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서울와우북페스티벌 : 가을은 분명 책에게도 축복을 내린 계절이다.

2009. 9. 28. 15:00Feature


가을은 독서의 계절 - 이라는 말을 도대체 누가 만들어 놨단 말인가?  사람들은 오히려 가을에 책을 더 안 읽는다.  그건 날씨와 관계가 있다.  높고 푸른 하늘, 맑은 공기, 바깥활동 하기에 적당한 기온까지.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왜 사람들이 가을에 책을 더 안 읽게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맞다.  이 모든 건 독서를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런 계절이 오면 좋은 친구들과 함께 산과 들로 여행 다니는 걸 즐긴다.  어느 누가 방안에 틀어박혀 고리타분하게 책이나 읽고 싶겠느냐, 이 말이다.

그러나 가을은 분명 책에게도 축복을 내린 계절이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사계절이 뚜렷한(요즘엔 전혀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우리나라 특성상 책을 주제로 야외에서 행사다운 행사를 할 수 있는 시기는 가을이 유일하다.  봄과 여름엔 황사 먼지와 잦은 비 때문에 야외에 책을 갖고 나갔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겨울에는 생각해볼 것도 없이 춥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야외 행사는 어렵다.  당연히 책을 주제로 기획된 행사는 거의 전부가 가을 즈음에 몰려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다.  그 중에서도 홍대에서 매년 열리는 ‘와우북 페스티벌’은 단연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다.  서울시내 중심부, 젊은이들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는 홍대 앞 주차장 거리에서 열리기 때문에 접근성도 좋을 뿐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행사 내용도 더 재밌고 다양한 것들로 기획을 하고 있다.

나는 이번에도 라면박스 두 개에 책을 싸들고 책 장터 행사에 참가했다.  와우북 페스티벌 공식 홈페이지에 미리 참가 신청을 해 두었던 터라 장터가 열리는 12시가 되기 전 조금 일찍 홍대로 나가서 정자 밑, 나무 그늘이 진 곳에 돗자리를 깔았다.

책 장터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나와서 자기 책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지만 그 규모는 평범하게 쓰이는 야외용 돗자리 한 개 정도로 규제를 두고 있다.  이것은 더 많은 일반인들에게 자리를 깔아주도록 배려하는 이유도 있고 간혹 보이는 ‘업자’들이 큰 판을 벌이지 못하도록 견제하려는 의미도 있다.  돗자리 하나씩 펴 놓고 갖가지 책을 파는 모습이 저절로 행사장 전체를 정겨운 분위기로 만든다.



책 장터는 책을 파는 것이지만 책에 관련된 다른 것을 팔아도 된다.  다만 공장에서 만든 것은 안 된다.  본인이 수작업으로 직접 만든 것만 허용된다.  하지만 직접 만들었다 해도 책에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팔 수 없다.  예를 들면 직접 만든 책갈피나 그림엽서 같은 것을 판다.  나와 함께 참여한 ‘SORY’는 북아트 기법을 이용해서 만든 ‘뱀주사위 놀이판’을 여덟 개 가지고 나와서 팔았다.  보드게임은 재미있지만 놀이판이 커서 휴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낸 것이 멀티플 컷으로 만든 놀이판이다.  판을 펼치면 크지만 평소엔 수첩크기만큼 접히기 때문에 갖고 다니기 편하다.  처음엔 잘 팔릴지 어떨지 걱정이었는데 마지막 날에 한 외국인이 내가 만들어 놓은 샘플 놀이판까지 사가는 통에 뱀주사위 놀이판은 딱 한 개만 남기고 다 팔려서 기분이 좋았다.

장터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이렇게 자기가 직접 만들고 그린 것을 가지고 나와서 파는 사람들이 작년보다 많아졌다.  직접 만들어서 파는 건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가게에서 파는 것과는 달리 창조적이고 개성이 담긴 것들이다.  무엇을 가게에서 팔려면 그걸 공장에 주문을 넣어 대량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돈, 그러니까 ‘자본’이 필요하다.  판매자는 당연히 이 돈을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 내용을 새삼스레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상점에서 똑같이 생긴 물건을 여러 개 놓고 파는 행위란 ‘개성’보다 ‘대중성’이 우선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그것을 사고 싶은 욕구를 주어야 하기 때문에 작가가 상품에 개성을 담는다는 건 쉽지 않다.  내가 이런 소규모 벼룩시장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에는 책이건 뭐건 할 것 없이 개성을 무시하고 윽박지르는 시대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늘 창의력, 개성, 독특함 같은 걸 주입하면서도 막상 사회에 나가서는 그런 성향이 무시되기 일쑤다.  학교에서 행동이 조금 튀면 왕따를 당한다.  그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다.



홍대 와우북 페스티벌은 그런 게 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책 장터 바로 옆에서는 머리를 무지개 색으로 물들이고 말도 안 되는 노래와 춤을 춰도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다른 쪽 나무 의자 쉼터에서는 누군가가 손바닥에 작은 아코디언을 올려놓고 그럴듯하게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공연 같기도 하고 동시에 공연이 아니기도 하다.  이들은 공연자이자 동시에 관객이 되어 시원한 가을바람을 즐긴다.  젊은 사람,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축제와 하나가 된다.  그 모든 그림이 어우러져 한 권의 책이 된다.  이런 모습 속에서 커다란 책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사람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놓는다.

특히 이번 와우북 페스티벌은 책장터 참가비로 각 사람마다 책 두 권씩을 받아 ‘사랑의 책꽂이’ 행사를 기획하고 진부해질 수 있는 낭독회를 공연처럼 재미있게 진행해서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이런 행사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게 바로 출판사에서 차려놓은 부스가 자칫 책을 염가로 판매하는 장사판처럼 변질될 수도 있는데 홍대 와우북 페스티벌은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북 페스티벌, 즉 책을 사고파는 사람이 앞에 나서는 게 아니라 책 자체가 주인공인 축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더 다듬어야 할 부분도 있고 조금은 엉성했던 구석도 있지만, 점점 틀을 잡아가고 있는 홍대 와우북 페스티벌이 대견스럽다.  가을을 만들어놓은 신은 이렇게 책과 사람에게 두루 축복을 내렸다.  이 좋은 계절에 사람은 책을, 책은 사람을 더욱 사랑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제 5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 "책, 즐거운 꿈 樂몽을 꾸다"

소가 느긋이 누워있는 모양새라는 와우산 자락인 홍대 앞은 1,600여개의 출판사와 음악, 미술, 연극, 무용, 퍼포먼스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이 모여 대한민국 문화의 메카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은 문화적 상상력의 원천인 책을 통해 새로운 문화컨텐츠와 책문화를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고자 한다.
우리 안에서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터져나오는 꿈. 제 5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서는 그 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www.wowbookfest.org

글 | 윤성근

글 쓴 사람 윤성근은, 존 레논을 좋아하지만 오노 요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닉 드레이크와 커트 코베인을 좋아하지만 빨리 죽는 건 별로다.  굵고 길게 사는 방법에 관심이 많다.  오랫동안 IT 업계에서 죽도록 일했다.  하지만 책 읽고 글 쓰는 게 컴퓨터 보다 좋았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잘 나가던 회사를 관두고 출판사와 헌책방 일을 두리번 거렸다.  지금은 응암동 골목길에 간판도 없이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을 운영하면서 돈 안되는 글쓰기, 책읽기에 빠져있다.

성별 : 남자
혈액형 : O형
별자리 : 처녀자리
특기 : 책 빨리 읽기
단점 : 음식을 좀 가림
장점 : 나름 잘 생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