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낭독극장에 대한 소고(小鼓) -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입체낭독극장

2014. 5. 12. 01:33Review

 

낭독의 슬픔

- 낭독극장에 대한 소고(小鼓)

<자연사박물관>,<한탄> : 제 12언어 연극스튜디오

 

글_정진삼

 

▲ <한탄>(한유주 작, 전진모 연출)중 한 장면 (사진제공_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1.

읽는다. 읽는다, 를 소리 내는 배우들을 본다. 읽는다, 를 소리 내는 배우들을 본다. 는 문장을 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그때 거기, 훗날 저기, 산울림 극장에서, ‘읽. 는. 다’ 를 소리 내며 말했던 그들을 모방하며 말한다. 모방하며 말하면서 생각한다. 모방하며 말하면서 생각하며 쓴다. 똑-같은 톤으로 똑-같은 제스처로 똑-같은 텍스트로, 존재가 아니라 역할을, 역할이 아니라 인물을, 발화하고 있었던, 그 때 거기의 무대를 상기한다. 똑-같은 톤으로 말하였기에 기억에 남은 것은 많지 않다. 기억에서 끄집어 올리지 못하면 비평(批評)은 비평(非評)이 되거나 비평(悲評)이 된다.

슬프다. 낭독의 슬픔이다. 무대에서 모든 것을 말하려는 자. 그대가 있어서. 행동의 모방이 아니라, 모방의 행동을 하려는 자. 그대가 보여서. 오늘날 이것은, 미완의 기획으로 진행되는 다원예술의 존재양상이 된다. 앞날을 몰라 헤매는, 눈 먼 시대의 젊은 연극의 슬픈 자화상이 된다. 그래서 이것은 낭독의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다. 이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낭독의 슬픔이다. 

 

2.

이 연극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가능성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소설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낭독에 대해 말해보자. 이 낭독은 읽기의 한 방식이다. 낭독은 기본적으로 호흡을 주며 읽기를 수행한다. 그래서 의미는 정확해지거나, 되살아나거나, 강조된다.

엄밀히 말해 낭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읽어내는, 읽어 내려가는, 읽어서 다시 돌아오는, 그래서 온전한 읽기로서, 혹은 다양한 읽기로서, 관객들의 뇌리에 박히고 마음에 새기는, 도구다. 그리하여 낭독은 눈으로 읽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입체적인 ‘이해’ 의 과정이 된다. 이와 더불어 낭독은 문자-텍스트(글)를 구술-담화(말)로 복원시키는 ‘퍼포먼스’ 적 행위다. 묵독은 상상의 차원이지만, 낭독은 실제의 영역이다.

낭독을 거치면, 이야기적-소설에서 글은 대화로, 사상적-소설에서 글은 선언으로, 내면적-소설에서 글은 독백으로 복원된다. 그러나 문. 체. 적. 소설에서 글은 말이 됨으로써 어색해진다. 머릿속에서 울리던 ‘사운드’ 는 누군가의 입을 빌어 뻘줌하게 출현할 것이고, 특정-작가의 고유성은 축소될 것이다. 오로지 이를 무대-배우의 개성으로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한다. 

슬픔의 전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낭독의 대상이 된 소설은 문체적 문제소설이거나, 문제적 문체소설이었다. 배우들은, 그것을, 읽어내야만 했다. 문제를, 혹은 문체를. 

 

3.

앞서 낭독에 대해 말했으니, 소설에 대해 말해보자. 문제적-소설의 임자인 한유주의 소설은 다시 ‘소설가 소설’ 로 풀이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은 사람이 이야기를 쓸 수 없는, 변명을 나열하는 글쓰기다. 해명을 굳이 감추는 글쓰기다. 작가는 작가로 위장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말이 썩 ‘안 되는’ 이야기를 위장서사로 하여,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여기서 소설-서사 속 인물들이 하는 말들은, ‘말해지더라도’ 딱히 대단한 의미를 건축하지 않는다. 다만, 한편으로 어떤 ‘정황들’ 은 증폭된다. 왜, 소설 속 작가는 쓸 수 없는지. 왜 소설 속 작가는 쓸 수 없음을 변명하는지. 그럼으로써, 왜 소설 밖 작가는 그러한 쓸 수 없음의 변명을 통해 이야기의 완성을 거부하는지. (그것은 어떤 면에선 대단히 멋진 일이다!)

그녀의 소설은 글의 흐름에 따라서, 글의 운동성에 따라서 제 멋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의미를 적재하지 않을 뿐, 말들은 아주 천천히, 전혀 다른 리듬으로 독자들에게 '상황' 을 이해시켜 나간다. 멋대로 흘러가지만, 무엇인가를 쌓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녀의 독자들은 소설에서 그것을 오랜 적응기간을 통해 파악했고, 고로 적응했고, 심지어 그것을 즐긴다.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겼다가, 쉬었다가, 다시 읽었다가, 혹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고, 읽고, 듣는다. 기어이, 이해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대단히 멋진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독서' 행위와 단체적인 '관극' 행위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령,  여기에 그녀(한유주)를 아는 독자가 있다. 그는 소설을 알지만, 연극에 대해서는 모른다. 흘러가는 시간을 '함께 하는 것' 에 대해 능숙치 않은 독자형-관객이다. 가령, 다시 여기에 그녀를 모르는 관객이 있다. 그는 연극을 보지만, 소설에 대해서는 모른다. 의미를 쌓아나가지 않는 서사에 대해 익숙치 않은 관객형-관객이다. 이 작품은 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이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궁금해지는 순간, 슬픔은 만조가 되어 밀려들어 왔다.  

 

4.

무대 위 배우들은 "쓰는 존재" 의 역할을 부여받고, "쓰는 존재" 를 연기한다. 기술자(技術者)로서의 기술자(記述者)를, 기술(奇術)적으로 연기하고 있다. 쓰는 존재를 말하는 존재가 연기한다. 소설에서 쓰는 존재가 하는 말이란, '나는 쓰는 존재인데, 쓸 말이 없다' 는 식이다. 그러니까 "말하는 존재" 인 배우들은, 작품 속에서 쓰는 존재가 '나는 쓰는 존재인데, 쓸 말이 없다' 라고 하는 말을 반복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배우의 연기술’ 은 ‘작가의 복화술’ 로 수렴된다.

서사의 인물들이 직면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확신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모두 역설적으로 글을 '잘' 쓰고 싶어한다. 배우가 정립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작가성' 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 모순적 욕망은 드라마를 만들지 않고, 갈등을 구현하지도 않는다. 유일하게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는 그 힌트(모순성)는, ‘사건’ 에 사용되지도 않으므로, 딱히 - 성격구축을 해봐야 - 쓸 데도 없다.

여기서 그 욕망은 “제기랄, 나는 쓸 수가 없어!” 라고 무한반복하면서, 쓸 여지를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작가(auteur)의 애티튜드(attitude) 정도가 될 뿐. 게다가 잘들여다보면 이것은, 세속적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예술적 인간의 양심이다. ‘연기’ 로 보여지지 않는/보여질수 없는 윤리의 세계다. 결국, 이 작품은 ‘작가라는 존재’ 에 대해 심도 있게 설명하기 위해, ‘배우라는 존재’ 의 심급없는 연기를 사용하고야 만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원-텍스트에서 말하고자 했던 작가의 에티카(etika)와도 어긋난다. 현실을 도구화-하려던 ‘작가술’ 의 고발을 위해, ‘연기술’ 은 최종적으로 도구화-되고 마니까.

 

5.

그리하여 나는 이 작품을 ‘극(작가)극’ 이 아니라 ‘극)작가(극’ 이라고 명명한다. ‘작가’ 는 극 사이에 존재하나, '극' 이 품은 존재가 아니라, '극' 을 밀어내고 있는 존재가 된다. 작가의 죽음을 맞이하여 드라마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연극이, 모두가 함께 쓰는 텍스트를 동력(動力)으로 삼는 동시대 연극이, 그 ‘죽음’ 과 '함께' 의 의의를, 자기-지시적으로 해석하거나, 자기-의미적으로만 활용할 때 벌어지는, 기이한 소외현상이라고, 판단된다. 그리하여 ‘극)작가(극’ 은, 그 만연한 작가-작가성으로, 관객을 밀어내고, 배우를 밀어내고, 인간을 밀어내고, 현실을 밀어낸다.

한탄강(漢灘江)이라는 소재지로 인해, 이 텍스트의 세계는 한국(韓國)이 되는가? 극 속의 작가가 발을 디디고 선 이 땅은 도대체 어디인가? 세상이라는 이름의 극장인가? 가상의 예술-세계인가? 햄릿과 트리스탄은 바로 그러한 세상에 살았던가? 그와 그녀도 모두 이야기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이들인가? 고로 이들은 인간입니까? 유령입니까? 인간인 척하는 유령입니까? (둥!)

연극입니까, 문학입니까. 재미입니까, 의미입니까. 낭독으로 당당해지는 그 연극-스러움이, 연극으로 왜소해지는 그 낭독-스러움이 교차하는, 이 공간은, 극장입니까, 독방입니까. 사사로운 사소설입니까, 공공적인 공공연입니까. 그리하여 한유주의 텍스트는 연극의 샘플링입니까, 콜라보레이션입니까. 디에제시스입니까, 미메시스입니까. 그렇다면 이 연극에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을 참입니까. (둥!)

소설가 소설은 낭독극장에 어울렸습니까. 배우들이 글을 말할 때 호흡엔 무리가 없었습니까. 문체적 의도와 발화적 의도는 일치합니까. 배우의 해석이 들어간다면 어떤 해석이 들어갔습니까. 소설 속 작가가 '말 할 권리' 와 연극 속 작가가 '말을 듣게 할' 책임을, 창작자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소설의 작가가 ‘소설을 위해’ 끊임없이 분열된 상태로 두려고 했던 ‘작가’들을, 연극의 연출가가 ‘연극을 위해’ 일거에 통합하고 현존된 상태로 붙잡아 두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까. 텍스트를 통해 서브-텍스트를 보고 들을수 있었던, 연극은 어디에 있습니까. (둥!)

 

6.

앞서 낭독과 소설과 연극에 대해 말했으니, 이제는 가능성을 말할 차례. 

서양연극의 고전주의식 극작에서도 등장인물들은 흘러간 사실에 대하여 ‘서술체’ 로 이야기했다는 것. 서사극에서도 등장인물들은 극의 전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서술체’ 로 제시했다는 것. 끔찍한 것, 격렬한 것, 폭력적인 것을 넘어, 그만큼이나 격렬한 개인의 고뇌를 무대 위에 구현하기 어려울 때 ‘서술체’ 가 된다는 것. 그러니 도래할 일(행동)들을 미리 말하는 것 또한 ‘서술체’ 라는 것.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극을 연습하는 극중극에서 대본을 읽는 식도 일종의 낭독극이라는 것. 글쓰기도 물질성이 있다는 것. 의미놀이도 놀이라는 것. 현대구어체와 현대문어체는 결국 연극의 언어가 된다는 것. 진부한 '언어의 해체' 처럼 보이지만, 실은 진정한 '언어 구조의 해체' 라는 것. 이 연극은 소설계에서의 언어 실험이 연극계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음’ 을 ‘증명’ 하는 것. The ‘Go’ must ‘show’ on!!

 

7.

2000년 된 장르와 200년 된 장르가 함께 간다. 왜 200년 된 장르에게 2000년 된 장르가 함께 갈 것을 권유했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일지도 몰라. 허나 포스트- 로 많은 걸 설명하는 건 지리한 일이며 우울한 일이지. 무대에서 모든 것을 말하려는 자. 그대가 있어서. 행동의 모방이 아니라, 모방의 행동을 하려는 자. 그대가 보여서. 오늘날 이것은, 미완의 기획으로 진행되는 다원예술의 존재양상이 된다. 앞날을 몰라 헤매는, 눈 먼 시대의 젊은 연극 ‘들’ 의 슬프고도 난해한 초상이 된다. 고로, 이를 낭독의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이라 명명-했다.

다만, 아직은 남은 가능성의 이유로, 낭독공연에 대해 우려의 경종을 울리는 대신, 소고를 두드리고자 한다. (둥둥둥.) 형제여,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둥!) 사고가 없는 곳에 의문도 없다. (둥!) 기대가 없는 곳에 슬픔도 없다. (둥!) 그래서 이 글은 제법 무리하게 쓰여졌다. (둥!) 이 때의 글은 필경, 비평(非評)이 되거나 비평(悲評)이 될 것이다. (둥!)  

 

▲ <자연사 박물관>(한유주 작, 윤성호 연출)중 한 장면 (사진제공_제12언어연극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