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 2014의 장면들1-한유주 작<자연사 박물관>,<한탄>

2014. 5. 12. 22:11Review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 2014의 장면들 1

쓰고, 쓰이고, 읽고, 읽히는, 모든 ‘말’들의 생사

한유주 작 <자연사 박물관>, <한탄>

 

글_유햅쌀

 

1. 최초의 ‘쓰기’

어쩌면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은 한편으로는 과잉된 믿음, 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불변의 진실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텍스트에서 시작한다, 라는 믿음 말이다. 누가 그것을 부정한다 할지라도 이번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에서 택한 한유주와 박솔뫼의 ‘소설’과, 그것을 종이에서 무대 위로 옮겨놓은 ‘극’의 목격자인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믿는다. 종이 혹은 종이 비슷한 어떤 무엇에 기록되는 활자들이 피어나고 비틀어지고 자라나고 죽은척하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하면서 예술의 장면들이 시작된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으므로-종이에 ‘쓰이는’ 소설이나, 무대 위에 ‘쓰이는’ 연극이나, 그것은 어찌됐든 텍스트라는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 믿음을 잠시나마 말로 옮겨 적어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최초의 쓰기와, ‘쓰인’ 것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인 읽기와, 모든 읽기에 수반되는 말하기, 발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동시에 쓰기로부터 발화에 이르기까지의 난해함과 곤혹스러움, 지난함의 과정을 목격한 목격담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이 “소설 쓰기 자체의 문제에 천착”하는 소설가 한유주와 박솔뫼를 택한 것은 다시 한 번, 읽기와 쓰기와 말하기라는 소설적인, 또 연극적인 무엇에 근접하려는 실험이라고 다시 ‘말’ 해야 할 것 같다.

‘2014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을 다룬 두 편의 글을 쓰면서, 나는 소설을 그대로 무대 위로 가져오려는 이 시도의 목적이 말하자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다시 모든 감각의 영역에서 어떤 성취를 얻었는가, 혹은 실패했는가에 대한 것들을 언급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쓰기의 목적이 한편으로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들은 내뱉는 순간 쾌와 불쾌의 이분화된 감각으로 침투하거나 ‘말’의 영역에 갇혀버릴 수도 있으며, 그것을 감정하는 것은 실로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내가 쓰고 있는 동안에도 지구 어디에서는 온갖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들이 가능한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다가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써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 도달하면 다시금 의기소침해져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을 살포시 내려놓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이 소설은 왜 낭독되었는가?’, ‘어떻게 낭독되었는가?’, ‘왜 낭독되어야만 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면 다시 어떤 난관에 빠져든다.

 

 

2. 한유주 - 자연사하는 말들, 소설이라는 허구의 윤리

한유주는 한국 문단에서 ‘쓰기’에 대한 실험을 멈추지 않는 작가다. 실은 한유주가 쓰는 것들은 그것을 완벽한 서사성을 갖춘 소설이라고 부르기 곤란할지도 모른다. 한유주 식의 기다란 문장과, 문장 사이를 쉼표로 간간히 멈췄다가 이어가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 자체의 불가능성’이며, 한 편으로는 ‘허구’라는 소설적 근원의 문제를 파고드는 어떤 윤리관에 대한 끈질긴 성찰 같은 것이다. 때문에 한유주의 소설을 읽을 때 마주치는 어떤 당혹감들은 낯설음이라는 감각의 영역에서 비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중첩되기도 한다.

한유주의 <자연사 박물관>을 예로 들자면, 머릿속에서, 노트북 위에서, 글자 입력 프로그램에서, 혹은 펜 끝에서, 그리고 혀끝에서 맴도는 ‘말’들의 은밀한 생, 그리고 죽음(자연사). 이 모든 것을 부단히 쫓아가려는 작가의 여러 난관, 어떤 난해함을 수집하는 행위, 이로부터 자연사한 쓰기와 말하기를 수집해 놓은 박물관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사건이다. 그래서인지 한유주를 읽어 내려갈 때면 도대체 무엇이 사건이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막막한 느낌이 활자의 공기를 가득 채운다. 게다가 이 사이에서 ‘왜’라는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자인 ‘읽는 나’와 작가인 ‘쓰는 나’ 사이에서 무한 증식하는데, 그런 감각들, 쓰고 읽고 쓰이고 읽히는 시공간 사이에서 ‘말’들은 뒤엉켜 은밀하게 태어나고 죽는 것이다. 여기에 ‘쓰기 위해’, ‘써야 하므로’ 살아가는 작가의 자의식이 겹치는 순간 발화되는 ‘말’들은 근원을 향해 돌진하기도 한다.

나는 처음 이번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을 지극히 메타적인 것으로 읽어냈다. ‘2014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이 한유주를 택하면서 자연스레 그 목표를 소설에 대한 소설, 연극에 대한 연극, 쓰기에 대한 쓰기, 읽기에 대한 읽기에 대한 ‘말’의 성질에 파고들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은 영화 <인셉션>의 거대한 차원들처럼 얽혀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어쩌면 이것을 그렇게 읽어내는 것이 너무도 표면적이라는 생각을 만나고 말았다. 그래서 때로는 <한탄>을 쓰기 위해 ‘한탄강’을 찾은 <한탄>의 인물처럼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한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박솔뫼의 소설들을 만났을 때에도 조금은 다르지만 어쩌면 같은 지점에서 그 안에서 난관들을 끊임없이 만났다. 그 난관들은 비선형적이고도 혼란스러웠으며 온갖 말들로 가득 차 팽창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한유주 식으로- 써야만 한다면, 말해야만 한다면, 비록 그것이 불가능성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어떻게 될지언정 무엇인가 이렇게 써보는 것이다.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의 ‘말’들에 대해 ‘말’하는 것, ‘말’에 대해 ‘쓰’는 것, 그런 ‘말’들의 집합이 ‘말’하자면 이 글이 될 것이다.

 

 

3. Born To Die_한유주 작 <자연사 박물관>_윤성호 연출

<자연사 박물관>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그리고 나는 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쓸 것이다. 무엇을? 무엇을.” (한유주, 「자연사 박물관」,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p.110)

이렇듯 <자연사 박물관>은 ‘쓰기’ 앞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시간은 ‘죽음’으로 흘러갈 것이고, 따라서 모든 ‘이름들’은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자연사’ 하고 말 것이라는 필연성에 대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 필연적이면서도 은밀하게 일어나는 ‘생’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빌려오기로 결심한다. 태어나 배우는 모든 말이 다른 이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므로.

말하자면 <자연사 박물관>은 차용의 시공간에서 ‘허구’로 창작된 픽션의 윤리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쓰기’와 ‘말하기’가 지닌 근원적인 뿌리-창작-에 대해 질문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이 작품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베꼈다’고 말하고 있지만, ‘베꼈다’는 어쩌면 윤리적인 고백은 ‘쓰기’를 위해 철저하게 고안되고 발명된 것이며, ‘죽음’에 대해, ‘자연사’에 대해 쓰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베끼는 행위’가 계속될 때마다 말은 사라지면서 다시 태어난다는 새롭게 태어나는 창작의 어떤 지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자연사’를 맞이할 대상이 바뀌는 듯하면서도 고정되어 있고, 그 이름들이, 이름들이 포함된 문장이 끊임없이 길고 길게 연장되는데, 그 문장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해서 ‘~할 수 없다’라는 반대되는 심상들로 무화되고 만다. 그럴 때마다 말들은 모였다가 흩어져버리면서 새로운 ‘자연사’할 ‘말’들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쓰기’는 극 속에서 창작된 인물들, ‘낭독극’ 속 세 명의 인물들에게 배분되고, ‘읽기’와 ‘쓰기’를 멈추지 않는 세 명의 배우들은 자리를 바꿔가며 쓰고 읽고 연기한다.

무대 위에 흩어진 종이들이 있다. 종이 위에서 하나이자 셋이자 무한대인 배역-이름들은 사건을 조립하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한다. 그들은 ‘쉼표’와 ‘마침표’라는 문장부호를 ‘말’ 하면서 소설을 끊임없이 써 내려가는데, 무대 위 ‘작가’를 연기하는 작가의 노트북 위에서도, 바닥에 수북이 깔린 흰 종이 위에서도, ‘쓰기’의 난관에 봉착하는 작가의 여러 분신으로 ‘말’을 빌려 등장한다.

작가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베껴 쓰기로 결심한 뒤에도 그들은 새로 펼쳐진 바덴바덴의 덴버 강가 위에서 끊임없이 쓰고 쓰인다.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 속에 등장하는 작가 주인공 ‘트리스탄’이 쓰는 소설 「겨울 여행」이 쓰이고 있으며, 그 속에서도 여전히 또 다른 인물 ‘토마스’와 여성용 외투를 입은 사람 ‘햄릿’의 죽음에 대해 발화되고 있다. ‘베껴 쓰기’를 결심한 작가 앞에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으므로, 결코 그 책을 참고할 수는 없다는 어떤 난관은 멈출 줄은 모른다. 다만, 참고할 수 없으므로, 완전하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므로 계속해서 ‘쓰기’ 위해 종이를 건져 올릴 뿐. ‘건져 올린다’는 행동만이 ‘말’과 근접하게 ‘쓰기’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며, 어느 한 편으로는 말을 연장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명의 화자이자 동시에 다수의 화자에게 건져 올려진 종이들은 ‘이름들’의 ‘생’을 연장하는 행위로 다시금 발화된다.

이들이 써내는 사건들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사라지면서, 또 공간과 시간 속으로 침투하면서, 그 사이에 필연적으로 ‘죽어야만 한다’ 혹은 ‘죽여야만 한다’는 이 작품 쓰기의 본질적인 목적이 스며든다. 그리하여 소설 밖에서, 소설 속에서, 소설 속 작가가 쓰는 소설에서, 또 그 소설에서 ‘쓰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동시에 ‘쓰기 위해’ 번뇌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써야 한다’고 명 받은 운명의 굴레를 뒤집어 쓴 ‘쓰기의 구도자’처럼 행동하는데, ‘쓰기의 불가능성’을 타파하는 것이 그들의 소명인 것처럼 쓰기를 향한 거대한 자의식은 멈출 줄을 모르고 증식한다. 이들의 ‘쓰기’에 대한 물음이 ‘쓰기의 윤리성’을 향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허구적인 인물을 ‘쓰’면서 ‘쓰인 말’로, 혹은 ‘읽기’로 살인해도 되느냐는 윤리적인 질문.

이 지점에서 ‘낭독’된 <자연사 박물관>의 난해함이 팽창된다.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콘셉트화 한 한유주 식 글쓰기가 말하려는 최종적인 목표가 언어로 된 것의 불가능성,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소설적인 실험이라면, ‘극’으로 표현된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소설적이면서 게다가 연극적인 ‘말’에 대한 실험도, ‘왜’라는 질문도, 질문에 대한 답도 상당수가 결여되어 있다. 무대 위로 옮겨진 작가의 자의식이 공연장 안에 울리는 ‘극’의 ‘대사’들 사이에서 갇혀버린 나머지, ‘과잉’된 감각들만 남아버린 것이다. 수북하게 쌓인 종이 위에서 소설의 ‘말’들이 자연사를 향해 달려가지 못하고 스러져만 가는 어떤 안타까움이 맴돌았다.

 

 

4. 교착상태에서 살아나는 어떤 텅 빈 것_한유주 작 <한탄>_전진모 연출

<한탄> 역시 <자연사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쓰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서술이자, ‘죽음을 쓰기’에 대한 탐구이다. 쓰지 못하는 것을 쓰기 위해 작가는 쓰고 무력한 담배와 쓰고 단 커피를 찾다가 ‘한탄강 얼음 트래킹’에 나선다. 앞서 <자연사 박물관>이 제기한 ‘쓰지 못해 생긴 교착상태’는 <한탄>에서 심화되기에 이른다.

쓰지 못해 생기는 교착은 무대 위에서 불협화음으로 이어진다. 쓰기 위해 찾은 얼어붙은 한탄강과 한탄강의 주상절리를 관찰 할 때마다, 그러면서도 쓰지 못한다는 어떤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고속도로 위에서 차들의 속도를 마주 할 때마다 배경 음으로 깔리는 현의 ‘끼익’ 소리가 심화되면서, 연기하는 세 명의 배우들은 종이를 여기저기 흩날린다. 때로 종이들은 한탄강의 두꺼운 얼음으로, 독수리로, 신발로, 작가의 분신으로 변신하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쓰지 못한다’는 팽팽하고 무거운 중압감이 모든 말들을 짓누르고 있으며, 그 중압감은 수많은 오브제들로 변신하던 종이들을 마지막에는 모두 무대의 바닥으로 가라앉게 한다.

결국 이 모든 교착상태는 속도를 사라지게 하고, 죽음을 맞이한 어떤 것에게 ‘죽기 전 관계하던 모든 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하게하며, 소유권을 상실한 그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고 흩어진 텅 빈 것으로 무화된다. 쓰기와 읽기, 더 나아가 낭독의 ‘말’은 그렇게 교착상태에서 흩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들이 <한탄>에서도 마찬가지로 미리 그렇게 느껴지도록 계획된 것이기도 하면서 한유주의 단편소설 ‘낭독’을 기반으로 한 ‘낭독극’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난해한 것으로 만드는 요인으로 심화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잠언’의 형태로 생각을 나열하며, 나열 속에서 끊임없이 쓰기의 본질을 탐구하고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또 이미 ‘쓸 수 없다’고 미리 선언한 한유주의 소설을 무대 위에 올려 ‘낭독하는 극’의 형태로 다시 만들어 읽을 때, 이미 달라져 버린 매체성으로 인해 연극 속에서 이미지화된 무엇이 원래 작가가 의도했던 ‘쓰기의 불가능성’이라는 층위는 오히려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어버린다. 연극을 구성하는 대사를 소설의 문장을 해치지 않기 위해 각각의 인물들에게 소설의 문장을 할당해 대사처럼 분배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혼종적으로 뒤섞여 있을 때 발생하는 모호함 역시 앞서 제기했던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자 자체에 기반을 둔 ‘소설’이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이 시도하는 것처럼 문어체 문장이 대화처럼 표현될 때, 하지만 대화처럼 느껴지도록 무대 위에서 약속된 그것이 여전히 구어체 아닌 문어체일 때 만나는 어떤 난해함은 관객들과의 소통문제로도 이어진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한유주 소설의 특징적인 ‘서사 옅음’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서 연출된 연극의 어떤 지점들, 또 원작 소설의 난해함이 ‘소설’에서 ‘극’으로의 변화에 있어 충실히 그 목적을 성취했느냐의 문제로 다가올 때, 완벽하게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렇다’고 답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쓰지 못하므로 계속해서 써보려 한다’는 한유주의 소설. 그것을 무대 위로 옮겨와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면서도, ‘쓰지 못하는 어떤 교착상태’를 낭독하면서 극이라는 장르를 빌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대 위에 ‘극’을 써내려는 난관은 소설 쓰기와 같은 난관일까. 그렇다면 다시, 왜 한유주의 소설인가, 같은 질문들이 다시 맴돈다.

 

*사진제공_제12언어 연극스튜디오

**제12언어 연극스튜디오 SNS페이지 바로가기 >>> https://www.facebook.com/12thTTS

***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 2014’의 장면들에 대하여 2 리뷰 바로가기

 

 필자_유햅쌀

 소개_시트콤같은인생살이를위해, 재미진무언가를찾습니다. 인간은유희적동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