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4. 13:11ㆍFeature
photo by 살바
2009년 4월 16일 목요일 맑지만 쌀쌀 : 연습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으스스
"죽여"… '다른' 에너지에 반응하는 연습, 들숨과 날숨의 다양한 변주
지난 화요일, 연습실에서는 “죽여-”라는 목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그리고 연습실의 전등을 꺼서 여러 번 깜깜해졌다. 죽어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모양이 더 크게 보인다. 우리들의 배와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쑥 꺼지곤 한다.
지난 화요일부터 수경이가 연습 진행을 맡고 있다. ‘분노와 경계’라는 주제어에 이어 오늘의 주제어는 ‘말과 즉흥, 공간과 에너지’이다. 수경은 <매일같이 사춘기>의 무대가 될 인천 스페이스 빔을 보다 여러 각도에서 활용하기 위해 그에 맞는 적절한 에너지를 찾으려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 화요일에는 빈 공간을 걷다가 새로 진입하는 배우의 ‘다른’ 에너지에 반응하는 연습, 들숨과 날숨의 다양한 변주에 “죽여-”라는 소리를 실어보는 연습을 했었다.
객석과 무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강, 그 경계를 사라지게?
플레이백씨어터 시간에도 기존의 배치에서 벗어나, 큐빅을 이곳저곳에 놓아두고 배우도 공간의 사방팔방에서 들어오고 나가도록 했다. 오늘은 지난 연습을 토대로 그리고 배우의 자유로운 충동을 도울 수 있는 적극적인 공간 쓰기에 초점을 맞춰 보다 개념적인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수경은 노트에 준비해 온 여러 배치도와 스스로를 정리하듯 써놓은 문장들을 보여주었다. 기존에 우리가 한 공연에서 객석과 무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강이 흘렀다면, 이번에는 그 경계를 사라지게 해보자는 내용이다.
물론 플레이백씨어터는 관객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하는 공연이라서 그 강에는 기적처럼 길이 나기도 하지만, 내용뿐만 아니라 공연의 형식상에서도 더욱 더 적극적으로 강을 없애보자는 얘기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새로운 접근에 모두가 일제히 마음을 여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플레이백씨어터를 보다 목요일오후한시에 맞게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았을 때는 고려해야 할 여러 제반 사항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저마다 머릿속에 그리는 형식이 조금씩 달랐다. 결국 그 조금씩 다른 형식을 함께 탐구해보기 위해서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일으켜 세워 움직여봐야 했다. 수경은 “그래. 직접 움직여보자!”고 얘기하며 평소보다 길었던 프리젠테이션(오정은 그 시간을 프리젠테이션이라고 불렀다.) 시간을 정리했다.
경계, 담, 균열…묘하게도 파국을 맞지는 않는다
우선 프린지 스튜디오의 출입문, 그 경계를 무대로 삼자고 했다. 수경이 준비해 온 이야기를 토대로 배우들은 문에서 실랑이를 벌인다.
두 명은 들어오겠다고, 두 명은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그 사이사이 만들어진 이유가 재미있다. 발냄새가 난다는 둥, 돈을 못 꿔주겠다는 둥, 게임머니를 잃었다는 둥 시끌벅적하다.
현수는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funky, funky!"외치며 구경하듯 문 안을 들여다본다. 그 표정에 시선이 갔다.
저마다 연극적 현실에 존재하는 이유가 뚜렷했다. 문이라는 공간이 가지던 ‘경계’라는 의미가 인물들 안으로 스며든다. 구체적인 공간에서 시작했을 뿐 배우들이 어떤 인물로 살게 될지는 미지수였는데, 배우들이 입은 인물 안으로 ‘경계’ 내지는 ‘담’이라는,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속성의 균열이 번져간다.
묘하게도 파국을 맞지는 않는다. 유머러스하게 정리가 된다. 그건 배우들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보이지 않는 유리창을 경계로 삼아 이편과 저편에서 두 명씩 창을 닦으며 시작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모두 중학생쯤이 되었고, 그 중 한명은 그 나이 치곤 남자관계가 복잡한 유라(가명)이다. 유라 곁에서 창을 닦는 친구는 유라를 걱정하는 말을 건네고, 맞은편의 두 친구는 안 듣는 척 엿듣는다. (창을 닦는) 서로 같은 행위를 복사하지만 그 행위의 속뜻이 저마다 다르게 표출된다.
같은 행위를 하며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고, 같은 행위를 따라하면서 ‘염탐’한다는 것을 숨기기도 한다. 유리창은 이리 저리 움직였고 배우들도 서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유리창은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생기기도 한다. 그 ‘경계’, ‘거리감’은 역시 인물들의 내면으로 흡수된다.
이 연습은 공연의 형식을 달리하는 데 어떤 힌트를 줄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해본다. 어쩌면 객석과 무대라는 분리를 깨뜨림으로써 오히려 곳곳에 숨어있는 각 배우들 간의, 관객들 간의, 공간에 모인 모든 사람들 간의 경계, 담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다차원의 균열과 결코 평화롭게 하나가 되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면서 가는 것. 혹시 그것일까? 그것이 외려 우리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까? (해봐야 알 수 있다)
목한시의 즉흥배우들은 갖가지 균열을 알아채고 숨기고 연기하고 드러내면서 매번의 공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경계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알고 있다면 배우는 무대 위에서 그 무정형의 경계를 컨트롤할 수 있다. 물론 안다는 것은 ‘몸으로’ 아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흥배우에게 연기와 일상의 관계
연기를 할 때에만 ‘경계’와 마주치는 것은 아니다. 배우들은 저마다 생활 속에서 수시로 보이지 않는 담과 마주한다. 즉흥배우들에게 있어서 연기와 개인의 삶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무대 위의 관계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개인의 관계가 무대 위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 선후관계와 과정은 복잡하고 미묘하다.
플레이백씨어터 시간에 나는 얼마 전 꾼 꿈을 이야기했다. 목요일오후한시가 나온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목한시의 단체복으로 비옷을 사러 가야했다. T과 함께 길을 갔다. 다른 친구들은 어딘가 한데 모여서 즐거운 분위기 속에 있었다.
꿈속에서 T는 가볍고 명랑해보였지만, 나는 걱정으로 무거워져있었다. ‘어떤 색깔의 비옷을 사야할까. 사이즈는 어떤 걸로? 비옷을 사긴 사야하는 걸까’ 마침 꿈속의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 우중충했다. 나와 T는 비옷 가게에 도착했다.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비옷이 있었다. 난 무엇을 사야할지 헷갈렸다. 내 사이즈는 직접 입어보면 되지만, 다른 친구들의 사이즈는 어떻게 맞춰 사야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곁에서 T는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모두 같은 것으로 사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난 결국 가게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꿈에서 깨었다.
오정은 T를 보며 어떤 기분이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뭐가 그렇게 가볍고 즐거운지 의아했다. 내가 느끼는 무거움과 더욱 대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장면을 시작했다. 난 그 꿈의 의미를 도통 알 수가 없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친구들이 만든 장면을 본 후 무슨 꿈인지 알아버렸다. 친구들도 그런 것 같았다. 갑자기 부끄러워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이야기해버린 걸.
우리는 서로 본 것을 의논하고, 형식적인 측면을 섬세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배우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장면을 감상했었고, 배우들은 역시 사방팔방에서 들어오고 나가고 하며 연기를 펼쳤다. 훨씬 입체적인 느낌이 강했다. 음악도 서라운드로 들렸다.
우리는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사람의 꿈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목요일오후한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조심스러워서일 수도 있다. 그렇다는 걸 알아채고 감안하면서, 나는 순간 다른 연습 날들도 떠올려보았다.
그렇다. 꼭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부터 이야기 자체, 그 안의 어떤 가치, 인물의 내면, 이야기를 한 사람과의 대화보다는 형식적 측면에 대해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공연이 많아지기 시작한 때부터일 것이다.
글 | 김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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