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100페스티벌: 전쟁 그리고 분단' <인내의 돌> "어쭙잖은 날"


 


 

<인내의 돌>

어쭙잖은 날




 

글 │ 조원석




 


지금 내 핏 속에 알코올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피가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다. 이렇게 출렁이면서 나는 이 리뷰를 쓰고자 한다. 따라서 이 리뷰는 일종의 음주 리뷰이다.

 

등장인물

술 취한 나와 「리뷰 쓰는 나」.

「모기에 물렸다. 버물리를 발라야 하는데 더물리를 발라서 모기에 더 물렸다.」 이 리뷰는 이렇게 웃기기보다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게끔 만드는 농담으로 시작된다.


이 연극의 리뷰는 농담으로 시작할 만큼 가벼운 연극은 아니다. 그럼에도 농담으로 시작한 것은 단지 자신의 재치를 뽐내고 싶어 하는 이유 때문이다.


이 연극은 굴곡이 많은 삶을 산 여자에 대한 연극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의 삶을 통해 이 연극을 보아야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리뷰를 쓰는 나는 글의 색깔을 바꿨다.>




「흐름. 분명히 이 연극에도 이야기의 흐름은 있다. 그런데 그 흐름은 여러 지류가 모여서 하나의 강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강줄기가 여러 지류로 갈라지면서 거대한 강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강’이 인간의 삶을 은유한다고 했을 때 인간의 삶은 지류 같은 여러 사태들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인내의 돌’의 주인공인 여자는 다양한 사태들로 인해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씩 갈라지고 깎여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인내의 돌’이 깨어지듯이 산산이 부서진다. 이 깨어짐을 연극은 해방이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이 깨어짐은 영원한 굴레다.」


‘영원한 굴레’, 그럴 듯한 말이다. 그런데 ‘영원한 굴레’는 ‘해방’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영원한 굴레’ 속에 무수히 많은 ‘해방’이 있다면?

 

연출의 말을 빌리면 ‘인내의 돌’은 아프가니스탄의 신화에 나오는 마법의 돌이다. 고뇌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쏟아놓은 모든 말들을 흡수하다가 일정 한계점에 이르면 탁하고 깨어짐으로서 그 비밀을 털어놓은 사람을 해방시킨다고 한다.


‘해방’이라? ‘해방’은 어떤 것일까? 

욕망을 채우는 것이 해방일까?

욕망을 끊는 것이 해방일까?
어떤 것이 해방일까?
나는 자꾸만 해방이 거슬리는데, 리뷰를 쓰는 나는 자꾸 엉뚱한 얘기만 하고 있다.


「여자의 ‘인내’는 남편에 대한 순종이었다. 여자의 ‘순종’은 욕망을 ‘인내’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인내’는 남편에 대한 순종이었다. 인내와 순종의 순환. 이것이 ‘영원한 굴레’다. 이 영원한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자가 선택한 것은 욕망을 몸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시체나 다름없는, 의식이 없는 남편을 향해 쏟아내는 욕망들과 고통의 기억들. 군인들의 폭력과 모욕. 죽음에 대한 공포들이 말소리가 되어 쏟아진다. 남편은 인내의 돌처럼 여자의 고뇌를 듣다가 결국 깨어진다. 돌의 깨어짐은 ‘의식’의 깨어짐으로 형상화 되고, 벌떡 일어난 남편은 아내의 목을 죄어 죽이고 자신도 곧이어 죽는다. 남편은 남아있던 생명을 하나로 모아 아내의 죽음과 바꾼 것이다. 결국 인내의 돌이 들려주는 해방은 죽음을 말했던 것일까? 이것이 진정한 해방일까? 해방의 의미를 알기에는 아쉬운 결말이었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리뷰다. 스토리와 의미들을 적절히 섞고, 분명한 해석을 회피함으로써 단호한 결론을 내릴 때 느끼는 부담감을 덜어내려는 수작이다.


앞서 얘기 했듯이 이 연극을 통해 고민해야 할 것은 ‘해방’의 의미다.
‘해방’을 ‘자유’와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있듯이, ‘해방’은 언 듯 ‘무언가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되찾는다.’라는 의미를 준다.

이 연극에서는 ‘벗어남’의 대상은 고통이고, ‘되찾아야 할’ 대상은 ‘순수한 욕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해방’은 욕망의 채움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도망치는 모습이 아니라 채워야 할 것을 향해 가는 모습이다. 즉 ‘해방’은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향한 ‘열망’이다.




내가 생각했지만 참 그럴듯한 결론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아프가니스탄처럼 여성의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 부당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을 비추어 생각한다면 결국 ‘벗어남’의 동력은 ‘열망’이고, ‘열망’의 동력은 ‘부당함’이다.
‘열망’이 ‘욕망’의 밝음 면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 ‘부당함’을 느끼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하고, 욕망을 소비하는 사회 속에서 욕망에 속박된 사람들은 욕망의 밝음을 보지 못한 것이다. 욕망의 밝음은 열망이고, 열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를 생각하는 열정이다. ‘부당함’을 느끼는 ‘정의’가 없는 욕망은 ‘해방’이 아니라 ‘속박’이다. ‘속박’의 욕망을 쫒는 자는 결국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연극에서 여자는 남편이 의식을 차리기를  바라고 있다.  만일 남편이 다시 깨어난다면 남편은 여전히 여자를 속박할 것이다. 여자는 그것을 몰랐던 것일까? 두 딸이 굶어죽는 동안에도 남편을 간호했던 여자다. 여자는 남편의 속박에 이미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여자의 욕망과 고뇌 역시 개인적인 욕망들이었다. 여자는 해방이 아닌 속박을 바라고 있었다. 이미 여자는 죽어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인내의 돌은 여자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참 그럴듯한 결론이다.  




100페스티벌 2010 <전쟁 그리고 분단> 참가작
인내의 돌

2010년 6월 29일~2010년 7월 4일

행복한 극장


극단 가변 | 황진주 극본 | 이성구 연출 
거의 장식이라곤 없는 휑한 공간. 총탄을 맞아 의식이 없는 환자와 그를 돌보는 여인. 시간이 고뇌, 침묵, 독백……등으로 채워져가면서 차츰 여인의 간절한 기도는 분노의 함성으로 변해간다.  이 작품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아랍권 여성의 사회적 상황을 고발하는 작품이면서, 사랑과 육체와 기다림과 고독과 소외라는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주제에 독창적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