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물화, 우리의 기억의 습작 <정물화>

2012. 10. 23. 19:38Review

 

제12언어스튜디오 <정물화>

정물화, 우리의 기억의 습작

유미리 작/ 성기웅 연출

글_김송요

 

 

수채화를 그릴 때 제일 좋아하던 것은 붓자국이었다. 물을 많이 타서 배경을 투명하게 비치도록 붓질을 하다 보면, 그 붓질의 종점에 물이 둥글게 맺혀 자국으로 남는다. 그 흔적이 가장 특별해지는 것이 수채 정물화를 그릴 때다. 정물화가 창의성을 요구하는 그림은 아닐지언정 수채물감으로 그것을 칠하고 나면, 원래 정물의 질감과는 별개로 만들어지는 물맛이라고 할까, 무언가 새로운 운치가 풍겨 나오는 것이다. 석고상부터 과자 봉지하며 콜라병까지, 그 무엇을 그려도 물비린내가 정물의 위를 덮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누가 그려도 마찬가지였던 그 윤색된 세계와 조우한 것도 고등학생 시절이 마지막이다.

이 연극은 <정물화>다. <정물화>는 암전 상태에서 울려 퍼지는 소녀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사과나무 꽃잎이 쉬지 않고 흔들리고 있는 그런 계절이었다.” 나나코다. 나나코의 얼굴이 어느 순간 들어온 햇빛을 받아-물론 극장 내부는 인공광으로 밝혀져 있다-잔잔하게 빛나고 있다. 나나코가 적는다. “상쾌한 아침바람이 목고리를 풀어헤친 내 목덜미를 차갑게 도려낸다.” 맑고도 선뜩한 문장이다. 나나코는 계속 적는다. “개는 개들과 함께 잠잔다. 꽃은 꽃들과 함께 잠잔다.” 4월의 마지막 날, 이곳은 여자고등학교의 문예부실이다. 정물화는 그렇게 다시금 나를 고등학교 교실로 돌려보낸다.

 

 

다섯 소녀가 있다. 치하루, 나츠코, 카오리, 후유미, 그리고 나나코. 다섯 소녀의 세상은 가톨릭 여학교의 문예부 동아리방, 커튼을 치면 전부가 어두워지고 커튼을 걷으면 전부가 밝아지는 좁은 세상이다. 창밖의 풍경이 정물화처럼 박제되어 보이듯이, 창문 안 쪽 소녀들의 세상도 누군가에겐 정물화처럼 고정된 장면일 테다. 너른 창을 통과하며 이지러지는 햇살이 물그림자처럼 소녀들의 공간을 에워싸고 있다. 나나코(魚子)를 제외한 네 사람의 이름엔 차례대로 춘, 하, 추, 동 네 계절을 뜻하는 한자가 들어 있다. 나나코만이 심연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이름을 지녔다.

소녀들은 뜬구름 같은 소문들에 집착한다. 중병을 앓고 있다는 교장선생님이나, 교정을 떠돌고 있다는 귀신들에 대한 소문. 그늘 한 점 없어 보이는 여고생들이건만, 틈만 나면 하는 이야기가 연애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것이다. 아이들은 과학실에서 실험도구를 가져와 사랑의 묘약을 만들지만, 묘약은 사과나무 가지에 목을 매 자살한 소녀 귀신에 대해 떠들다가 연기를 뿜으며 망가지고 만다.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 교교한 적막을 깨뜨리는 것 역시 귀신의 바이올린 소리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유리알처럼 찰랑거리며 수다를 떨던 소녀들이었음을 얼떨떨하게 되새겨 본다.

 

 

 

이 연극을 보고 울었다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아마도 이 이야기에 실재하는 사건으로서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연극 전반에 장막처럼 드리운 죽음-조금 더 정확히는 ‘소멸’의 그늘 때문일 것이다. 소녀들이 거듭 말하는 임종의 징조, 자살의 광경, 망자의 유령은 그 간접적 표현이다. 직접적으로 ‘소멸’과 닿아 있는 것은 소녀들 자신이다. 태어났다는 것은 이미 죽음을 예정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소녀들은 그 사실을 내심 마음속에 품고 있다. 소멸의 두려움은 ‘지금 이 순간을 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다. 나츠코가 말한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도 몇 년이 지나면 앨범 속 사진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 안 나는 일이 되는 걸까…….” 서로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문예부실에 머물렀던 이 소녀들을, 소녀들의 존재를, 그들이 직조했던 영롱한 순간들을 증명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부재(不在)에 대해 당장 할 수 있는 현실적 고민이다. 두려움이 더 커다란 부피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음 순간, 소녀들이 직접 쓴 유서를 낭독할 때다. 어째서인지 아이들의 유서는 한참 뒤 노인이 되었을 때의 시점이 아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입장에서 쓰였다. 소녀들은 죽음을 실감한다.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의 형체를 확인하고 서글피 운다. 휘발되고 말 이 순간을 애도하면서. 이 아름다운 십대 시절의 나날들은 교정에 와르르 떨어지는 사과꽃잎처럼 흩어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말하듯, 언제나 ‘고통보다는 고통의 예감이, 패배보다는 패배의 예감이, 페스트보다는 페스트의 예감이, 사랑보다는 사랑의 예감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그것은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것만이라도 알았으면……” 가출한 고양이 안소니의 행방을 찾는 치하루의 이 말은, 어쩌면 이처럼 더 커다란 상실에 맞서기 위해 준비된 한탄은 아니었을까.

 

 

수채 정물화 말고도 익숙한 정물화가 하나 더 있다. 17세기 북유럽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가 그것이다. 바니타스는 ‘덧없다’는 의미의 라틴어로, 바니타스 정물화는 일시적 즐거움만을 주는 세속적 재화들과 더불어 썩어가는 것, 문드러지는 것, 죽어가는 것들을 그려 보여준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가 바니타스 정물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모든 것은 언젠가 스러지기 마련이다. 아, 그러니까, 정물화는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게끔 하는 매개였던 한편 모든 스러지는 것들을 박제하는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침핀으로 찔러두고 싶은 시간,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바스러지거나 짓무르는 이 시간. 죽음이라는 가혹한 최후만을 생각하기에는 잔인할 만큼 아름다운 이 시간을 우리는 정녕 울며 보내야 하는 걸까.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조바심을 딛고 결심했다. 기억하면 된다, 그 사랑스럽던 시간들을 애써서 기억하면 된다고.

 

 

그래서, 어쩌면. <정물화>는 마냥 모질게 우리를 ‘메멘토 모리’ 앞으로 몰아세우는 연극인 것만은 아니다. 다섯 소녀들을 통해서 나는, 그대는, 우리는 우리의 소년기로 돌아가게 된다. 마주닿은 맨무릎이 그렇게나 어여쁜 것이었음을, 내가 그 시간에 앉아 있을 적에는 몰랐었다. 소설책을 소리 내어 읽을 일도 없어졌거니와 누군가와 같은 구절을 낭독하면서 뺨 안쪽으로 낭랑하게 진동하는 음파를 느낄 일은 더더욱 줄고 말았다. 연극은 그 메시지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장면’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시절과 아름다운 미소, 아름다운 말들을 보여준다. 비수처럼 예리하고 늪처럼 뭉근했던 사춘기를, 잠가루를 뿌리고, 혁명을 일으키고, 꽃을 피웠다 지게 하는 4월의 광휘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게 해 준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작은 희망이 피어나는 것이다. 더 이상 그 시간에 머물 수 없을지언정 그 시간을 기억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믿어 보는 것이다. <정물화>가 불러낸 나의 옛 교실을 헤엄치며 믿어 보는 것이다.

‘기억의 습작’으로서의 정물화도, 틀림없이 아름다울 테지, 하고.

 

  

  필자_김송요

  소개_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 호기심도 애정도 욕심도 많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혹해 대학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습니다. 꾸준히 감각의 그릇을 키워서 넉넉한 감정을, 이야기를 고봉으로 담아내고 싶습니다.

 

 

   

    배우_전수지, 서미영, 류혜린, 김희연, 박민지, 천정하, 김누리   

    작가_ 유미리(柳美里)

    번역/윤색/연출_ 성기웅

    10월 5일~28일, 선돌극장 / 평일 8시 / 토요일 3시, 7시 / 일요일 3시 (월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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