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 다시 숨을 쉬기까지 <남산예술센터-Festival 長>

2009. 11. 16. 15:04Feature


극장이 다시 숨을 쉬기까지

남산예술센터 <NEW WAVE 공연예술축제 Festival 長>


자기 포장도 하나의 기술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선보여야하는 그 순간의 포장만큼은 정직했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예술의 흐름을 쫓기 위한 기획자의 욕심이 작품의 정직함을 뻔하고 모호한 언어로 포장하지 않길 바란다. 이는 어떤 공연에든 바탕이 되어야 하겠지만 기획자인 나 역시 스스로의 잣대를 쉽게 넘을 수 없으며, 다른 공연이나 축제를 보고 제일 언짢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들어 관람한 대다수의 작품에서 그 언짢음을 느꼈고, 따라서 남산예술센터의 <Festival 長>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 있었다. 이는 위에서 말한 스스로의 기준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연 설문에 꼭 나오는 “공연 선택 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점”과 그 보기에 따르는 “공연장”때문이기도 했다.




얼마 전 필자가 남산예술센터 개관공연 프리뷰를 통해 ‘남산예술센터’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밝힌 바 있듯이 그 곳은 그다지 찾고 싶지 않은 공연장이었다. 몇 년 전 좋아하는 극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았던 그곳은, 예술은 간데없고 바짝 마른 콧대들만 남아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원래 내세운 목적은 잊은 채 흐릿해진 시안으로 그 흔한 유행에마저도 뒤쳐져 있었다. 첫인상이 이러하였으니, 올해 초 들려온 다른 이에 의한 재개관 소식이 반가울리 없다.


너무 거창하게 말고, 우리 좀 솔직해지자.

<NEW WAVE 공연예술축제 Festival 長>은 97년 대학로에서 시작하여 2001년까지 개최되었으나 재정 문제로 인해 7년간의 휴식기를 보냈다. 그리고 올해 서울문화재단과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의 주최로 남산예술센터의 비전에 맞게 재구성한 공연장 브랜드 축제로 다시 태어났다.(프로그램북 참고) 조금 거창하다 싶은 인사말이나 새 밥 먹어보지도 않고 떨떠름해 할 수 없어, 남산예술센터도 다시 볼 겸 두 작품-‘김윤진 댄스컴퍼니’의 <다녀오세요, 구두가 말했습니다 Ⅱ>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도쿄데스락’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관람했다.


그런데 드라마센터에서 예술센터로 바뀌면서 그곳의 작품들도 드라마를 잃은 걸까? 두 작품은 드라마가 숨 쉬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공연예술 양식의 발굴’은 있는가.



<다녀오세요, 구두가 말했습니다 Ⅱ>가 말하는 시도와 실험은 전혀 파격적이지 않았다. 미디어와 타장르의 결합은 복합장르의 기본 공식화 되었으며, 미디어의 아날로그화는 올여름 필자가 참여했던 아티스트 창작워크숍의 과정과 매우 닮아 식상하기까지 했다. 또한 퍼포머가 아니었던 창작자가 퍼포머로 무대에 오르는 건 위험한 시도라 보는데, 이것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채 관전 포인트라 서술하는 건 오히려 자기 작업을 깎아내리는 행위는 아닐까. 특히 이처럼 인과관계가 드러나지 않는 미디어가 결합된 움직임 작업은 연출이 말하고자 하는 감성을 관객이 쉽게 공유할 수 없어 더욱 난해하게 느끼기 마련인데. 이러한 난점을 보완할 수 없는 퍼포머와 의미부여 할 수 없는 오브제와 영상의 계속되는 등장은 드라마의 부재를 다시금 지적하며, 페스티벌 長에서 말하는 ‘소통’의 의미에마저도 의문을 남기고 만다.



다행하게도 이후 관람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고전과 연극이 가진 감성과 형식을 해체하여 배우들의 신체(100분 내내 쉬지 않는 그것은 움직임이 아니라 신체였기에 더욱 흥미로웠다.)와 감각으로 재구성했다는 부분에서 신선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원작이 탄탄한 드라마를 가진 고전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앞서 말한 대로 형식과 감각의 고조를 위해 해체되어야만 했던 드라마는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 대표작 중 하나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중화 된 배경으로는 소재인 사랑과 빠른 전개라는 작품 특성도 그러하지만, 올리비아 핫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끼친 각 세대마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원작이 덜 유명한 고전으로 우리가 줄거리를 몰랐더라면, 과연 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형식의 실험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드라마가 사라진 작품은 아름다운 대사마저도 빛을 잃을 수 있음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Festival 長>에서 불편했던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과 축제를 설명하는 프로그램의 내용 때문이었다. 형식의 실험에만 초점을 맞춘 사이 그 내면은 잃어버린 작품, 그것을 설명하는 프로그램은 ‘관객과의 소통을 지향’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형식의 실험이라는 말로 모두를 포장할 수는 없으며, 포장된 작품으로는 관객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남산의 그리고 페스티벌 長의 기획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살아남에 감사하며


<Festival 長>이라는 남산예술센터의 선택에 찝찝함을 안고 있던 얼마 후, 젊은 연출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민음사에서 출판되는 책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유인즉슨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희곡에 담긴 각 캐릭터들의 사회적 위치는 변하기 마련이며 그들의 대사도 미묘한 차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부장적 사회 당시 쓰인 대다수의 희곡에서 여성은 존댓말을 남성은 반말을 구사하고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당시에 출판된 희곡들은 이런 빈 고리를 안은 채 현재에도 읽히며, 공연되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현재의 연극이 부지런히 동시대성을 걸고넘어지는 근거와 동시에 그럼에도 젊은 예술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는 현실 비판을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 이야기를 곱씹으니 느껴지는 맛이 있었다. 남산예술센터였다. 선생님배우, 유명연출가만이 흥행하며, 예술도 팬이 있어야 성공하는 현재의 흐름에 반하는 선택을 내렸던 그 곳.
 

나는 어쩌면 서울문화재단의 이름으로 재개관한 남산예술센터의 ‘예술’을 인정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알맹이 없이 만들어진 서교예술실험센터의 케이스를 접하며 신뢰를 잃은 창작팩토리 사업을 비롯하여 올해에만 새로운 공간에 대한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 예술이 정책을 만드는 건지 아니면 그저 쫓아다니는 건지 의문스러우며,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예술가들의 태도와 현실의 충돌에 착잡함을 느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배경을 안은 남산예술센터였기에 오해는 있었으나, 그들은 적어도 알맹이에 대해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알맹이가 남긴 예술적 형식과 내용이 위치를 잡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으나, 새로운 정책을 쫓는 맹목적 포장이 아닌 극장을 숨 쉬게 하기 위한 판단이 있었음은 인정하련다.


예술은 현재만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내포하며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동시대성과 소통’을 수식어로 삼는 남산예술센터가 이를 잊지 않고, 극장을 숨 쉬게 하기까지 자신들이 칠한 포장에 이제는 예술의 진정성도 더할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새로운 예술가들의 시도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그곳을, 이제는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남산예술센터
동시대성, 시대정신, 실험성, 현대성, 새롭고 세련된 무대시도, 현대연극과 미래지향적 공연예술의 산실, 타장르 예술과의 적극적 무대결합, 전위적인 연극, 참신한 현대연극의 초연이 이루어지는 극장 | http://www.nsartscenter.or.kr/

 

글 | 도히 (공연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