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13인의 관객(觀客)이 삼일로(路) 로 질주하오.

 

13인의 관객(觀客)이 삼일로(路) 로 질주하오.

(길은 고갯마루의 꺽어지는 골목으로 적당하오)


정진삼





제 1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이상李箱’ 을 ‘리얼real’ 하게 보고자 하는 한국 창작자들의 지난 시도들은 본의 아니게 ‘李箱’ 을 되려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李箱보기’ 에 대한 특별한/답답한 관념이 관객/독자들에게 주입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李箱을 이상(理想)하게 결론 내리는 데 익숙하다.  수식어들도 다분히 상투적이다. 천재, 괴짜, 요절, 식민지 지식인, 건축가, 시인 등등. 그를 ‘아는’ 것을 일종의 ‘멋’ 으로 이해하게 되던 때도 있었다. 어려울수록, 빨리 인정하고 넘어가면 만사형통. 그리하여 李箱의 세계는 늘 모호한 미답(未踏)의 상태이거나, 언어영역 문제에서 나오는 문제의 정답/오답의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유를 따져보면, 원인은 李箱의 작품과 인생에게로 모아진다. 솔직히 그의 시/삶은 어렵다. 답이 없기에, 해석하기 쉽지 않기에, 그런 식으로 자꾸 주저하게 만들기에.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 1의 관객이여, 나도 무섭소.



제 2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연출가 리 브루어 Lee Breuer 의 방식은 李箱을 리얼하게 보는 대신, 李箱을 더욱 이상하게/낯설게 만들었다. 이상을 이상답게/이상하게! 라는 구호다. 한국 사람도 이해 못하는 기인/시인을 미국 연출가가 어떻게 알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확보된’ 거리가 이상을 이상스럽게 표현하는 것을 가능케 했는지도 모르겠다.) 리 브루어의 작업은 그런 궤적을 걸어왔다.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당대의 새로운 논쟁적/주류 캐릭터를 늘 경계인으로 치환시켰다. 그리스 비극은 흑인들의 가스펠로, <인형의 집>은 왜소증의 소인(小人)들로 바꾸었다. 드라마의 중심에 주변인들이 섰고, 그들이 연기하는 연극은 실험이 되었다. <이상, 열셋을 세다>의 표현도 그러한 경로에 놓인다. 우리는 리얼/치열하게 살아간 李箱 대신, 새로이 불려온 모더니스트modernist 李箱을 발견하게 된다. 중심을 대신하는 주변의 이미지가 줄줄 따라온다. 그리하여 제 2의 관객이여, 너무 겁먹지 마시라. 



제 3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머리가 벗겨진 李箱이다. ‘파랑’과 ‘빨강’과 ‘초록’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나온다. 게다가 두 명의 무대 크루들도 함께한다. 李箱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작가/나레이터는 연극 속에 개입하기도 하고, 극중에서 자신을 연기하는 ‘파랑’ 과 만나기도 한다.

 내가 이상일까요? 아니면 이상을 닮은 어떤 인물은 연기하는 걸까요? 아니면 이상이라고 알려진 작가에 의해 만들어 졌을지도 모르는 어떤 인물의 역할을 하는 걸까요?

 이상의 작품 <날개>에 나오는 작중화자인 ‘그’ 가 李箱인지, 李箱에 의해 가공된 인물인지 헷갈리는 것처럼 작가와 주인공이 긴가민가한 풍경은 익숙하다. 아마도 둘/셋 다 일 것이다. 李箱과 시와 삶. 그 모두가 동일한 정체성의 줄기로 엮여있다. 이야기를 이끄는 머리칼 없는 李箱이 처연하고 측은하다면, 그가 설명하는 이야기/이미지 중에서 짝을 이루어 존재하는 것들 - 파랑, 빨강, 초록 - 은 유쾌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등장한다. 표면적으로는 자기의 사랑과 우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자신의 내면을 하나씩 내놓고 있다. 그래서인지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빨강, 초록은 얄미워지고, 파랑은 불쌍해진다. 그러므로 제3의 관객은 무서워 할 것이 아니라, 우울 blue 해야 할 것이요.




제 4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그간 한국 연극계에 불어 닥친 ‘근대’ 의 바람을 전혀 모르는 듯, <이상, 열셋을 세다>의 배우들은 최첨단의 패션을 보여준다. 동그란 안경테와 양복, 중절모로 상징되는 모던보이는 보이지 않고, 2009년의 젊은이들의 트렌드를 고스란히 재연한 복장이 인상적이다. 유행하는  헤어컷과 의상을 착용한 파랑, 빨강, 초록의 배우들은 데카당스한 느낌이 잘 드러났고, 연기 역시 그에 어울리는 심상치/범상치 않은 느낌으로 표현되었다.

 지식인의 좌절이나, 식민지인의 설움, 예술가의 고뇌라는 익숙한 주제가 ‘현실’ 과 ‘신파’ 의 길을 따라 걷는다면, <이상, 열셋>은 복잡다단의 내면에서 길을 헤매는 자식의 인간을 세세히 보여준다. 따라서 갑자기 등장하는 자우림의 노래가, 차를 마시는데 나오는 콜라가, 일식집에서의 긴 젓가락이, 접었다 폈다 자동우산과 어우러지는 탱고가 뜬금없을 수도 있겠다.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면서 ‘교태로움’ 대신 ‘요상함’ 을 더해주는 빨강/금홍의 연기도 거슬릴 수도 있겠다. 억지를 부리듯 도무지 알 수 없는 파랑과 초록의 행위도 일견 난해하다 못해 난처하다. 일단은 다시 한번 무섭다고 해두겠소. 



제 5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그럼에도 이러한 방식이 가능한 것은, 표현 ‘주체’ 들이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시대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화려하지만 ‘본질’ 은 알 수 없고, ‘순수’ 를 갈망하지만 이미 ‘잡종’ 들로 혼재된 세계. ‘李箱’ 이 활동하던 1930년대 ‘경성(京城)’ 이 동경(東京)의 이미테이션이라면, 2000년대의 ‘서울(Seoul)' 은 뉴욕(NY)의 이미테이션이다. 왜색 짙은 다도茶道의 예(禮)를 따라 그들이 취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콜라Coke. 멋지지만 공허하다. 李箱이 그랬고, 李箱의 친구들이 그렇듯. 리 브루어는 1930년대와 2000년대를 각각 대표하는 ‘그들’ 을 멋지지만/공허한 ‘시공간’ 속에 풀어놓은 것이다. 그들이 무서운 이유를 조금씩 알 것도 같소. 



제 6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재미교포 1.5세대 극작가 성노의 텍스트는 이러한 초超공간을 의도한다. 꽉 짜여진 플롯 대신에 풀어헤친 플롯(released plot)이 주(主)를 이루고, 결국은 李箱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큰 틀이 남는다. 1930년대라는 엄연한 일제 식민의 현실이 아닌, 그러한 시대적 외압(?)을 감안한 작가李箱의 괴팍한 상상에 뿌리를 둔 이야기이기 때문에, 복잡에 난잡(亂雜) 그리고 협잡(挾雜)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나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파랑은 빨강을 사랑한다는 것. 그런데 빨강은 초록도 사랑한다는 것. ‘파랑’ 이 ‘빨강’ 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물을 찾아서’ 떠난다는 것. 좁은 극장 구석 어딘가에 있을 물을 찾아서.




제 7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공연의 주안점은 삼일로 창고극장의 무대 활용이 극대화되었다는 점. 작가가 텍스트에 풀어놓은 초공간의 의도가 연출에 의해 고스란히 살아났다. 극장 바닥은 올라가고/내려가면서 새로운 ‘공간’ 을 찾아내고, 인물들은 극장 좌우의 벽에 달라붙어 이동하며, 막 뒤의 리프트까지 활용함으로써 역동성을 구현해 내었다. 좁은 공간속에서 좌충우돌하는 그들의 모습은 자폐적이며 동시에 몸부림치는 李箱의 모습을 건축적/신체적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뇌면/ 내면을 감추고/보여주는 블라인드의 척척 맞는 움직임도 기가 막히다. <이상, 열셋>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보기 드문 극 마당을 창조해냈다. 이쯤되면 무서운 것은 거장의 테크닉이다.



제 8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1930년대 경성의 이미지가 감각적으로 흘러가는 영상은 공연의 또 다른 볼거리다. 칙칙하지만, 한편으로는 산뜻하게 환기되는 당시 음악은 영상과 더불어 1930년대를 기억하는 수단이다. 이렇듯 작품은 설치되고, 상영되고, 전시되는 등의 다양한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극의 말미에 다량의 콜라 캔이 쏟아지는 장면에선 스펙타클을 자랑한다. 이 장면은 가히 섬뜩하다. 움푹 들어간 공간 속에서 캔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물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콜라와 담배는 갈증/갈등을 해소시켜주지 못한다. 다만 잠시 잊게할 뿐. 그러는 사이 몸은 점점 축난다. 李箱을 스물일곱에 요절하게 만든 이유도 바로 - 중독성 있는 - 그것들이었다. 하늘로 솟구치는 대신 그는 콜라의 바다에 함몰된다. 벗어나기 위해 ‘날개’ 를 꿈꾸는 이상의 절규. 날자. 날자. 날아보자꾸나.



제 9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李箱은 1937년에 세상을 떴고, 리 브루어는 1937년에 태어났다. 27살에 요절한 李箱과 72살을 맞이한 Mr. Lee. 두발(頭髮)없는 캐릭터 이상의 형상과 연출가의 모습이 겹치는 데에는 모종(毛種)의 기운이 느껴진다. 

 작년 LG아트센터의 큰 무대에서 <인형의 집>을 선보이더니, 이제는 대학로도 아닌 변방(?)의 작은 무대에서 ‘李箱’ 이라는 인물로 다시 한국을 찾다니 신기할/고마울 따름이다.

 2000년에 <하지Haji>로 내한한 리 브루어는 당시 배우의 사정으로 <이상, 열셋>의 공연을 이어가지 못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서울공연예술제에서 <바다로 간 여인>을 연출한 이미지극의 거장 로버트 윌슨과 사뭇 비교되는, 진지하고 열성적인 태도로 국내 연극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아쉬운 결과로 한국을 떠난 그가 <인형의 집>의 블랙 유머의 코드를 이해한 한국 관객들을 믿고, 다시금 공연을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관객들이여, 믿음에 무서움으로 화답을 필요는 없을 터.



제 10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삼일로 창고극장과 리브루어가 이끄는 마부마인 극단의 정체성은 사뭇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비주류이면서, 실험극의 산실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창고에서 태어난 연극과 폐광촌에서 시작된 연극. 그들은 모두 새로움으로 무장하고, 주류를 전복한다. 그 정신은 여전하다. 거장이라 불리는 연출가가 예전 작업에 그치지 않고, 이어서 완결했다는 점이 의미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시도가 李箱이라는 인물을 세계에 소개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점이 사뭇 벅차게 다가오는 것이다. 미미했던 시작이 창대한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제 11의 관객이 무섭다고 그리오.

 대머리 李箱이 마지막에 읊는 <13인의 아해>는 여전히/놀랍도록 구슬프다. 감정이라곤 ‘무서움’ 외엔 딱히 언급한 부분도 없는 시(詩)임에도, 아해(兒孩)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무서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상상을 해보면, 그제야 어렴풋한 슬픔이 느껴진다. 李箱은 막연한 슬픔의 정체를 글자와 글자 사이의 쉼도 없이 단숨에 내뱉고 있다.

 정신없이 질주하던 두 시간의 공연으로 우리는 무서운 존재, 李箱이 아닌, 무서워하는 존재, 李箱을 만나게 된다.

 제 11의 관객이여, 그 만남이 어떠했는지 남은 12의 관객에게 일러주시오. 열두 명의 관객이 입을 모아 무섭다, 고 할지라도 열 세번째 관객인 나는 무섭도록, 즐기라고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