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목요일오후한시 즉흥연극 일기 ⑤ “외롭단 소리는 좀 잘못됐다 싶어.”

2009. 5. 8. 22:37Feature

 

* 인디언밥은 극단 ‘목요일오후한시’(이하 목한시)의 즉흥연극 일기를 4~5월 약 2개월 동안 연재합니다. 목한시는 호기심과 즐거움을 원동력으로 하는 집단으로, 플레이백씨어터 공연 및 워크샵, 퍼포먼스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플레이백씨어터Playback Theater는 관객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와 악사가 바로 그 자리에서 연극으로 만들어 보이는 즉흥연극으로, 목한시는 오는 5월 인천 스페이스 빔에서 <매일같이 사춘기>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펼칩니다.(16일부터 31일까지 매주 토·일 저녁6시) 또 올해 10월까지 야외 퍼포먼스·게릴라 공연이 계속됩니다. 인디언밥에서 연재하는 즉흥연극 일기에는 목한시 단원 해진(곱슬)이 보고 겪는 목한시의 일상이 담깁니다.




                                                                                                            동영상 마뇨



2009년 4월 23일 목요일 맑음 : 홀은 말한다. “일교차 심한 거 싫어!”


 
“외롭단 소리는 좀 잘못됐다 싶어.”
  “아…네. 저희가 얘기를 듣고 하는 거라서…….”
  “외롭단 소리보다 교통편이 안 좋다든가, 홍보가 덜 됐다든가 이렇게 얘기를 해야지,  외롭다고 하는 거는 조금…….”
  “불편하셨어요…….”


두 번째 게릴라공연이다. ‘재개발’을 주제로 청계천에서 퍼포먼스를 시작한 목요일오후한시는 오늘 신설동 풍물시장에 모였다. 청계천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청계천을 내주고 동대문운동장으로 떠난 뒤 다시 신설동 서울풍물시장으로 내몰렸다. 서울시는 ‘세계적인 재래시장을 만들어주겠다’, ‘관광명소로 조성해주겠다’며 상인들을 설득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만난 상인들은 한결같이 청계천에서 장사할 때가 제일 낫고 재밌었고, 그 다음 동대문운동장에 있었을 때가 지금보다는 나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청계천을 떠나, 또 다른 곳으로 떠나와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생활 속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개발주의 일변도의 이 나라, 개발의 눈속임 속에서도 옷을 팔고 지포라이터를 팔고 건강물품을 팔고 오래된 물건, 골동품을 사고팔아 삶을 지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지금의 청계천 고약한 물 냄새를 한껏 더 휘저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홀은 직업 이야기로 물꼬를 텄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연극을 하는 게 직업이거든요. 이곳에서 장사하시는 게 직업이시잖아요. 어떤 계기로 이 일을 하게 되셨는지, 또 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연극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나왔어요.”
나는 준비회의 때는 없었던 터라, ‘왜 청계천 이야기를 안 하고 직업 이야기로 시작되는 거지?’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기로 했다. 자연스레 청계천 이야기로 흐름이 이어져갔기 때문이다. 

 
  “등산복을 팔고 있어요. 10년쯤 됐지요. 품목이 그 사이 바뀐 거구요……”
  “오래 했지…… 예전에는 청계천에서 했지……나야 내 용돈벌이다 생각하고 하고 있지만, 여기 사람들 대부분이 자식들 학교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힘들지.”
  “여긴 너무 외지다고… (어떻게 건강물품을 취급하게 되셨는지, 특별한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고 묻자 웃으시며) 그것까진 안돼. 그것까진 다 얘기를 못 해.”


                                                                                                                          사진 마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 때는 자리를 피해가며 숨던 사람들이 장면을 시작하기만 하면, 어느새 복도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웃음이 났다. 서진과 현수가 전화통화를 하는 연기를 하며 장면을 시작했다. 서진은 외진 서울풍물시장을 설명하려는 사람이고, 현수는 멀고 교통이 불편해서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다. 그러다가 현수는 말했다.

  “그런데 서울풍물시장이 어디 아픈 거예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는 상인들의 이야기와 방금 건강물품을 소개하던 임사장님 이야기를 하나로 합친 셈이었다. 서진은 바로 대답했다.
  “풍물시장은 너무 외로워서 그래. 너무 외로워서.”
서진의 표현에 십분 동감한 홀은 함께 나가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풍물시장은 너무 외로워서 그래……! 풍물시장은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아 병이 났어요.”
배우들은 ‘외롭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웃으며 지켜보던 내게도 그 표현은 재치 있고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그 말이 혹시 자주 반복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배우의 입장에서는 숨겨져 있던 무언가를 잡아챈 느낌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오른쪽 복도에 모인 상인들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았다. 글쎄, 속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자 지켜보던 상인 한 분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외롭단 소리는 좀 잘못됐다 싶어.”


아저씨는 완강하게 말씀을 이어가셨다. 완강했기 때문에 더욱 뭔가를 들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은 시장이니까 연극 속에서도 활기차고 분주해 보였으면 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여러 상인들은 우리의 게릴라공연이 서울풍물시장을 홍보하는 홍보공연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나는 그게 불편했다.)  하긴 나도, 내 외로움을 타인의 ‘외로워서 그래’라는 말로 확인했을 때, 그 말이 실체와 만나지 못하고 표면만을 툭 툭 건드린다고 느껴져서 불쾌했던 적이 있다. 연습 할 때마다 우리는 ‘말’로 많은 것들이 표현되어 버리는 것에 문제점을 느끼고 다른 표현방식으로의 전환을 꾀하곤 하는데 (아니면 언어를 활용한 다른 표현방식을 찾거나), 오늘의 경우도 바로 이 경우인 걸까? 아저씨의 반응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준 걸까. 이 장면이 잘못 표현되었다고? 아니다. 그건 아니다. 더 나은 표현방식이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핵심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저씨의 반응이 장면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걸. 그렇다면 아저씨의 대답이 목요일오후한시에게, 나에게 가져다준 것은 뭐지?


사람과 마주한다는 것, 자신과 마주한다는 것, 거친 방식이든 세련된 방식이든 우아한 방식이든 촌스런 방식이든 사람 사는 이야기와 마주한다는 것은 참…… 기술적인 표현의 단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가 높은 파도에 다시 한번 잠기고 가까스로 떠오르는 느낌과도 비슷하다.


나는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 바깥으로 뛰쳐나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 질문같고 대답같은 이것이 어떤 소용에 가 닿기는 하는 걸까. 


    글 | 김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