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18. 13:10ㆍReview
부산연극씬 매거진 ‘파이플(PIEPL)’
파이플을 보고, 읽고, 베어 물고서
글_유혜영
1.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 구름 한 조각, 기억의 한 조각으로 연상되는 ‘조각’릴레이에 연극을 둔다. PIECE OF PLAY. 연극이 식은 죽 먹기로 쉽고, 친근하고 즐거운 것이 되기를. 곱씹을수록 좋은 이름이다. 서울에 살며 연극을 글로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부산에서 연극 매거진이 출판되었다는 소식은 반가움과 함께 질투와 자책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받아 든 얇은 책 한 권은 시도와 존재만으로도 이미 멋진데, 자그마치 올 컬러에 일러스트를 곁들인 단편희곡까지 수록되어 있다. 편집인들은 우연히 그리고 강렬하게, 그러니까 다들 그렇듯 지극히 평범하게 연극을 만났다. 목차 바로 다음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그들의 첫 조각은 독자에게 건네는 첫인사로 우리가 다 비슷비슷한 사람이라는 위로와 기쁨을 준다. 거의 들뜬 마음으로 꼼꼼히 본다. 오래 읽는다.
2.
표지 모델은 셰익스피어다. 그런데 그의 눈이 빨간 줄로 찍- 그어져 있다. 거대한 그에 대한 거부, 아니면 비약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장 대중적인 극작가이면서 여전히 예술의 성역에 갇힌 존재, 어쩌면 지금의 ‘연극’과도 같은 그를 다르게 해석해보고자 하는 의지일까? 아니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연극 담론에 대한 도전일까.
셰익스피어에 대한 칼럼이 실망스러웠던 건 그런 식의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셰익스피어가 위대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글은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극작가로 못 박는다. 그의 주제의식과 인물들이 인류 보편을 담아내고 있다는 해석은 아마도 가장 일반적이고 무리 없는 그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원형성을 담보하고’ 있는 그의 희곡들은 오늘날의 관객과 만나기 위해 이미 반세기도 전부터 해체되고, 분해되고, 재해석되어왔다. 그의 인물들이 계속 보편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완전하게 창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인물들을 다양한 가능성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무대와 객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칼럼의 필자가 지적한 것처럼 연출가든 관객이든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고는 굉장히 진지하게 파악하려’ 했다면 그는 4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시대 창작 여정보다 의미 있는 것은 그가 전 세계적으로 현재까지 살아남아 온 여정일 것일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셰익스피어는 작가가 아니라 동시대 연극인이 될 수 있고, 그의 희곡은 고전이 아니라 지금의 텍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연극이 위대한 것이 아닐까.
3.
비슷한 맥락에서 희곡(PIECE)과 연극(PLAY)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싶다. 편집인들은 희곡은 글로 쓰인 것, 연극은 무대 위에서 수행되는 것이라는 형태의 차이를 의식한 것일까? 물론, 형태에 따라 수용의 방식은 물론, 감상이나 반응도 달라진다. 하지만 희곡은 무대를 전제하고 쓰인 글이라는 점에서 다른 글과 다르다. 독자 개개인의 상상력과 해석을 훨씬 더 강하게 요구한다. 게다가 희곡은 연극을 구성하는 재료 중 하나이기에 범주 상으로도 둘의 구분이 어색하다. 그럼에도 희곡을 연극에서 독립시켜 조명하고자 한 것이라면 희곡만의 매력을 더 강하게 어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오네스코와 올비의 작품을 소개한 칼럼들이 아쉬워지는 이유다. 이오네스코와 올비는 확실히 셰익스피어와는 결이 다른 현대 작가다. 개인적으로 목차에서 그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두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강렬함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새로운 희곡을 펼칠 때, 극장으로 향할 때 내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작품이 쓰인 배경과 이미 정리된 주제 탐구에 집중한 글들은 희곡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연극성을 언급해주지 않았다. ‘코뿔소’ 은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도, 그것의 현상과 성격은 이오네스코가 글을 쓸 당시와 지금이 같지 않다. 그것은 계속 달라져 왔고, 지금 또 다른 모습으로 무대화되어 또 다른 관객에게 읽힌다. 최근에는 희곡 자체에 연극성을 강하게 드러낸 작품들이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무대만큼이나 희곡도 자유롭고 과감하게 변화하고 있다. 문학 장르로서 연극과 구분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무대보다 먼저 연극성을 완성하는 텍스트로서, 독자마다의 수용 가능성을 기꺼이 끌어안는 독특한 글쓰기로서 희곡이 조명되기를 바라본다.
4.
‘관객대담’이야말로 책의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페이지라고 생각했다. 격식 없이, 거칠 것 없이, 연극에 대해 잡담을 늘어놓는 사람들, 그런 자리를 이렇게 글로나마 만나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대담에 참여한 여섯 명은 연희단거리패의 <백석우화>를 봤다고 했다. 서울에서도 공연되었던 작품이라 반가운 것도 있었지만, 아마 그렇지 않았더라도 흥미로웠을 것이다. 공연을 보고 난 직후의 가벼운 감상부터 이야기의 내용과 무대 효과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풍성해지고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지, 왜 지금 이 공연을 보는지에 대한 질문까지 이어진 대담은 누구라도 끼어들 수 있을 만큼 쉬우면서도, 한 편의 연극이 관객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율이 있었다.
‘연극의 진짜 매력은 관객들에게 재미와 즐거움뿐만 아니라 시대의 문제의식과 더불어 객석에 새로운 관점 또는 시선을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삶까지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책의 제일 마지막 ‘소박한 에세이’에 나오는 주옥같은 말이다. 연극이 ‘시대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관점’을 담을 수 있는 매력적인 장르이기에 이 책도 만들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최대한 쉽고 가볍게 연극을 소개하며 페이지를 채워온 책은 후반부에 가서 묵직한 연극정신을 내비친다. 연극이 단순한 오락거리로 휘발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자 여기 우리 시대를 담아내는 철학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서울이건 지방이건 마찬가지다. 극장 밖의 삶으로 무대의 질문이 연결되고, 그 연결된 질문으로 내 가족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로서 연극이 그 미학을 드러내기를, 아름다운 연극이 많이 나오기를 관객으로서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무대에 대해 더 많은 잡담을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연극을 보는 방법’을 정리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있을까. ‘잡담’이라는 말이 정확한 것 같다. 본대로 느낀 대로 떠오르는 대로 우선은 떠들어대야 하는 것 같다.
5.
책은 매거진답게 최근 부산의 연극 정보를 살뜰히 소개한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부산에 위치한 극장들을 표시한 지도다. 지도는 책상 앞에 붙여놓고 싶을 만큼 예쁘고, 극장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에저또 소극장과 가마골 소극장은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부산에서 연극의 존재감도 만만치가 않다. 왠지 마음이 든든하다. 우리 함께 모여 잡담을 나눌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파이플 홈페이지 바로가기 >>> sasuumgorae.wixsite.com/piepl
**파이플 SNS페이지 바로가기 >>> www.instagram.com/PIE_PL
필자_유혜영
소개_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새내기입니다. 공연장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 이미지 출처_파이플 텀블벅 페이지 >>> https://tumblbug.com/pie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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