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플러스 원> 새로운 변수를 찾아서

2010. 8. 23. 13:17Review



플러스 원 - 새로운 변수를 찾아서


글_조원석






기술과 예술이 만나면 기예가 되는 걸까?

아닐 것이다. 기예는 예술로 승화된 기술을 말한다.

그렇다면 기술은 무엇을 만나야 예술로 승화되는 걸까?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 콘텐츠 개발 시범사업팀의 ‘플러스 원’은 서로 다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시도한 공연이다.





과거의 기예가 오랜 세월을 걸쳐 몸에 배인 숙련된 기술의 경지였다면, 지금의 기예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과학 기술에 대한 창조적인 활용이다.


과거의 기예가 예술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을 걸친 사물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흙을 다루면서 흙을 이해하게 되고, 자연의 빛을 다루면서 그 빛을 이해하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고려청자이고, 인상파의 그림이다.

반면,
오늘날의 기예는 기술과 정신이 분리되어있다. 기술은 과학이 담당하고, 그 기술에 대한 창조적인 활용은 정신이 담당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예에는 더욱 협업이 필요하다. 공연 ‘플러스 원’은 바로 이런 협업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음악, 그림, 문학, 무용에는 천재가 있을 수 있지만, 철학에는 천재가 없다. 그 이유는 철학은 재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사물에 대한 이해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다. 이해는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한다. 기술이 기예가 되고 기예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 공연 ‘플러스 원’에서는 이런 사물과 인간,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 부족함을 이 공연에 참가한 사람들도 알고 있는 듯하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피드백을 원하는 것으로 볼 때 이번 공연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서의 공연이 ‘플러스 원’이다.






첫 번째 공연, ‘XY가 만났을 때’는 그림자극을 표방한 새로운 형식이었다. 막에 비친 그림같은 영상들이 그림자극을 하는 배우들의 몸짓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기술의 발달을 실감하게 할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일종의 애니메이션과 그림자극이 만난 극이었는데 아쉬운 점은 그 내용이 단순한 부부싸움에 그친 점이다. 일상적이며, 코믹한 점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점도 있었지만 형식의 새로움만큼 내용의 새로움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






두 번째 공연, ‘인형의 방’은 하얀 목조의 방을 제작하고, 그 안에서 인형극을 하는 형식인데, 실내 공연에 앞서 시도한 야외 공연을 영상으로 비춰주고 있다. 거리에서 방의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인형의 모습과 그 인형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행동들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인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 주는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거리에서 낯선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람들이 왜 즐거워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할 필요가 있다.


 



방 속의 인형은 창가에 앉아 이력서를 쓰고 버리는 행위를 계속한다. 그렇게 쓰다가 버린 이력서들이 방에 한가득 쌓여 있다. 그리고 방을 나와 공중으로 부유하는 인형. 하늘을 나는 물고기처럼 부유한다. 인형을 다루는 기술과 거리의 공연 등 그들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 노력이 더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소프트웨어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인형이 부유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부유하고 싶어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자유를 상상하듯이 억압도 상상하는 것은 아닐까? 억압을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자의식이다. 그 자의식을 상징하는 것이 이력서로 가득찬 방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에 고민도 필요하지 않을까? 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당신이 하는 행동이 곧 현실이 된다. 현실이 무겁다면 그것은 곧 당신이 무겁다는 것이다. 당신이 가볍다면 현실도 가벼워진다. 그래서 그렇게 부유했던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부유는 그만큼 뜬구름 같다. 뜬구름이 아닌 조금은 땅에 가까운 이야기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세 번째 공연, ‘마그리트의 카페’는 관객석 뒤에 나타난 무용수가 무대로 내려오는 것부터 시작된다. 관객석 사이에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되는 데 굳이 관객이 앉아 있는 틈을 비집고 내려온다. 손에는 전등을 들고 있다. 그 전등을 관객에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관객의 어깨 너머로, 때로는 끌어안고, 때로는 밀어 내면서 관객 사이에 틈을 만들어 내려온다. 참 힘들게 내려온다. 전등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다. 사람들 속에서, 관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은 무대에서도 계속 된다.






몸짓과 영상이 겹쳐지거나, 영상을 따라 손을 움직이거나, 혹은 손의 움직임에 따라 영상이 생기거나 하면서 행위는 계속 된다. 이러한 행위들 역시 무엇인가를 찾는 탐색의 과정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이다. 도대체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배우가 찾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이 공연이 찾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이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찾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쩌면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리라는 단어는 알지만 진리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알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것이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찾다가 사랑을 할 수도 있고, 사랑을 하다가 진리를 찾을 수도 있다. 일종의 변수. 사람의 수만큼 존재하는 변수. 사람들은 자신의 변수를 찾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 공연 역시 자신들 만의 변수를 찾아가는 과정의 하나 일 수도 있겠다. 그 변수를 찾기 위해 긴 노력을 하는 과정 속에서 아마도 변수는 우연처럼 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필연일 것이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행위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콘텐츠 개발 시범사업팀 <플러스 원>
2010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
8.13-14 산울림소극장


1 공연은 세 가지 상이한 장르와 공간을 탐색하는 병렬식 구조의 에피소드이다.
공연 후에는 관객 참여형 워크숍을 진행한다. 이로써 적극적으로 관객과 상호작용하며 개선점 제안을 통해 새로운 발상을 공유하는 과정적인 퍼포먼스이다.

각각의 병렬식 에피소드는 독립적으로 보이면서도 또한 상호 연결가능한 지점을 구성하고자 한다.

1. XY가 만났을 때 : 부부는 그림자의 환상공간에서 부부싸움을 한다. 이 일상적 유치함이 미디어 인터랙션을 통해 새롭게 표현된다.

2. 인형의 방 : 인형은 이동하는 방을 타고 도시를 항해한다. 그 방은 생활공간이며 환상 공간이며 기록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인형은 도시민들의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관찰하며 방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그리고 마그리트 카페라는 미지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3. 마그리트의 카페 : 마그리트 카페는 초현실적 공간, 사람과 사물, 미디어 사이의 상상적 공간을 퍼포먼스를 통해 탐험한다. 이러한 탐험의 결과 익숙히 알고 있던 공간이 다시 씌여져 새롭게 다가온다.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