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8. 18:42ㆍReview
미정의 관계가 만들어낸 소통의 방식
: 2019 팜파피플 결과보고릴레이 <2019 살아보고 결정해>
김지은X정경인, 소리채집프로젝트 <켜켜이 쌓인 나는 거짓말이다> @플랫폼 팜파
글_성수연
팜파로 가는 길은 미정의 상태에서 오는 설렘과 긴장으로 두근거린다. 공연과 전시를 기획하고 창작자들에게 공간을 지원해주는 창작 플랫폼인 팜파는 연희동에 위치한 2층 집이다. 팜파의 기획자와 그의 가족이 살며 생활하는 거실, 부엌과 욕실 등 집 전체를 창작자들이 공연·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내어주고 있다. 가정집이자 공연·전시 공간이라는 팜파의 이중적 정체성 때문에 팜파에서 작업을 하는 창작자들은 먼저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에 따라 작업은 자연스럽게 텍스트나 퍼포머 중심이기 보다 공간에서 시작된다. 팜파를 찾는 관객이 두근거리는 이유 또한 이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한 극장이나 갤러리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가 객석인지, 어떤 것이 전시되는 작품이고 어떤 것이 집주인의 물건인지 경계가 모호한 팜파를 경험하는 일은 관객에게도 공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임무를 주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러한 미정의 상태가 주는 묘한 긴장을 안고 팜파에 도착하게 된다.
김지은X정경인의 소리채집프로젝트 <켜켜이 쌓인 나는 거짓말이다>(2019.11.2.~11.6, 플랫폼 팜파)는 팜파의 장기창작지원 프로그램, <2019 살아보고 결정해>의 작업 중 하나이다. 1월에 공모로 ‘2019 팜파피플’로 선정된 네 팀이 지난 8월의 중간보고전을 거쳐 이번 11월에 1년간의 작업을 마무리 짓는 결과보고 릴레이를 하는 것이다. <켜켜이 쌓인 나는 거짓말이다>는 그 릴레이의 첫 번째 주자를 맡은 작업이다. 전시의 마지막 날 8시 회차를 관람하게 된 필자는 가로등 불빛이 켜진 저녁 시간 팜파의 차고 앞에 도착했다. 인스타그램 홍보를 통해 알게 된 작업에 대한 정보는 ‘50분 동안 진행되는 한 회차에 1명의 관객만 받는다는 것’, ‘이동형 전시로 각 공간에서 원하는 만큼 관람하고 이동해도 된다는 것’,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먹을 수도 만질 수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대기 장소인 차고에서 받은 리플렛에는 집안의 도면, 관람순서와 함께 ‘당신이 내가 흩어놓은 기억들을 밟아갈 때, 이 집에 당신의 서사도 더해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이 눈에 띄었다. 리플렛을 준 창작자 정경인은 필자를 데리고 골목계단을 올라 열쇠로 팜파의 대문을 열었다. 작은 정원을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자유롭게 관람하라는 창작자의 안내와 함께 문이 닫히고 집 안에 혼자 남게 되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공간은 거실이다. <그 때의 가족>이라는 부제가 달린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고 텔레비전이 틀어져있다. 바닥 곳곳에는 글씨가 쓰인 테이프가 붙어있다. 현관 앞에 붙어있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구는 ‘이 집은 과거에 나의(당신의) 집이었다.’라는 문장이다. 문장은 방금 막 들어선 이 집과 관객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관객은 문장의 지시에 따라서 이 집을 자신의 집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도, 아니면 자신이 외부인으로 방문한 창작자들의 집으로 생각할 수도, 또는 여전히 팜파를 집이 아닌 전시 공간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단순히 전시를 보러온 관람객으로 위치할 수 있다. 관객은 이 공간에서 자신의 역할을 아직 완벽하게 알지 못한 채 지도를 들고 탐색해 나가게 된다.
거실 바닥에는 ‘아빠는 보통 늘 누워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돌반지를 나를 위해 팔아버렸다’, ‘엄마는 학습지를 판다는 게 들통날까봐 늘 조마조마했다’와 같은 글귀들이 보인다. 어딘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녹음된 음성들은 김지은 창작자와 그의 가족의 대화이다, 아버지, 어머니와 딸의 대화는 빈 집안을 채우며 지금은 모두 외출하고 없지만 이 공간에서 이루어질 가족의 일상을 상상하게 한다.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는 보자기로 덮인 밥상이 차려져 있고 그 옆에는 외출한 아버지가 남겨둔 듯한 메모가 있다. 보자기를 걷어 내면 구운 조기와 밥, 반찬통이 있고 물도 한 컵 떠져있다. 관객은 리플렛에 차려져있는 식사를 먹어도 된다는 말을 기억하며 식사를 하게 된다. 들려오는 녹음에서 딸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조기 뼈를 발라주던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다. 뼈가 발라진 조기를 먹으며 순간 관객은 밥상을 차려준 아버지의 딸이 된다. 관객은 잠시 동안 팜파를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며 이 집에 사는 가족의 딸로서 역할을 맡게 된다. 필자는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다 먹고 난 후 왠지 모르게 밥상을 치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릇을 부엌 싱크대에 갖다 놓았다. 치우지 않으면 나중에 아버지가 치워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엌의 식탁 위에는 누군가 손님을 기다리며 준비해놓은 찻잔과 주전자들이 있다. 이 집 가족 중 누군가가 준비 해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지만 바닥에 붙어있는 ‘엄마는 이런 부엌을 갖고 싶어 했을 것이다’는 글귀에서 갑자기 이곳이 창작자 가족의 집 또한 아니라는 생각을 상기하게 한다. 갑자기 찻잔 세트가 차려진 부엌은 창작자의 가족이 사는 집이 아닌 창작자의 바람이 담긴 허구의 공간이 된다, 그와 함께 창작자가 외출한 가족의 흔적을 남김으로서 만들어낸 창작자의 집으로서 공간, 관객이 아버지의 딸로서 밥을 먹으며 행한 역할놀이로 공간과 맺은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팜파라는 공간과 그곳에 많은 설명이 되지 않은 채 놓여있는 창작자의 기억들 그리고 관객 개인의 경험이라는 변수가 작업이 하나의 이야기로 규정되는 것을 방해한다. 공간과 창작자, 창작자와 관객, 관객과 공간이 맺는 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도면의 순서에 따라 집의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간다. <우리를 만들어준 것들>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계단에도 녹음된 음성 속 가족들과 관련된 글귀들이 붙어있다. 글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2층 거실과 욕실 그리고 테라스 공간이 있다. 세 번째 공간인 욕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과 마주보고 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관객 자신의 모습 때문에 깜짝 놀라게 된다. <흘러가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부제의 욕실에는 어두운 조명 아래 욕조 안에 놓인 의자와 그 위에 베개 그리고 물이 뚝뚝 흐르고 있는 샤워기가 설치되어있다. 흘러나오는 우울한 음향은 함께 틀어져 있는 창작자와 그의 친구 또는 애인의 녹음된 대화가 상실된 것 혹은 상실될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욕실 바닥에 앉아서 대화를 듣던 필자는 공간의 음침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욕실의 형광등을 켜고 공간을 벗어났다.
2층 거실은 창작자 김지은과 정경인이 그동안 해왔던 작업들의 메모, 악보, 포스터, 리플렛 등의 종이들로 바닥이 덮여있다. 피아노 위에는 작곡가로 작업하는 창작자 정경인의 노트와 악보가 책상 위에는 연출가로 작업하는 창작자 김지은의 책들이 있다. 관객은 창작자 김지은과 정경인이라는 인물을 공간에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서 추측해 나간다. 1층에서 부재하는 가족들처럼 창작자들 또한 공간에 존재하지 않지만 작업물과 그들이 작업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그 존재감이 느껴진다. 어떤 설명 없이 늘어놓은 오브제들은 관객이 그들에 대해 더 추측하고 능동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2층 테라스로 나가는 문 앞에는 사랑에 떠올려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부제 또한 <사랑에 관한 당신의 소리>이다. 관객은 테라스에 놓인 쿠션에 앉아 이번에는 이 집에 살 것 같은 인물들이나 창작자가 아닌 이 공간에 부재하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마지막 공간은 집의 지하에 있는 작업실이다.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면 문에 거울이 붙어있는 작업실을 만나게 된다. <나, 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곳에는 의자와 책상 그리고 그 위에 종이와 연필만이 놓여있다. 창작자들의 기억이 남아있는 이 집에 관객 또한 어떤 흔적을 더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관객이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남긴 흔적들은 종이 위에 연필로 남길 수 있는 낙서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준다. 밥을 먹고 싱크대에 옮겨 놓은 식기들, 뒤적거리다가 옮겨놓은 책들, 욕실에 켜놓은 불 따위 흔적이 창작자의 기억을 흔적을 보고 응답한 관객의 흔적이다. ‘집에 당신의 서사도 더해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관객이 창작자가 남긴 기억들을 보고 창작자를 상상한 것처럼 창작자도 관객이 남긴 작은 움직임들을 알아채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 주었으면 하면서 말이다. 말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흔적을 통해 이루어진 대화, 또는 쌍방향 전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들이 떠난 자리에는 소박하지만 뚜렷한 또 다른 전시가 남게 되는 것이다.
거실, 부엌, 계단, 욕실, 테라스가 건축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조에 따라 관객이 공간을 만나게 되는 순서가 저절로 정해진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리플렛에 표시되어있는 관람 순서를 통해 관객들의 대략적 동선이 만들어진다. 물론 관객은 마음대로 지나온 공간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는 더 오래 머무르거나 어떤 공간은 건너뛸 수도 있다. 공간에 관객 혼자 둔다는 점이 관객이 더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니까 공간 배치가 만들어내는 대략적 동선 그리고 창작자들의 흔적 속에서 상상하게 되는 인물들은 있지만 그것을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로 엮어내는 (또는 엮어내지 않는) 몫은 관객에게 맡겨진 것이다. 랑시에르는 그의 책 <해방된 관객>에서 어떻게 관객을 수동적 위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를 풀어놓는다. 그는 꼭 관객이 작품에 퍼포머로 참여한다고 해서 능동적으로 생각을 한다거나, 서사가 존재한다고 해서 관객이 능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랑시에르는 관객은 이미 창작자만큼 자유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다만 관객이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번역할 수 있다는 생각과 모든 관객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의 배우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켜켜이 쌓인 나는 거짓말이다>에서는 공간과 창작자들, 관객 세 가지의 목소리가 평등하다. 공간과 미정의 관계에서, 흩어진 오브제들 사이에서 관객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자유롭게 엮어나간다. 꽉꽉 채운 서사와 인물들로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창작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몇몇의 오브제들,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 그리고 50분이라는 비어있는 시간이 관객 스스로 서사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관객이 공간에 남긴 흔적은 창작자들에게 또 다른 이야기로 번역되기도 한다.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발걸음이 가벼웠던 것은 창작자의 이야기를 담고 갈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남기고 왔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필자소개 _ 성수연 평등한 연극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희곡에 대한 애정, 공간과 관객에 대한 관심이 있다. 녹차를 좋아한다. |
2019팜파피플 결과보고릴레이 첫번째 순서: 2019.11.2(토)-11.6(수) OPEN 구성/연출 _ 김지은, 정경인 <초대장> 현관문을 들어서면 집 안에는 당신 혼자 뿐입니다. 식사가 차려져 있다면 드시고, 나의 기억들이 만들어놓은 순간이 당신을 만나 새로운 순간으로 탄생하길 기대합니다. 관람주의사항 관람연령 15세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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