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리뷰 : 권력의 이중성

 

혜화동 1번지 동인이 ‘연출가 동인제 페스티벌’을 열었다. ‘마피아 게임을 하다’라는 슬로건 아래 권력과 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사회를 얘기한다고 한다. 5편의 연극이 상연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오이디푸스’다.

 


이 연극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원작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운명에 맞선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로 인한 비극을 큰 줄기로 삼고 있다면 박 정석 연출의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맞선 오이디푸스의 자유 의지와 자신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타인의 자유 의지는 허락하지 않는 오이디푸스의 이중성을 큰 줄기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해 각색을 한 연극이다.


 이 연극은 ‘운명’을 통해 ‘권력’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 방식이 단순하다. 촛불집회가 등장하고, 대통령의 이미지가 오이디푸스를 통해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 부분에서 웃음이 나오고, 연극의 현실 참여라는 적극적인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지니고 있는 상징을 통해 충분히 현실 정치를 풍자할 수 있고, 권력이 지닌 이중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더 충실했더라면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리뷰의 방향이 정해졌다.  이 연극에서 직접 드러나는 부분이 아닌 숨겨져 있는 부분을 찾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운명’과 ‘권력’ 사이에 있을 것이다.


 ‘운명’과 ‘권력’이 별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운명과 권력을 연관시키는 것은 새로운 시각이 아니다. 「‘命’은 동북아에서 ‘천명’으로 처음 나타난다. ‘천명’이란 주가 은을 무너뜨리고 새 정권을 세우려 했을 때, 그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다. 반면에 인간이 겪어야 하는, 인간이 당해야 하는, 인간이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받아들여야 하는 命, 그런 것이 운명이다」.- 개념뿌리들.산해.(이정우)에서 배낌.


그리스 신화를 보면 운명은 신들도 거역할 수 없다. 운명은 한 마디로 거역할 수 없는 힘이다. 그런데 그런 힘을 오이디푸스라는 개인이 거역하려고 한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걸까? 자신이 가던 길을 막은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죽였을까? 그리고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결혼했을까? 그 전에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가 양부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코린토스를 떠났을까?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운명’이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지’가 필요하다. 권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민의 ‘무지’가 필요하듯이. 그래서 독재와 언론 장악은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이디푸스: 신들께 걸고 부탁이니, 알고 있거든 숨김없이 말해 주오. 우리 모두가 그대에게 애원하고 있으니.

테이레시아스: 모두들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불행을 들추지 않기 위해서, 내 불행도 결코 들추어 내지 않으렵니다.

오이디푸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으려 하다니, 우리를 배신해서 이 나라를 망칠 셈인가?

테이레시아스: 나는 나 자신이나 왕을 괴롭히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롭지도 않은 일을 어째서 물으십니까? 내게선 아무것도 들으실 것이 없습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무지’이고, 테이레시아스의 비극은 ‘앎’이다. 자신만이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그래서 ‘양심선언’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자신의 불행을 각오하고 하는 행동인 것이다. 


 권력의 이중성은 ‘무지’와 ‘앎’이다. 지배하는 자는 ‘무지’로 지배하고, 지배받는 자는 ‘무지’로 두려움을 잊는다.


테이레시아스: 아, 지혜가 아무 쓸모도 없을 때, 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어쩌자고 내가 그것을 알면서도 잊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았던들 여기 오지 않을 것을.
 


지배받는 자는 ‘앎’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실제로 무지하지 않지만 무지한 척 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지식인의 나약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게다. 지배받는 자도 ‘앎’을 두려워하지만 지배하는 자도 ‘앎’을 두려워한다.  ‘앎’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력이고 공포다. 이 무력 앞에 지혜는 아무 쓸모도 없다. 지배하는 자도, 지배받는 자도 앎을 두려워하지만 이 둘의 ‘앎’에는 차이가 있다.

지배하는 자의 ‘앎’은 ‘모든 사람의 앎’이다. 지배받는 자의 앎은 ‘혼자만의 앎’이다. 그래서 지배하는 자는 이 ‘혼자만의 앎’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지배받는 자는 이 폭력이 두려워서 ‘혼자만의 앎’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를 깨치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스스로 나라를 떠나는 아픔을 각오한 자만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흔히 우리가 배운다고 한다는 것은 무지를 깨치고 알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말 그럴까? 타인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을 우리는 배우고 있는 걸까?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고 연민하고 측은해 하면 되지 않나? 그러면 타인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충분하지 않을까? 혹시 우리는 ‘무지’를 배우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것. 연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측은해 하지 않아도 되는 것. 타인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지도 모른다. ‘무지’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배우는 것일 지도 모른다. ‘수학’적으로 사랑하고, ‘영어’적으로 사랑하고, ‘법률’적으로 사랑하고, ‘종교’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코미디다.  이것으로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 ‘수학’은 계산적이고, ‘영어’는 지배적이고, ‘벌률’은 처벌만하고, ‘종교’는 배타적인데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일까? 사랑은 사랑으로만 가르칠 수 있다. 겉으로는 ‘무지’를 깨우치라고 하지만 사실은 ‘무지’하기를 바라는 것.이것이 권력의 이중성이다.


두 눈을 뽑아 버린 오이디푸스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권력은 우리가 눈 감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할지 모른다.

2009 혜화동1번지 4기동인 페스티벌 - 마피아게임을 하다
2009.04.01~ 06.07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4.01~4.12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작, 연출 김재엽 극단 드림플레이 
4.15~4.26 <세월이 가면> 작, 연출 우현종  극단 추파
4.29~5.10 <오이디푸스> 작 소포클레스, 연출 박정석  극단 바람풀 
5.15~5.24 <슬픔 혹은> 작, 연출 김한길 극단 청국장 
5.28~6.07 <하녀들> 작 장주네, 역 오세곤, 연출 김혜영 극단 유정

공연시간 | 평일 8시 / 토, 일, 공휴일 4시,7시 / 월요일 공연있음
연문의 | art planning group 여유,作 02.3673.5580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

  1. '운명'과 '권력' 사이에 있을, 연극에서 숨겨져 있는 그 부분이 은밀히 숨겨져 있는지 구멍 속으로 함몰되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오이디푸스, 그리고 권력의 이중성을 재미나게 읽으면서도 좀 더 공연현장이 궁금하달까요...^^ 독재와 언론장악으로 '무지'를 이용하고 장악한다는 게 참 와 닿습니다. 인터넷을 켜면 자주 포털 메인페이지에서 멍하니 길을 잃고 있던 적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