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탐사하는 기계, 인간의 공진화(coevolution)

 

 

탐사하는 기계, 인간의 공진화(coevolution)

 

-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9 참가작 <오퍼튜니티> @ 문화비축기지 T2

 

글_김민조(연극평론가)

 

사진제공_콜렉티브 뒹굴

 

발터 벤야민은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1933)에서 이렇게 질문한 바 있다. “어린아이들의 놀이 영역은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모방하는 것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어린아이들은 상인이나 선생을 흉내내는 것만이 아니라 물레방아나 기차도 흉내내며 논다. 이와 같은 미메시스적 태도의 훈련이 어린아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까?”1) 본래 벤야민의 질문은 사물의 유사성을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이 발생학적으로 다른 사물을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하기 위해 던져진 것이었다. 그러나 인지적 관점에서 본다면 어린아이들이 왜 물레방아나 기차를 흉내내느냐는 것보다는 그것들을 어떻게 흉내낼 수 있느냐는 문제가 보다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몸과 외형적으로 전혀 다르게 생긴 물레방아를 어떻게 흉내낼 수 있을까? 만약 그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옆으로 빙글빙글 도는 식으로 흉내를 낸다면, 위아래로 원운동을 하는 물레방아의 이미지는 그 아이의 전신에 어떤 형태로 힘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서로 다르게 양식화된 두 신체 사이의 모방 소통mimetic communication이라는 개념은 콜렉티브 뒹굴의 <오퍼튜니티>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화성의 지표면을 탐사하는 기계적 신체들과 지구의 한 공연장에서 그들을 모방하는 인간적 신체들, 혹은 인간적 신체들의 반복된 행위를 통해 상상적으로 구성되는 어떤 기계적 신체들이 있다. 이 신체들 사이를 가로질러 통과하는 힘, 신체들 각각의 능력을 특정한 방향으로 증가시켰다가 감소시키는 비가시적인 영향력을 정동affect이라 부르도록 하자. 물레방아와 어린아이의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동은 인간과 인간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물, 사물과 공간 사이를 가로질러 형성되기도 한다. <오퍼튜니티> 공연 전체는 의인화되는 기계와 의물화되는 인간 사이를 가로질러 발생하는 정동적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사진제공_콜렉티브 뒹굴

 

<오퍼튜니티> 공연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화상의 지표면을 끝없이 탐사하고 있는 로버rover들의 이미지이다. 2003년 화성에 발사된 쌍둥이 로버 ‘스피릿’과 ‘오퍼튜니티’는 화성에 물이 있었다는 증거를 검출하기 위해 화성의 풍경을 촬영하고 광물 성분을 분석해 지구로 데이터를 전송했다고 한다. 이 로버들에게는 처음부터 종료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공연 중에 낭독되는 일대기에 따르면 로버와의 교신 두절로 스피릿과 오퍼튜니티의 임무는 각각 2010년과 2019년에 종료되었다고 하나, 임무가 종료되었다는 것은 인간 중심의 표현에 가깝다. 로버들에게는 임무 수행을 스스로 중단하거나 완수한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오퍼튜니티>의 퍼포머들은 설계 생존 기간을 훌쩍 넘긴 채 끝나지 않는 임무에 몰두하고 있는 두 대의 기계들, 혹은 교신이 끊긴 채 모래폭풍 속에 서서히 잠겨가는 기계들의 이미지 속에서 퍼포먼스를 펼친다.  

물론 퍼포머들은 화성 탐사선의 단속적인 구동 방식이나 바퀴의 회전 따위를 외형적으로 모방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의 신체를 가진 로버로서 자신의 성능을 검사하고 주변 공간을 탐사하기 위한 동작을 반복할 뿐이다.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완수될 수 없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시시각각 새로운 동작과 포지션을 고안해내는 인간-로버들의 모습이다. 인간-로버들은 문화비축기지 T2 구역의 지형지물 사이를 재빠르게 주행하거나 등반하고, 머뭇거리거나 도약하고, 계산하거나 감행한다. 이들에게는 드라마적 목표가 주어져 있지 않다. 제각기 탐사-점검-교신 등의 마디로 이루어진 시퀀스를 반복하면서 임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한’ 에튀드 연습에 몰입할 뿐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공연의 초점은 서서히 화성에 있는 어떤 기계들로부터 지금 여기에 있는 퍼포머들의 몸, 그리고 그들이 탐사하고 있는 여기 이 공간의 뚜렷한 모습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진제공_콜렉티브 뒹굴

 

<오퍼튜니티>는 관객을 로버들의 세계로 초대하기 위한 기초 작업에 신경을 많이 쓴 공연이라 여겨진다. 문화비축기지 T2의 구석진 장소로 들어오면 인더스트리얼 풍의 외벽 사이로 과거 기름 탱크로 쓰였던 흔적들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아늑하면서도 어딘지 황량하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낮은 시멘트 담벼락 위에는 아날로그 텔레비전과 달을 연상시키는 구체(球體) 조명이 놓여 있다. 울퉁불퉁한 질감의 공간과 초창기 SF 영화를 연상시키는 로파이한 오브제들, 그리고 신비로운 느낌의 음악이 어우러져 우주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콜렉티브 뒹굴의 최근 작업들은 공연에 뚜렷한 콘셉트를 부여하고 관객이 거기에 설득될 수 있도록 퍼포먼스 공간을 정교하게 논리 짓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특히 그러한 정지 작업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에서 관객의 퍼스펙티브는 총 세 번 이동하게 된다. 입구 쪽을 바라보고 앉은 채로 진행되는 1부와 같은 자리에서 뒤돌아 앉는 2부, 의자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가 앉는 3부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1부에서 관객들은 스피릿과 오퍼튜니티의 일대기를 자발적인 윤독(輪讀)의 형태로 낭독하게 된다. 공연 관계자의 리드 없이 누구나 자발적으로 문장을 낭독할 수 있고, 이미 낭독했던 문장이나 단어나 음절을 반복해서 읽을 수도 있다. 공연 도입부에 마련된 이 윤독 퍼포먼스는 관객이 스스로의 현존성에 접촉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여겨진다. 대체로 관객들은 암묵적인 관람 규약에 따라 신체와의 연결을 끊고 공연을 보기 마련인데, 윤독에 가담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나’(혹은 관객 공동체)의 신체가 여기에 있음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객의 자기 발견 내지 자기 접촉의 경험은 2부와 3부에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2부에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마주칠 때마다 그 형태와 규모에 맞게 변용되는 로버의 신체들이다. 벽을 타고 오르기 위해 구부러지는 손, 좁은 공간을 통과하기 위해 수축되는 어깨, 장애물을 만났을 때 주춤거리는 무릎과 다리, 여러 개의 훌라후프를 돌리는 퍼포머의 리드미컬하면서도 분열적인 움직임 등등. 인간-로버들은 큰 틀에서는 기계의 행동 양식을 모방한다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 과업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체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색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릿과 오퍼튜니티가 맞게 된 결말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부의 박물지적 경관은 관객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흐릿한 공기처럼 느껴지던 공간들의 색과 냄새를 돌려받는 느낌,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체절들의 감각이 몸속에서 깨어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오퍼튜니티>는 시각 체제scopic regime에 의존하는 대신 몸에서 몸으로 받는 공연이라 할 수 있다. 

관객들이 보다 넓은 풍경을 조망할 수 있게 되는 3부에 이르면 상황은 좀 더 복잡해진다. 3부는 2부의 유희가 확장되는 동시에 그 유희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인간-로버들은 공간을 탐사하는 일을 넘어 그 공간 내에서 ‘무엇을 하며 놀 수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다. 춤을 추거나 아크로바틱한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하고, 계단참에서 짐볼을 굴리기도 하고, 멀리 2층 높이에서 관객들을 향해 야광 프로펠러를 날리거나 돈을 흩뿌리기도 하고, 벽면에 손전등을 비추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잘 조형된 스펙터클을 이루기 때문에 관객들은 마치 기계들의 제전이나 민속놀이에 초대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무대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인간-로버들의 모습에서 어딘가 조급함이 묻어나오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순수한 행위가 기술로, 놀이가 업(業)으로 발전하는 순간에 나타나는 기묘한 위화감이 감지된다. 점점 더 잘할수록 점점 더 허무해지는 단계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오퍼튜니티>의 세계는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부조리극 작품에서 제시한 세계의 모습과 유사해진다. 스스로의 가치를 잴 수 있는 척도를 세계 내에서 찾아낼 수 없고, 삶을 종결지을 수 있는 가능성조차 로버들 자신에게 내재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3부가 진행되는 짧은 시간은 아이가 어른의 문턱에 이르는 시간이자 원시인이 문명의 빛에 눈뜨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진화는 그다지 아름답게 묘사되지 않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3부는 묘하게 기독교적이다.) 인간-로버들이 자기충족적인 놀이의 세계에 회의와 의심을 품게 되는 순간은 그들이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을 분간하게 되는 순간과 일치한다. 가령 “못해서 재미없나?” 라는 대사는 일종의 가치 전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콜렉티브 뒹굴의 작업을 보아온 사람들이라면 ―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더라도 ― 그 전도된 모습이 인정투쟁의 사회를 배경으로 서 있는 예술(가)의 초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_콜렉티브 뒹굴

 

그러나 <오퍼튜니티>의 전체 흐름이 이 우울한 주제로 수렴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퍼포머들은 공연이 끝난 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무대로 돌아와 관객들과 수박을 나눠먹고, 공연은 무대 한 쪽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라디오 잡음처럼 모호하고 성긴 여운을 남기며 일상의 시간 속으로 흡수된다. 관객들 역시 자신의 신체를 통과해온 무수히 복합적인 정동들의 흐름을 하나로 정돈하지 못한 채, 혹은 그 모든 모순적인 느낌들을 보존한 채 일상으로 돌아간다. 열기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적막하기도 하고, 냉혹하면서 다정하기도 하고, 비관적인 동시에 낙관적인 어떤 세계의 모습을 가로질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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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6: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도서출판 길, 2008, 211-212면.

필자소개_김민조

연극비평집단 시선 소속. 연극답지 않은 것과 평론답지 않은 것 사이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사진출처_콜렉티브 뒹굴 페이스북 페이지

공연 <오퍼튜니티>

스피릿 : 뛰어난 과학적 성과로 만인의 찬사를 받으며 임무를 종료한 화성 탐사 로버 '오퍼튜니티'의 시험설계 파일럿 버전 로버.

모든 면에서 기대를 넘어섰지만 모든 면에서 오퍼튜니티에 못 미치는 쌍둥이 형. 여전히 화성에서 기다리는 중.

* 러닝타임 - 60분

* 관람가 - 전체 관람가

* 일시 - 8월 17일, 19일, 21일~23일 8PM

* 장소 - 문화비축기지 T2 서측화장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