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5. 13:54ㆍLetter
혁명의 시나리오
▲2014년 4월 19일 광주에서 공연되었던 리미니 프로토콜 <100%광주>의 출연진들
2014년,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예술가들이 품게 된 생각은 아마도 ‘혁명’ 에 대한 가능성이었을 것이다. 예술가와 예술계에 큰 도움되지 않는 정치권력, 젊은이들과 다양한 씬의 생성을 막아서는 기성세력, 관객들과 애호가에게 무례한 기업자본. 이러한 막강한 ‘힘’ 들에 대항하고자 젊은 예술가들은 그들의 ‘자력(自力)’ 을 합치려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언급했던 것들 중 제일 약한 ‘기성세력’ 이 첫 번째 타도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른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예술가 연대가 다양한 방식으로 꾸려지고, 기성 예술계의 전복을 실행하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일단 예술가로서의 생존(生存)에 관한 것이며, 그 다음은 예술가의 활동(活動)에 대한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젊은-예술가들은 연대를 통해 그간의 억압을 떨쳐내고, 늙은-예술-권력을 타파하려는 계획을 호기롭게 세웠을 것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혁명의 5월’ 은 올해엔 ‘반드시’ 이뤄지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앞서 ‘세월호 참사’ 가 벌어졌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참사 직후 젊은 예술가들을 괴롭게 했던 것은 저항의 칼날이 무디어짐이 아니었으리라.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세상의 이치를 더욱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 ‘한국’ 이라는 사회의 ‘무기력함’ 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가들은 이렇게 다시 읊조렸을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 한국에선 더 빨리. 덜 행복하게.” 동생들, 후배들, 제자들이었을 어린 생명의 소멸 앞에서, 예술가들은 베갯머리에 눈물을 적시며 웅크리며 잠을 자고 악몽을 꾸었다. 그렇게 혁명은 무기한 유예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을 것이고, 아마도 예술가들은, 연대하는 대신에 서로를 조금씩 위로했을 것이다. 혁명 때 보태려고 했던 작업들을 조금씩 추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모았을 때는 거대한 능력이었겠지만, 흩어놓으니 겨우 눈에 밟히는 한줌의 중력이었으리라. 하지만, 혁명은 지나갔다. ‘절호(絶好)’ 의 기회였을, 그 시간에 예술가들은 우리가 타도해야 하는 대상도,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 대상도, 그리고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이 땅에서 ‘덜 행복하게’, ‘더 빨리’ 죽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을 뿐.
슬픔의 유효기간은 혁명의 주기보다는 훨씬 길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이후의 예술가들은 보다 넒은 의미의 ‘우리’ 를 위해, ‘우리의 행복’ 을 위해, 다시 창작(創作)과 연대(聯隊)를 시작해 나가리라 믿는다. 다시 쓰여질 혁명의 시나리오에는 보다 많은 출연진들과 보다 해피한 엔딩이 담겨져 있기를 기대하면서. 포기된 혁명으로 인해, 미미하게 사라져간 우리의 무기들, 작품들, 지혜들이 부디 훗날에 아쉽지 않기를 바라며.
2014년 12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정진삼
ps. 인디언밥 12월의 주제는 ‘2014년 다시보기(review)’입니다. 한달간 인디언밥에서는 올해 존재했던 작품들을 다시보고자 합니다. 예술가 혹은 관객 여러분께서 올해 겪었던 예술 가운데 지나쳐 버렸으나, 지금이라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픈 작품의 순간들의 기록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인디언밥으로 보내주세요. 자신의 작품을 ‘셀프리뷰’ 의 형태로 남기고픈 예술가분들도 열렬히 환영합니다. 미처 인디언밥이 가보지 못한, 소소하게 피어난 예술 현장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참사 앞에서 뒤로 감출 수밖에 없었던 작품의 흔적들을 전해주세요. 게재된 기사에 한하여 소정의 원고료도 드릴 예정입니다. (indienbob@hanmail.net)
▲2014년 8월 24일 백남준아트센터 야외에서 김태춘+김대중+김일두 <삼김시대>를 함께한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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