을 동정하고 상처 주었다는 말을 들은 뒤 의견을 재고한다. 지숙은 한국에 가 봤자 ‘반쪽바리, 빨갱이’라는 말을 듣고 아파서 돌아온다고 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고 편견이 심하며 영주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또한 자신은 잘 살고 있으며 북한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 변화했다고 이야기한다. 평양에 갔을 때 당당하게 우리 말하고, 노래하고, 저고리를 입어서 체제와 상관없이 기뻤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영주는 외부자로서의 수치심을 느끼게 되며 우진에게 한국 국적을 쉽게 선택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인정받기 위한 분투는 계속된다. 광식은 고등학교를 무료로 다니게 하는 것에서 조선 학교는 제외되었다는 것에 반대하여 청사 앞에서 시위하고, 현규는 ‘일본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겠다’라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해 눈물로서 실패한 첫 번째 시도를 딛고 일본에 귀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귀화에 성공한 지숙과 라트비아의 리가로 간다. 그곳은 동양인이 적은 곳으로서 동양인 자체에 대한 차별은 있을지언정 조선인/일본인/한국인 사이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을 것이다. 영주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은 광식은 만세상회에서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 한일전 야구를 본다. 그러면서 “아무나 이겨라”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쓸쓸함과 슬픔이 전해진다. 붙잡고 있던 게 사라진 듯한 허탈감이다. 그래도 그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만세상회를 지키고, 낮에는 아이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면서 말이다. 이렇듯 타인의 인정보다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 광식, 우진, 지숙, 현규는 각자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쓰는 자의 윤리 : 한 줌과 한 움큼의 사이에서
그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비로소 제목에 대해 말할 차례다. 우진과 영주는 한국에서 재회하는데, 우진은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서 영화를 한국에 배급하는 회사에 다니고, 회사 동료인 여자 친구와 한국 여행을 온다. 한국에서 술을 배워 ‘닭한마리’에 소맥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우진은 일본인이 되었다. 영주와는 우진으로서 재회했지만 요시야마 테츠로 사는 삶에 대해 영주가 후회하지 않는지 묻자 우진은 영주가 자신을 말려 줘서 좋았고, 긴 시간 고민하고 선택했기에 ‘한국말 잘하는 일본 사람’으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고 한다.
이처럼 광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 국적을 선택해서 살게 된다. 그런데도 만족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로써 그들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영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영주는 우진을 만난 뒤 안도감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는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 답답함과 상처를 주었다는 미안함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으로서 작가의 윤리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과거에 영주는 자이니치 지원 커뮤니티 대표에게서 ‘아직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의 연장선에서 만세상회 사람들을 조금만 더 포용했다면 같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자기반성을 담은 고백이 눈물과 함께 터진다. “또 다른 라비한 삶”을 라트비아가 아닌 일본에서 이룰 수 있길 바랐고 그들이 흩어진 게 자신의 잘못 같아서 이 연극을 쓰게 되었다고,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도 한국에 들어올 수 있고 들어오면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자신을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이 연극을 썼다고 말한다.
이는 결국 만세상회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했지만 자신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성찰인데, 과외하는 도중에 나온 ‘한 줌’과 ‘한 움큼’의 차이와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줌’은 ‘한 손에 쥘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이고 ‘움큼’은 ‘손으로 한 줌 움켜쥘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이므로 사실상 동의어이지만 그 차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미세한 결의 차이로서 ‘느낌’의 차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조선인과 한국인의 차이 역시 ‘한 줌’과 ‘한 움큼’처럼 느낌만 조금 다를 뿐인 게 아닐까? 그런데 그 차이를 크게 생각할수록 차별이 되고, 편견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외하던 중 “너 자신을 사랑하라. 누구보다 소중하니까.”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자이니치들은 민족 정체성이라는 외피가 불완전하기에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살 기회를 박탈당했다. 따라서 ‘혼마라비해?’는 자문(自問)일 수도 있으며 이는 어렵게 찾은 행복은 편견이 가득한 세상을 외면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만의 힘으로 편견을 벗어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정말로 ‘혼마라비해’하기 위해서는 자이니치에 대한 편견 자체가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는 익숙하지만 태도는 낯선 자이니치에 관해 한 줌, 또는 한 움큼의 윤리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사진제공_극단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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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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