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19. 16:09ㆍFeature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맑음 : 긴팔을 입기엔 덥다
<우주대모험>이라는 제목으로 80년대 초 한국에서 방영된 영국 SF시리즈가 있다고 한다. 원제는 <스페이스; 1999>(영국에서는 1975~1977 방영)라는데 유튜브에서 짧은 동영상을 보고 웹에 떠돌아다니는 사진을 보면서 난 목요일오후한시가 떠올랐다. <목한시 우주대모험> 내지는 <스페이스 빔; 2009>의 제목이 겹쳐 보이는 증세, 이건 오늘 공연의 영향인걸까? 마침 <매일같이 사춘기>의 포스터에도 깜깜한 우주 속에 떠있는 지구와 큐빅을 붙잡고 떠 있는 배우가 있다.
오늘은 스페이스 빔에서 배다리문화축전 참가작 <배다리 동네 이야기꾼 한마당> 공연을 펼친 날이다. 목한시는 5월 공연을 특히 공간사용에 초점을 맞춰 준비해왔는데, 무대와 객석 사이에 흐르던 보이지 않는 강을 아예 없애고 배우들이 보다 주체적으로 공간으로 파고들자는 계획을 세웠다. 보통 ‘무대’라 여겨지는 공간의 바깥을 선택하기도 함으로써 결국 공간을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배우들이 보다 능동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프레임에 갇혀있지 말자는, 그런 약속이었다. 인천의 스페이스 빔은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에 무척 매력적인 공간이다. 과거 양조장이었던 이곳에는 그때의 쓰임새를 짐작하게 하는 ‘발효실’, ‘숙성실’, ‘취음실’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다. 공연장으로 정한 발효실에는 전시실로 통하는 문, 바깥 복도로 통하는 문, 테라스와 통하는 문이 있어 필요하다면 배우들이 언제든지 들고 나며 연기를 펼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이건 정말 깜깜한 우주다. 환한 오후2시 공연에서 깜깜한 우주를 만나 본 적이 있는 사람? 오늘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스페이스빔 발효실에 서른명이 넘는 관객들이 들어서자 이미 눈으로 보기에도 오밀조밀 공간이 차보였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지우고 사방팔방을 쓰며 관객석으로 들어가 연기하자고 했지만(물론 무작정 그럴 수는 없고, 이야기를 표현하는데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실제로는 배우들이 만나서 연기를 펼칠 공간이 부족했다. 목한시의 작업은 무엇보다 팀원들 간의 호흡이 중요하다.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하고 핵심을 걸러내는 힘, 그 순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현장의 생생함을 즉흥이라는 선택된 기법으로 풀어내는 힘, 서로 신기하리만치 착착 붙어가며 연기를 해내고 장면을 이어가는 그 힘이 매력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럴 ‘스페이스’가 좀처럼 몸으로 느껴지지를 않았다. 꼭 물리적인 공간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이렇게 하자’라고 했기 때문에 예상과 다른 상황에서도(‘이렇게’가 잘 안되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끝까지 해보는 그런 상황에 가까웠다.
현수가 기록한 회의 내용(2009년 4월 19일)
우리가 계획했던 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배우들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우리는 그 에너지를 형식논의를 하는 데 많이 써버리고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내지는 못한게 아닐까. 목한시 단원들은 이 날 저마다의 우주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배우들은 공간에 흩어져있었지만 어정쩡했고 쓰려는 소품은 저만치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개코막걸리에서 평가를 할 때, 애초 계획했던 방식이 성공하려면 공간 자체가 ‘전후좌우’가 구분되어지지 않는 블랙박스 형태이거나(관객들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습관처럼 무대와 객석의 분리를 알아채고 그렇게 앉았다. 방향 없이 자유롭게 앉으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으나.) 이보다 더 넓은 옆 전시실을 쓰거나, 혹은 마치 거리극처럼 스페이스빔 1,2층을 훑고 다니면서 공연을 하는(관객이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공연을 보듯이) 형태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패!”
홀은 웃으며 양손의 검지를 리듬감 있게 앞으로 내밀었다. 예능프로 MC가 방금 도전을 마친 연예인에게 “성공!”, “실패!”하듯이…… 우리는 연습 때 이런 농담을 주고받곤 했었는데, 오늘은 이 농담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뭐 그렇게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동안 연습하며 추구해왔던 형식의 구멍을 알게 되었고 수정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목한시가 쏘아올린 스페이스탐사선은 공연과 동시에 다시 긴 탐사를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사(NASA)가 1986년 이륙직후 폭발했던 챌린저호의 결함을 수정해 이후 다시 디스커버리호를 우주로 띄웠던 것처럼. 혹시 이 비유가 더 무서운가.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니까 자신의 비행선과 공동의 비행선을 함께 손볼 뚝심과 그에 맞는 시간이다.
사진 마뇨
우주에서 헤맨 이야기만 한참 주절거린 것 같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여러 이야기들을 만나 얼굴을 맞대었다. <배다리 동네 이야기꾼 한마당>이 시작되기 직전, 관객들은 공연장 한켠의 유리창에 이렇게 썼다.
인천시의 계획대로 배다리 지상에 산업도로가 생기고 동인천역 중앙시장 자리에 북광장이 조성되면, 연습하러 갈 때마다 만나던 중앙시장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사라질 것이다. 관객은 엄마 아빠의 추억의 장소인 배다리를 이야기하고,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찾아온 오늘을 이야기하고, 배다리가 부촌이었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어릴적 차비를 아껴서 배다리까지 걸어와 팥죽과 아이스케키를 사먹던 일을 이야기한다. 학교 아이들과 아벨서점에 들렀다가 인천에 대한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을 갖게 된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 배다리문화축전에 관한 레포트를 쓰기 위해 이곳을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사실 오늘 들은 이야기들을 이런 방식으로 요약할 수는 없다. 올해 ‘재개발’을 주제로 청계천에서부터 게릴라공연을 시작해 동인천역 중앙시장에 이르렀던 목한시에게 이 이야기들은 중요한 연장선상에 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좀 더 적고 싶다. 밀린 일기가 생겼고, 오늘 일기는 이미 너무 길어져버렸다. 그리고 이제 곧 본격적인 <매일같이 사춘기> 공연이 시작된다. 내 머릿속에서는 목한시가 가진 ‘재개발’에 대한 문제의식과, 주어진 공간·프레임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공간을 누비자는 계획과, 몸과 마음의 사춘기를 함께 이야기하고 그 순간을 연극으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어딘가 모르게 이어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지도의 윤곽을 떠올릴 다음 일기까지 함께 숨 쉬어 주시길.
글 | 김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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