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7. 11:17ㆍReview
피 흘림의 역사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본격 생리 탐구다큐 <피의 연대기>(For Vagina’s Sake)
글_임성현
20대 중반까지 나는 월경을 하루 만에,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처리(?) 가능한 일로 알았다. 그러다가 4년 전, 친한 친구가 자신의 생리통을 “장염보다 더 뒤틀리는 느낌이 며칠 동안 지속하고”, “골반을 계속 누가 짓누르면서”, “내장과 하체를 뽑아가는 고통”이라고 묘사하는 것에 오싹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생리에 관한 아주 기본적인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올모스트 생리 전문가였던 친구는 작년부터 일회용 생리대의 유해물질에 관해 역설하며, 대안 생리용품을 탐구했다. 생리컵을 써보고 싶으나 몇 달째 착용에 실패 중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래도 최근 면 생리대로 바꿨더니 전보다 확실히 나아졌다며 뿌듯해했다. 친구는 자신의 생리 경험과 생리 도구에 관한 퍼포먼스를 만들기도 했다. 나는 그 작업을 꽤 흥미롭게 ‘감상’했다.
작년부터 내 애인은 탐폰을 쓰기 시작했다. 일회용 생리대를 탈출한 애인은 “세상 이렇게 편한 게 없다”며 즐거워했다. 나는 ‘그게 그렇게 신나는 일일까’ 하며 시큰둥했다. 내게는 가까운 친구와 애인의 생리 이야기가 ‘남북 대화를 지지한다’는 먼 나라 이웃 나라의 한 성차별인종주의자 대통령의 말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나는 월경을 하지 않는 ‘남자’니까.
월경은 지극히 자연적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이다. 오랜 가부장제의 역사와 견고한 남성중심적 사회가 월경을 둘러싼 담론을 구성해왔다. 남성의 시각에 의해 왜곡된 담론은 그마저도 불결하다고 여겨져 점점 은폐되었다. 만약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월경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명언(*각주참고)도 있지 않은가.
남성인 나 역시 그 은폐와 왜곡의 역사에 가담한 장본인이다. 그런 내가 진작 봤어야 할 다큐 영화 한 편이 최근 개봉했다. 바로 <피의 연대기>다. 비틀리고 감춰진 월경 담론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가시화하려는 영화다. 그간 꽁꽁 묶여있던 이슈를 매력 있고 정치하게 풀어냈다.
다양한 몸들의 피 흘림
<피의 연대기>는 감독이자 화자로서 영화를 이끌어가는 ‘보람’과 네덜란드 친구 샬롯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보람은 샬롯에게 특별한 것을 주고 싶어 생리대 주머니를 선물했다. 그러나 선물을 받은 샬롯은 마냥 웃는다. 유럽에선 대개 일회용 생리대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탐폰을 썼던 샬롯은 생리대 주머니가 신기할 따름이다. 한편, 한반도에서 생리대 주머니를 손수 만든 보람의 할머니 경주는 손녀가 쥐여준 생리컵이 신기하다. 생리컵 사용법을 설명하는 보람에게 ‘세상 참 좋아졌다’고 감탄하며 생리컵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생리를 둘러싼 문화적 차이를 인식한 보람은 생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한 예술가가 생리혈이 묻은 사진을 게재한 것을 인스타그램이 삭제해 논란이 일었고, 돈이 없어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체한 중학생의 사연이 공분을 샀다. 보람은 생리라는 ‘자연’적인 일에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문제가 얽혔음을 포착했다. 피 흘림의 경험과 생리용품이 다양한 만큼, 문제 또한 다양하다는 인식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생리’ 혹은 ‘월경’은 ‘그날’, ‘마법’, ‘ㅅㄹ’ 등으로 변환되곤 한다. (월경이 ‘홍길동 아버지’도 아니고, ‘볼드모트’도 아니며, ‘예술계 내 성폭력’도 아닌데 왜 언급하길 꺼리는 걸까?) 일상에서 ‘마법’에 걸린 여성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문제적으로 돌변하는 ‘마녀’로 여겨진다. 이 관점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너 생리하니?’다. 누군가는 가볍게 던진 농담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결코 가볍지도 웃기지도 않는 이유는 조롱과 혐오가 첨가된 말로 ‘몸의 차이’를 단숨에 ‘차별의 근거’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너 종북이지?’, ‘너 메갈 하니?’처럼 존재를 낙인찍어 입을 막아버리는 원리다.
생리는 불결하고 열등한 것일까? 왜곡된 인식에 반박하듯, 영화는 ‘피 흘림’을 전면에 선보인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보람이 생리혈을 세면대에 씻어내는 장면이다. 화장실에서 홀로 생리혈을 씻는 행위를 관객은 보람의 일인칭 시선으로 경험한다. 보람이 이마에 고프로를 착용하여 촬영한 생리혈은 새빨간 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변기가 아닌 세면대에 흘려보내는, 특별히 불결한 것도 아니고 유난히 성스러운 것도 아닌, 누구나 몸속에 지니고 있는 피. 이에 생리에 대한 담론은 새로 쓰여야 한다고, 신화도 괴담도 아닌 ‘더 잘 피 흘리기 위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고 영화는 말한다.
영리하게 재미있고 윤리적으로 세심하다
앙증스러운 색감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벗은 몸으로 뛰어다니다가 풀밭에 철퍼덕 눕는다. 누운 자리엔 빨간 피가 번진다. 그 순간 애니메이션 인물이 한숨 쉬듯 말을 내뱉는다. “X발, 존나 귀찮아.” 객석 여기저기선 천번 공감한다는 듯 웃음이 터진다. 욕 나올 정도로 귀찮고 복잡한 생리를 다루지만, 재미는 물론 윤리적인 세심함도 놓치지 않았다.
감독은 화자와 청자의 위치를 오간다. 자신의 경험을 내어놓다가도 그 경험을 일반화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감독이 직접 화자가 되니 대상화의 위험이 적었다. 여성의 몸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적절히 애니메이션을 활용했다. 실사로 촬영하기 어려운 부분을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함으로써 귀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적절히 깔리는 산뜻한 음악들도 즐겁게 이슈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장면 곳곳에 세심한 배려들이 묻어있다.
참여한 인터뷰이(interviewee)의 다양한 구성도 주목할 만하다. 생리를 주제로 다룬 다큐여서 페미니스트만 참여했을 것 같지만, 면면은 그렇지 않다. ‘가사노동 은퇴’, ‘초등학교 선생’, ‘페미니스트’, ‘영국인 유튜버’, ‘문화평론가’, ‘성남시장’, ‘중학생’, ‘노동당 총선 후보’ 등 다양한 목소리로 월경 담론을 뜨개질한다.
<피의 연대기>는 공통의 역사와 개인의 경험을 두 축으로 세워 ‘피 흘림’을 조망한다. 이는 역사적 서술의 ‘연대기’(年代記, chronicle)와 고유한 주체들의 만남인 ‘연대’(連帶, solidarity)를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의 제목에서도 엿보인다. 생리의 경험은 공통되면서도 개인적이다. 따라서 공감과 차이가 공존한다. 영화는 보편의 역사와 문제를 짚어가면서도, 다양한 개인의 경험을 놓치지 않는다.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하는 사람, 탐폰을 쓰는 외국인, 건강을 위해 면 생리대와 천연 탐폰을 쓰는 사람, 10대 때부터 생리컵을 쓰는 사람 등 저마다 생리 경험이 각양각색이다. 영화는 이 다양한 경험들을 일반화하거나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For Vagina’s Sake’(질을 위하여), 그동안 묵묵히 고생했을 질을 위하여, 이제 더 이상 감추지 않고 떳떳이 이야기하기를 촉구한다.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경유한 영화는 결론에 이르러 보람에게로 돌아온다. 생리를 탐구하며 여러 이야기를 들은 보람은 자신의 몸을 다시 보게 된다. 예전에는 자신의 몸이 부끄럽고 성에 차지 않았지만, 이제 그 몸을 귀엽게 바라본다. 자신의 몸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수줍게 터놓는 보람의 고백은 함부로 정답을 내지 않으려는 영화에서 현명한 결론으로 자리했다. 생리의 고통이나 불편함의 정도, 어떤 생리용품이 좋은 것인지, 정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에 관한 단일한 정답은 없다. 그저 다양한 생리 경험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지 않게, 다양한 몸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뿐. ■
*참고_글로리아 스타이넘,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양이현정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2, 30-31쪽.
**사진_KT&G 상상마당 웹페이지(https://www.sangsangmadang.com/)
필자_임성현 소개_‘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말 만큼은 ‘굳게 믿는’ 67킬로그램짜리 모순덩어리. |
피의 연대기 (For Vagina's Sake, 2017) 장르 다큐멘터리 제작 오희정 감독 김보람 조감독 유정서 출연 이경주, 김보람, 심이안, 박현지, 이슬기, 이미리, 김현아, 서혜영
---------------------------------------------------------------------------------------------------- "<피의 연대기>는 탄탄한 윤리적 몸통에 유익한 정보와 유쾌한 재미라는 양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직 연료가 부족하다. 김보람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열정 페이’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얼마 전 제작팀 인건비 지급을 완료했지만, 아직 김보람 감독과 오희정 프로듀서의 인건비는 미지급됐다고 한다. 이를 포함해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투자자들의 원금까지 계산하면 관객이 5만 명 정도는 들어야 한다는데, 독립 다큐 영화가 달성하기 어려운 숫자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이 극장에 가야 할 이유다. " (추천의 말,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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