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극단 '초인'의 <맥베스> "전쟁은 끝났다..그러나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다...그러나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극단 초인의 <맥베스>






| 요클라





“전쟁이 끝났다”라는 선언으로 한 연극이 시작된다. 이는 셰익스피어에게 그리 낯선 도입부가 아니다.(“이제야 우리를 짓누르던 불만의 겨울이 가고 태양도 우리 요크 가문의 편이 되어 영광스런 여름 찾아왔도다.” -<리처드 3세>) 셰익스피어의 극을 추동하는 에너지는 그 영원한 불안정에서 비롯한다.


극단 초인이 <맥베스>를 집어들었다. 항구적 불안정이라는 전제를 놓고 볼 때 연출 박정의의 해석에서 처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던컨 왕의 고뇌’일 것이다. - 맬컴과 맥더프의 경우는 이미 이들이 그리 ‘선하지 않다’는 것이 원작 4막 3장의 심리게임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그의 끝없는 불안감은 이미 맥베스가 자신을 노릴 것임을 예감하고 있다. 따라서 시역의 충격, “대지가 학질에 걸린 양 떨리며 진동했다”(2막 3장)과 같은 호들갑이 남아있을 자리는 없다. 처음부터 권력투쟁은 귀족들의 삶의 이유이며, 민중들이 딛고 있는 땅과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 ‘민중’은 누구인가? 하지만 그 전에 박정의의 해석에서 ‘민중이 누구인가’의 문제보다 ‘민중이 들어서는 대신 누가 빠졌는가’에 대해서 먼저 관심이 갔다면 지나치게 심술궂은 것일까? 맥베스를 읽었던 이들(아니면 최소한 맥베스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말로 변명해야겠다. 마녀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각주:1]


그렇게 마녀들의 예언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맥베스를 ‘코더의 영주, 곧 왕이 되실 분!’이라고 부르는 대사가 민중들에게 옮겨졌다. 대신 저 유명한 버넘 숲의 이동,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자는 맥베스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모든 예언들이 생략되었다. 솔직히 버넘 숲의 이동이라는 저 굉장한 장면은 맥베스를 실연으로 보는 이들은 모두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는 장면이 아닌가! 그런데 그 장면을 깨끗하게 도려냈다.


이 장면이 날아가면서 <맥베스>를 수놓는 전쟁은 ‘옳은 것’으로의 지향이 아닌, 이놈에서 저놈으로의 수평적 이동에 불과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권력을 잡은 맥베스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불가해한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 자신을 위협하는 또 다른 귀족, 그가 결코 놓여나올 길이 없는 끔찍한 악순환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디 그러한 악순환에 빠져들어서, 그저 우리의 손발을 움직이는 힘들에 의해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쯤 쓰고나서 호기롭게 리플렛을 펼쳤다가 위기에 빠졌다. 극을 보고 나와서 머리속으로 이리저리 궁리한 생각들이 알고보니 ‘연출 의도’에 모두 쓰여있을 때의 절망감을 상상할 수 있는가? (“참 잘 읽었어요”하는 도장이라고 있으면 받고 싶은 심정.) 뭐랄까, 난 안될거야, 아마. 머리가 하얘졌을 때 참으로 친절한 목소리의 마감 재촉 전화를 받고, 패닉상태가 되었다. 으악!


하여 나는 글쓰기를 중단하고 한참동안 텃밭에 물을 주고, 상추들의 머리를 쥐어뜯다가 글로 돌아왔다. 될대로 되라. 모른 척하고 그냥 제2의 연출 의도를 쓰기에는 목숨이 아깝고 하니, 무대에 대한 이야기나 하다가 글을 끝내야지 싶다.


“공격하라!” - 대체 무엇을? - 고 외치는 귀족들이 디디는 땅과, 민중들이 디디는 땅은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맥베스>는 끝없이 서로 다른 현실을 밟고 있는 인간들의 드라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박정의는, 원작에서 끝없이 멀어지는 듯하면서도 무대 운용에서 이러한 특성을 분명하게 살려냈다. 무대를 세 개의 층위로 나누어 높이 변화가 가능하게 한 것.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한바탕 유희와 같은 몸짓으로 던컨 왕의 목숨을 노릴 때, 왕이 된 맥베스가 광기를 일으키며 스스로 몰락할 때. 이 모든 것이 무대의 높이 변화를 통해서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조명을 바닥, 배우들의 키높이, 그리고 상부조명으로 나누어 운용한 것 역시 탁월했다. 배우들의 몸, 몸이 빚어내는 현란한 궤적, 배우들의 몸이 무대와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들로 이루어진 공연은 새로웠다. 발을 구르는 리듬은 음산하고 강렬하여, <맥베스>라는 연극이 채워주는 감각적 즐거움에 일조하였다. (물론 발을 구르는 방식으로 일관한 심리묘사는 약간 단조로웠고, 경우에 따라서는 희화화된 것처럼 보이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결국 원작의 ‘마녀들’, ‘귀족들’, 그리고 새롭게 설정된 ‘민중들’을 포괄하는 이 군상들이 거하고 있는 공간, 그들이 울려내는 소리들은 연출이 발견해낸 층위였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공간! 민중들이 줄곧 외치는, 강하고 현명한 왕이란 강력한 유혹일지언정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 초인의 시도에서 박수를 치고 싶은 부분은, 배우들의 몸을 통해서 이 거대한 감옥을 여과없이 드러냈다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적을 향해 돌진해갈 때, 시체를 노리는 까마귀 같이 주인공의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 때, 군상들은 온몸으로 그 혼란을, 끝없는 악순환을 몸에 아로새기고 있는 듯하다. 보는 것은 그들의 상처이고 듣는 것은 그들이 격렬하게 공간 속에 남겨놓는 발자국 소리들이다.


뭔가 찝찝하다. 결국 소외되어 버린 하나의 단상을 꺼내 놓아야겠다.


셰익스피어의 극에서는 언제나 두 가지 방향의 움직임, 그리고 여기서 비롯하는 에너지가 감지된다. 고양되고 확장된 거대한 세계가 어느 순간 응축되면서 생기는 에너지(호두 껍질 안에서도 세상의 왕이라 생각할 수 있다던 햄릿). 또는 참으로 내밀하게 감추어져 있던 내면이 갑작스럽게 나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로 탈바꿈하면서 생겨나는 폭발의 에너지. 후자는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이 홀로 남겨졌을 때마다 그들이 직면하게 되는 세계, 자신들에게 적대적이고 마침내는 그들을 집어삼키고 말 바로 그러한 세계이다. <맥베스>라는 이 잔혹극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고, 마치 혼란에서 극이 시작했듯이 막이 내림이 결코 끝이 아닐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어지러움. 셰익스피어의 세계는 그것을 읽고, 상연하며, 감상하는 이들의 몸처럼 거칠게 떨리면서 팽창했다가 허탈하게 무너지고 만다. 연극이 끝나는 순간은 말이 끝나는 순간이 아니라 몸과 그 몸이 공간 속에 남겨둔 흔적들이 공기 속에 완전히 흩어졌을 때이다.






극단 초인
궁극의 절정, 그 전율 맥베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010-06-04  ~  2010-06-13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 위주의 원작에서 탈피하여 각 인물들의 심층적인 독백을 통해 현시대에 존재하는 권력과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위정자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또한 그러한 그들의 권력 다툼을 바라보며 고통 받는 민초들의 아픔을 서정적인 표현법과 은유적인 시적언어를 통해 그려낼 것이다.

원전 텍스트는 각 인물들이 일인칭시점에서 심리를 응축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독백 형식의 시어로 재탄생된다. ‘대화’는 이러한 형식 속에서 환기적인 효과로써의 그 역할을 수행해낸다. 

전쟁을 마치고 귀향하는 병사들, 아들을 기다리는 노파, 기나긴 피난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민초들의 독백을 통해 권력자들이 만들어가는 역사에 대한 민초들의 관점, 고통의 소리를 시적 은유로 노래할 것이다.





필자: 요클라 (트위터 ID @yocla14)

자기 소개하는 순간이 가장 난감하고 힘든 사람. 활자중독증. 언제부턴가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며 글쓰기를 시작. 노트 속에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공화국이 하나, 아무도 죽지 못하는 희곡이 두 편,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세 개의 음표,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고 채워져 나가는 ‘잠언’들. 관심 있는 이들은 부디 구원해 주시길. (무엇을?)







  1. 사실 이러한 질문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 꼰대 인증이라고 말해도 좋다. - 누구든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집어든 사람에게 ‘너는 왜 이렇게 했는가’라고 비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셰익스피어에서 그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집어든 것일 뿐이니까. 다만 무엇이 바뀌었는가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