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양하는 마음을 배우는 시간 <잠시 섬 연극제> 제작기

2021. 12. 22. 22:09Feature

 

 

휴양하는 마음을 배우는 시간

 

<잠시 섬 연극제> 제작기

 

김은한

어느덧 12월이 되었어요. 한해 사업을 마치고 마무리와 내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사이에 작은 발표가 하나, 재능기부 행사가 하나, 써야 하는 글이 조금 남아있어요. 이 글을 읽는 독자님 중에도 일과 쉼의 시기가 딱 떨어지는 분은 많지 않겠죠. 그때그때 잘 쉬면 좋겠지만 머릿속은 언제나 혼란. 강화도에서 쉼을 연습해보았던 10월의 어떤 풍경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고 보니 염문경님께서도 웹진 연극인에 잠시섬 연극제 후기를 전해주셨으니 읽어보세요. 9월 24일. 허영균님께서 강화도에서 마음껏 작품을 할 것인데 함께 하자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10/18 월요일

‘잠시 섬 연극제’! 강화도에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근사한 공간에서 연극을 하나 올리게 되었어요. 10월 15일에 PCR 음성을 확인하고 18일에 출발했습니다. 한동안 신세를 지게 된 첫 공간은 소담마을에 있는 ‘책방시점’이라는 북스테이가 가능한 호젓한 공간이었어요. 책방지기의 취향과 분위기에 맞게 늘어선 책들. 종종 들어와 쉬고 가는 고양이 쨍쨍이도 있었어요. 잠시 커피를 마시며 쉬다가 염문경, 전강희님의 팀을 뵙고 인사를 나누었어요. 강화도를 거점으로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강화유니버스’ 분들과 잠시섬 연극제를 꾸리고 계신 전윤환, 권근영님도 뵈었습니다. 이후에는 공연공간 위주로 가볍게 투어. 자람도서관은 늘 다양한 행사와 비밀스런 공간이 있는 마을사랑방이었어요. 높이 자란 풀에 가려진 나무 시소가 있는 곳. 또 다루지라는 카페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하늘이 흐렸는데, 다른 카페인 차완에 들르니 비가 왈칵 쏟아져서 잠시 비를 피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 잠시 정비를 했어요. 불빛 하나 없는 밤엔 책방지기 돌김님의 차를 타고 회고 모임에 참여했어요. 고주영님의 팀과 만나 자기소개하고 하루를 돌아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진1.<잠시섬 연극제> 허영균팀 책방시점 객석_필자 제공

 

10/19 화요일

쨍쨍이를 위해 베란다 문을 잠시 열어두었다가 전등사에 올라가 천천히 걸으며 쉬었어요. 절의 한쪽 벽에 안보미 작가의 <탈인간세계>라는 전시가 있었는데, 요즘은 이런 주제에 주목하게 돼요. 너무 진해서 조청 같던 대추차와 쑥떡을 먹었습니다. 저녁에는 분식 맛집으로 추천받은 명품김밥만두에서 쫄면을 비볐어요. 저는 섞는 음식은 균질하게 고루 섞는 사람인데 허영균님은 적당히 비벼서 맛의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셨어요. 작은 습관은 삶의 습관,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도 닿아있겠지요. 공연도 완급조절이 중요한 일이니까. ‘이런 것도 괜찮네….’ 라며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농담으로 가득할 차기작을 기대해주세요. 저녁에는 영균님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1) ‘1도씨 즉흥키트’의 신작, 2)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진행한 ‘격려가 될만한 짤막한 이야기’의 신작, 3) <당신도 아름다워질 수 있고 아름다움에 만족!>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하는 무언가. 중 하나를 해보기로 했어요. “당신을 배우로 섭외했다고 생각하시나요?”라는 말씀에 당황하며 그날의 회의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어떤 역할이 되려나요. 맥주를 홀짝이며 프렌즈 시즌 6를 함께 보다가 흩어졌습니다. 

사진2.<잠시섬 연극제> 탭볼을 쥐고 있는 쨍쨍이_필자 제공

 

10/20 수요일

어떤 역할이 와도 잘 소화할 수 있게끔 책방 마당에서 탭볼을 하며 몸을 풀었어요. 익살스러운 꼴에 쨍쨍이가 흥미로워했습니다. 차를 마시며 잠시 시드니 스미스의 <괜찮을 거야>를 읽었는데 아름다웠습니다. 오전에는 참여팀 중 하나인 정진세님께서 줌으로 ‘배우의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했습니다. 연극은 한 사람이 많은 역할을 하곤 하는데요. 그게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긍정적이겠지요. 돌이켜보면 배우는 가장 많이 텍스트와 붙어있는 역할이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배우는 좋은 작가의 가능성도 지닌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공동창작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요. 점심에는 강화도의 대단한 맛집 이조시대에서 두부새우젓전골을 먹었습니다. 영균님은 오전에 찾아간 사우나가 온수가 안 나오는 등 허탕치는 일이 여럿 있어서 지쳐 보였는데, 금방 표정이 바뀔 만큼 좋아하셨어요. 식당 밖에는 90도로 꺾인 나무가 바람을 맞고 있었어요. 우뚝 서지 않아도 오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넓은 마당이 멋졌던 한옥카페 드리우니에서 생강차를 마시며 저녁을 보냈습니다. 이곳에는 분명한 밤이 있어요. 6시가 넘으면 희미한 불빛뿐. 그러나 10월 말의 밤은 포근함이 남아있어서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뿐했습니다.

사진3.<잠시섬 연극제> 탭볼하는 김은한_필자 제공

 

10/21 목요일

오늘도 각자 시간을 보내며 영균님의 구상이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에 가볍게 탭볼을 하러 나왔다가 너무 가벼운 나머지 열쇠를 안 챙겨 나왔어요. 쨍쨍이와 밖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11월에 무사히 마친) 개인 공연 준비를 했습니다. ‘사신’이란 으스스한 고전이었는데요. 중요한 대목에서 책방지기 돌김님이 빨래를 널러 나오셔서 놀랐고 살았습니다. 오후에는 고주영, 정진세 팀과 투어를 따라다녔어요. 화개사에서 교동향교, 망향정에서 북쪽을 살펴보기도 했어요. 난정저수지를 지나 개룡시장에서 쑥라떼와 맛있는 꽈배기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소식을 나눈 동료들, 또 낯선 창작자분들과 차분히 걸으니 즐거웠어요. 또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매끄러운 운전을 맡아주신 강화유니버스의 베니스님 덕분에 편안했습니다. 고주영님께 “작업은 잘 되고 계시나요…?” 여쭈었다가 더 말하지 말라셔서 그리하였습니다. 모두의 작업이 숙성되는 중. 그러고 보니 책방시점 근처에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금풍 양조장이 있어서 시음을 해보았어요. 탄산 없이 부드러운 맛입니다. 여기에서의 나날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밤에는 부드러운 고요함 속에서 독서나 일기를 썼습니다.

사진4.<잠시섬 연극제> 염문경팀 무대_필자 제공

 

10/22 금요일

책방시점을 떠나 ‘아삭아삭 순무민박’으로 옮겼습니다. 카페 ‘우트우트’에서 오트라떼와 몽블랑을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어요. 배차간격은 53분. 적당한 시간. 탑승하니 정말 빠르더군요. 몇 번을 공중에 떴는지. 풍물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서 샀습니다. 상·하의 합쳐서 만원! 이번 공연의 의상으로 삼고 싶었어요. 어떤 선생님께 사주도 보았어요. 전기수가 책을 읽듯 독특한 리듬으로 저를 읽어주셨어요. 내년에는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는 사업을 하라셨는데 제가 1인극을 주로 하는 걸 어찌 아시고…. 도전의 시기가 온 모양이구나 싶었습니다. 숙소 위층에는 전강희님의 팀이 묵고 계셔서 반가웠어요. 윤환, 근영님이 오셔서 공연 진행을 위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잠시섬 연극제는 강화도의 근사한 가게를 차로 이동하며 공연을 즐기는 방식이에요. 하루 세 팀이 15분 남짓한 공연을 하고 이틀간 진행하는 구성입니다. 제작 상황, 차량 지원 및 관객 대기 장소 협의, 셋업 시간 확인, 정산용 서류, 스트라이크 시간 확인, 안내 문구 숙지 등의 과정을 공유했어요. 밤에는 전강희, 베일리홍, 김환희님과 느슨하게 무순차를 마시며 수다를 나누었습니다. 오랜만에 밝고 소란스러운 도시의 밤이었어요.

사진5.<잠시섬 연극제> 전강희팀 무대 _ 필자 제공

 

10/23 토요일

고려성곽을 산책하고 왔더니 영균님이 잘 익은 대본과 함께 계셨어요. 잠시섬 연극제 시작! 첫 시작은 <강화 부동산 대화>. 순무민박 1층에 있는 커뮤니티 펍 ‘스트롱파이어’에서 고주영X언메이크랩의 부동산을 찾는 여정이 이어졌습니다. 펍에는 부동산 정보가 붙고 실제 부동산 업자분과 전화 연결도 하며 몸 둘 곳을 찾는 공연이었어요. 두 번째 공연은 정진세X서영주X강훈구. 도심에 오롯이 있는 다채로운 공간 ‘낙토’에서 진행됐습니다. 관객은 끌리는 나무를 껴안고 공연을 볼 수 있었어요. 누군가를 부르고 시를 읽는 순간이 지나갔어요. 끝나고 함께 낙토를 살펴보았는데 정말 ‘낙토에 머무른 어떤 이의 흔적’으로 꾸며두셔서 더욱 즐거웠습니다. 진세님께선 몰래 숨겨둔 액트리스 시리즈 대본집의 위치를 알려주셨어요. 마지막 공연은 비건카페 희와래에서 신재훈X박옥출X양택호 팀이 진행하셨어요. 근사한 카페가 뿌리내리고 그걸 운영하게 된 사장님들의 만남을 듣고 있으니 뭉클. 바로 곁에 있는 인물을 배우가 연기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작중에 등장한 강아지도 만나고 음료도 즐길 수 있었어요. 잘 끝났으니 이젠 정말 작업뿐입니다. 전강희팀과 각자 와글와글 작업했어요. 라디오천국과 고스트스테이션, 파워타임의 옛 방송분을 찾아보고 낭독하는 톤을 조정하고 익숙한 라디오 광고를 흉내 내기도 했어요. 금방 만족스러워서 함께 스트롱파이어로 내려가 갈릭버터프라이와 토마토나베와 가라아게를 먹었습니다. 언제 또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뿐이겠지요.

사진6.<잠시섬 연극제> 정진새팀 낙토_필자 제공

 

10/24 일요일

아침에 희와래 특제 드립백을 마셨어요. 대본은 푹 익어서 4고까지 나왔습니다. 저희는 첫 번째 순서였어요. 다이소에서 블루투스 스피커와 진행카드로 쓸 단어장을 사고 ‘책방시점’으로 이동! <1도씨 즉흥키트: 강화도 편>. 무대는 계단 아래. 영균님이 고른 책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그 주변에 관객이 앉아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관객이 들어오는 소리, 강아지가 놀라 짖는 느낌, 기대감으로 책방을 살피는 분위기가 전해졌습니다. 제 역할은 라디오 DJ. 반려동물에게 사랑을 보내는 글을 읽었고, 나름의 기교와 흥을 부려보았습니다. 영균님은 흘러간 오늘의 방송을 조금씩 틀어두셨어요. 라디오는 묘한 매체네요. 10년, 20년이 지나도 열화되지 않고 마치 오늘 방송인 양 목소리를 전하니까요. 다음 무대는 자람도서관. 전강희X베일리홍X박한희의 <Sound Fire>. 널찍한 무대에 둥글게 앉아 강화도에서 수집한 다양한 소리와 대화를 느긋하게 들었습니다. 산마을 고등학교에 있는 협동조합 마테분들과 협업해서 모은 소리였다고 해요. 관객으로도 오셔서 객석도 가득. 마지막으로 이국의 느낌이 가득한 티하우스 ‘차완’에서 염문경X이종민X장혜진의 공연이 진행되었습니다. 사연 있어 보이는 남녀는 이윽고 댓글로 싸운 사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봉합될 수 없는 관계를 어찌 마무리하면 좋을지 생각하게 했어요. 카페 사장님 역할로 카페 사장님도 나오셔서 좋았습니다. 저무는 해와 함께 모두 모여 차를 마시고 이걸로 일주일간의 강화도 생활이 막을 내렸습니다. 

 

사진7.<잠시섬 연극제> 허영균팀 책방시선 무대_필자 제공

 

요즘 친구들에게 많이 듣는 얘기는 “이젠 정말 쉬어야겠어.”에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세상은 혼란하고 할 일은 퐁퐁 솟아나지요. 강화도에서 잠시간의 쉼을 누리면서, 휴식도 연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것마저 연습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습니다. 잠시섬 연극제는 창작자와 관객이 모두 함께 움직인다는 점에서 끈끈하고 애틋한 축제였어요. 새삼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었던 올해의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창작자로서 앞으로 어떻게 쉬고 또 연결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근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필자소개

김은한_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연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낯선 재미를 발견하면 좋아요.

211212 예술청 1S1P <한 장 연극> 준비 중.

@mammothmermaid

 

공연소개

 <잠시 섬 연극제>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