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문래예술공장 기획프로그램 '소리연구회 간장공장공장장'의 <오싹한 식탁>

2010. 6. 12. 22:36Review


 

오싹한 식탁
- 아직도 사는 게 따분하세요? -




 스카링


「네 편의 스릴러 단편 소설을 버무린 작품 ‘오싹한 식탁’. 실험과 메시지를 내세운 작품들 속에서 만난,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란 느낌이었어요. 머리 싸맨 채 고민 않고, 재미난 방법으로 들려주는 오싹한 이야기들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이야기에 취한 필자, 그래서 이번 리뷰는 ‘단편소설’로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제가 꾸며 낸, 인물 k도 덧붙여보았고요. (이거 이거, 괜찮은 거야?)_스카링」





“거기 누, 누구 있어요?”

닥터 강은 작은 부품을 집어 들어 상자를 향해 던졌다. 툭, 상자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닥터 강은 뒤돌아 동료들을 보았다.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들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고 와. 그래야 안심이 돼.’


제길, 닥터 강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상자 안에 있는 k의 이마에는 식어버린 땀방울이 맺혔다.


‘제발, 그냥 가오. 제발!’


그러나 닥터 강은 점점 상자 앞으로 다가왔다.


굵은 빗방울이 낡은 철공장을 두들겼다. 그 사이에서 가만히 새어나오는 코고는 소리. 노숙자 k가 내는 소리였다. k는 비를 피할 요량으로 잠겨있지 않은 창고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포장하다만 철 자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k는 구석진 곳에 있는 커다란 상자를 꺼내어 그 안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뼈 마디마디가 쑤셨지만, 그런대로 편안했다. 적어도 그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 끼이이익.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돈 아낀다고 이런 데까지 와야 하다니. 근데 무슨 소리 못 들었어?”

“겁주지 마. 여기도 겨우 빌렸다고. 자, 빗소리도 요란하겠다, 오늘 맘껏 떠들어보자!”
 

그들은 최소한의 등만 밝히고, 서둘러 무언가를 준비했다. 그 때까지도 k는 눈치 채지 못했다. 잠시 후,


“어머, 안녕하세요. 최 교수님. 오랜만이에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k는 퍼뜩 눈을 떴다. ‘헉!’ k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기이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천둥번개로 번쩍거리는 창밖을 배경으로, 네 명의 여자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모두 맨발이었다. 테이블 말고도 앞 쪽엔 마이크스탠드 세 개, 건너편에는 잡동사니 물건이 가득한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뭐 하는 짓들이여.’


공장직원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손에 종이더미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오늘 만찬에 오신 걸 환영해요.”

“독신자클럽에 걸맞은 파티로군요.”

“와아, 정말 맛있겠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하셨어요, 정말 멋져요. 윤 여사님.”

“아우, 배고픈데 일단 먹고 보자고.”

“근데 닥터 강은 언제 온다는 연락 없었나요?”

 
‘대본?’


연극 같지는 않았다. 한편으론 k가 즐겨듣던 라디오드라마 ‘격동 50년’과 비슷했다. k는 혼란스러웠다.

  
‘당장 나가야 해. 헌데 어찌......’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서였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k는 꼼짝없이 상자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서로를 최 교수, 윤 여사, 한 실장, 황 선생이라 불렀다. 모두 독신자클럽 멤버들이었고, 윤 여사의 집에서 저녁 만찬을 먹는 설정이었다. 빈 식탁 위로 탄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꼬르륵. k의 빈 배가 요동쳤다. 놀란 k는 배를 감싸 안았다.


  “닥터 강은 아직도 멀었나요?”

  “전화 해보고 올게요.”


남자 멤버인 닥터 강이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그 때에 깐깐해 보이는 최 교수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참으로 따분하군요. 돌아가며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요?”

“비도 오고 맛있는 음식도 있는데, 이런 자리에 이야기가 빠져서야 되겠어요? 누가 가장 오싹한 이야기를 하는 지 점수를 매겨보도록 해요.”

“어, 난 좋아. 오늘 분위기랑 딱 어울리는데. 난, 찬성. 그럼 내가 먼저 해볼까?”


느닷없이 시작된 이야기 경연대회. 빈 마이크 스탠드 앞으로 남여 배우가, 물건이 쌓인 건너편 테이블엔 여자 배우가 나와 섰다. k의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첫 번째 이야기 :

그림 그리는 황 선생의 이야기. 부잣집 미망인의 어린 딸이 상인연합회에 납치된다. 납치범은 건방지고 저만 아는 미망인의 딸을 ‘썩은 감자’라 부르기로 하고, 미망인 '엄마 감자‘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몸값을 흥정한다. 엄마 감자는 썩은 감자의 안전을 걱정하면서도, 몸값을 낮춰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감자는 이 상황에 익숙해졌고, 오히려 썩은 감자가 없어지자 편히 지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엄마 감자는 썩은 감자를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고 선포한다. 마지막 편지, 이번에는 썩은 감자가 보낸 편지다.

“나, 상인연합회를 대표하는 썩은 감자는 엄마 감자가 살인 청탁을 의뢰한 것으로 고소할 것이다. 증거는 그 동안 오간 편지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콩가루 집안이군.’
 
k는 웃음이 나왔다. 제법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배우들이 대본을 읽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효과음을 만들어냈다. 키보드를 두들기고, 종이를 찢고, 신발로 뚜벅뚜벅 소리를 내는 정도의 효과음이었지만,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다. 곧이어 다른 이야기가 이어졌다.

 


두 번째 이야기 :
 
최 교수의 이야기. 배경은 교도소이다. 사형을 인정 못 하는 죄수는 난동을 부리고, 교도관은 수녀를 데리고 온다. 수녀는 기도와 성서읽기를 통해 죄수를 달래려 하지만 소용없다. 그 때 수녀는 넌지시 성서를 건넨다. 그 안에는 쪽지가 들어있다.

 - 때를 기다리십시오. 탈출은 잘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 쪽지 하나에 죄수는 수녀가 오빠가 보낸 사람이라 믿고 그녀를 신뢰한다. 이후 수녀는 계속해서 쪽지를 건네 죄수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사형일이 다가와도 별 진전이 없자 불안해진 죄수는 사형 전날 다시 난동을 부리고, 수녀는 마지막 쪽지를 건넨다.

- 탈출은, 사형 직전에.

사형대에 오른 죄수는 이 말을 끝까지 믿고 전기의자에 앉는다. 여유 있게 미소까지 짓는다. 그러나 끝내 죽고 만다. 교도관이 어째서 죄수가 웃으며 죽었는지 수녀에게 묻는다. 수녀는 조용히 말한다.

“그저 약간의 희망을 주었을 뿐이죠.”



“희망은 참으로 허망한 거예요.”

  
최 교수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k는 오랜만에 이야기 듣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다. 그 사이, 윤 여사가 내온 돼지다리 요리를 먹은 일행은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세 번째 이야기 :

닥터 강에게 관심 많은 디자이너 한 실장의 이야기. 폭설이 몰아닥친 시골. 길 잃은 대학생이 외진 하숙집을 찾아간다. 그 곳에는 젊은 여주인만 있다. 여주인은 호의적으로 대학생을 맞이한다. 여주인은 직접 만든 박제 앵무새를 지나 학생이 머무를 방으로 안내하고, 내려와서 숙박부에 서명 해 줄 것을 부탁한다. 대학생은 흔쾌히 여주인이 건네 준 차를 마시며, 숙박부를 적는다. 그 때 앞에 적힌 두 사람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생각 끝에, 얼마 전 실종된 사람의 이름임을 기억해 낸다. 학생은 여주인에게 그들이 실종자가 아니냐며 말을 꺼내는데 점점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깊은 잠에 빠지는 대학생. 여주인은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학생도, 그 두 사람과 함께 쭉 내 옆에 있어줄 거죠? 내 앵무새처럼.”




k의 머리칼이 쭈뼛쭈뼛 섰다. 여주인 역을 한 배우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 이야기들에는 나름의 공통점이 있었다. 예상 못 한 반전, 그리고 열린 결말. k는 줄곧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k는 이 순간, 제일의 열혈 청취자이자 관객으로 변신해 있었다.

  
‘거 참 되게 그럴싸하네. 어쩜 저럴 수가.’

  
어쩜 그럴 수 있는 일일지도. 사실 영화나 소설이 더 있을 법한 일이다. 대본대로 움직이니까. 현실은 대본이 없다. 알 수 없는 반전과 끝이 없는 결말의 대표 장르 스릴러는, 그래서인지 현실과 비슷한 점이 많다. 때문에 사람들은 스릴러에 끌리는 걸까? 비상구의 푸르스름한 불빛이 창고 안을 음산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윤 여사 차례였다. 디저트로 자신이 마실 홍차와, 손님을 위한 커피를 내온 윤 여사는 싱긋 웃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모두 즐거웠어요. 하지만 어디서 들었거나, 지어낸 이야기죠. 따분하다고요? 그런 감정은 사치일 뿐이에요. 저는 진짜 제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이죠!”

  
윤 여사는 수수께끼를 하나 내었다.

  
“어째서 닥터 강은 여태 안 오고 있는 걸까요? 정답은...”

  
추려 말하면, 윤 여사는 미리 도착한 닥터 강과 말다툼 끝에 냉동 돼지다리를 내려쳐 그를 죽인 후, 그 고기를 요리하여 일행에게 먹인 후 증거를 없앴다. 그리고 손님들은? 손님에게만 건넨 커피에 독을 타서 모두를 죽이겠다는 내용이었다. k의 팔뚝 위로 닭살이 쫙 돋아났다. 그러나 어딘지 싱거웠다. 이야기 속엔 놀라움이 있었지만 그냥 전해 듣는 기분이었다. 술술 풀려나오니, 뭔가 김이 빠지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에이, 이건 뭔가 시원치 않아. 다른 결말 없어?”

  
응? k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래요. 이렇게 끝나버리면 어딘지 심심한 느낌이에요.”

“그럼, 이런 결말은 어떨까요?”



  
곧바로 다른 결말이 이어졌다. 이번 이야기에는 반전에 반전이 숨어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닥터 강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잠시 기절해 있던 닥터 강은 기지를 발휘하여 요리사들을 매수하여 커피에 독 타는 것을 막고, 대신 윤 여사만 마신 홍차에 수면제를 타서 그녀를 잠재웠다. 이윽고 등장하는 경찰들.

  
“이것도 아냐. 너무 쉽게 해결된 것 같아.”

  
k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강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마무리 해보죠.”

  
세 번째 결말. 살아 돌아온 닥터 강, 그리고 약에 취해 쓰러진 윤 여사. 그런데 갑자기,

.
.
.
“서프라이즈!”

  
두 사람은 깜짝쇼를 끝내고 결혼발표를 했다. 이 만찬의 진짜 목적을 공개한 것이다. 실망과 축하,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누군가의 한 마디까지.

 
“그게 뭐요!”

  
일동 정지. 단 한 사람, 제 목소리에 제가 놀라 입을 틀어막은 k만 빼고. k는 배우 못지않게 몰입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싸한 빗소리만이 한동안 이 정적을 감싸 안았다. 잠시 후, 닥터 강이 용기를 내었다.

  
“거기 누, 누구 있어요?”

  
닥터 강은 상자 바로 앞에 서 있었다. k는 숨도 쉬지 못 했다. k는 눈을 꼭 감은 채, 주문 외우 듯 아무 신에게나 기도를 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는 어림없었다. 닥터 강의 손엔 굵직한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리쳐봐.”

  
싸늘하게 식은 말이 닥터 강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k의 머릿속은 하얗게 타들어갔다. 그 때였다.

  
“어이쿠, 실례합니다. 연습은 잘들 되시는가.”


천둥소리와 함께 몇 몇 사내들이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창고관리자도 있었다.


“바쁜데 미안허이. 물건 보내는 걸 깜빡해서. 금방 챙겨갖고 나갈게요.”

  
그들은 얼떨떨해하는 배우들을 지나 상자더미 앞으로 다가왔다. k는 바짝 말린 건어물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내들은 커다란 상자들을 맞들고 밖으로 옮겼다. ‘저것도?’ 한 사내가 상자를 가리켰다. 주인은 갸웃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이 낑낑거리며 상자를 들어올렸다. k는 붕 떠올랐다. 그는 하늘을 나는 꿈을 꿨다.


‘그래, 여기만 나가면! 어떻게든 도망쳐야지.’

  
조금만! 입구가 코앞이었다. 그러나 꿈은 곧 깨지고 말았다. 습기와 땀으로 눅눅해진 상자가 k의 무게를 이기지 못 하고 입을 쩍 벌렸고, 입을 더 쩍 벌린 사람들 앞에 k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창고관리자였다. 그의 두툼한 손가락이 방향 잃은 나침반침처럼 휙휙 돌아가다 겨우 한 곳을 가리켰다.


  “시, 시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광란의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 오래 누워있어 몸이 굳어버린 k는 손 하나 까딱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여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랬다간......그 틈에 누군가 얼떨결에 자기 대사를 쳤다.


“아직도 사는 게 따분하세요?”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문래예술공장 2010 봄 기획 프로그램 ‘싹’ 참가작]

소리연구회 간장공장공장장의 ‘오싹한 식탁’

공연일시 : 2010.5.15~16

공연장소 : 문래예술극장 박스씨어터



‘오싹한 식탁’은 외국 작가들의 단편 소설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들은 1인 3역 이상을 소화한다. 이 작품은 기존 연극과 달리 모든 동작의 요소를 배제하고, 라디오 드라마 형식을 표방한다. 직접 대본을 들고 나와 읽음으로써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기의 고정관념을 깨고 ‘배우 연기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또한 배우가 직접 현장의 소리를 연출해내는 ‘효과음 테이블’은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 준다.




필자 스카링(scar★wing) 은...

영어 scar와 wing을 빨리 발음하여 얻어낸 닉네임. 이름보다 더 많이
쓰고 있다. 강아지보다는 고양이, 폴 매카트니보다는 존 레논쪽 과에 속하며,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 딸기와 초콜릿을 함께 먹었다가 담배맛이 난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글쓰기를 업으로 알고 '조율'하는 중이며, 기타줄도 튕기고, 자전거 체인도 움직이며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고는 있는데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