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 17:58ㆍReview
하지만, 그 곳은 빛났다지. - ‘휘경, 사라지는 풍경’展
글 스카링
l 외벽작업 l 김형관 타일위에 색테이프 2009
최근 몰두하는 단어가 하나 생겼다. 공간. 그저 무언가의 배경일 뿐 아니던가?
하지만 글을 쓰면서, 프린지페스티벌과 기타 여러 전시회를 돌아보면서 단단히 굳은
생각이 말랑말랑해진다. 공간은 단순한 무대와 전시를 위한 곳이 아닌, 예술가의 작품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인 것이다.
개인적 취향을 보태자면, 거친 원석과 같은 공간이 좋다. (물론 잘 꾸며진 아기자기한 공간이 대세라지만 가공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어서 말이지.) 익숙함을 깨고, 예상 밖의 공간에 소환된 예술작품은 더욱 싱싱하게 살아있다. 이런 공간을 맛보는 날이 많아진다. 어쩐지 소믈리에가 된 기분? 창고, 까페, 길거리, 2층집 마루, 기무사...이번에는 ‘여관'이다. (올레! 신났음.)
도시 사람 공감 백배의 테마와 이색 전시가 만났다. ‘재미난 이벤트’ 하나 업고 초저녁 무렵에 찾아갔다.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된다. 삐삐- 킁킁- 바삐 탐지하는 기계와 개를 지나 (청와대는 이렇게나 잘 지키면서...이거 왠지 씁쓸하구만.) 경복궁 영춘문 건너편, 외관을 ‘촌스럽게’ 장식한 낡은 여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지속 가능한 포장 테이프이건만 곧 사라질 풍경이란다. 시작부터 ‘재개발’의 어두운 것 하나, ‘낭비’를 만났다.
삐거덕. 첫 발을 내딛자 여관은 소름 돋는 소리로 인사한다. 짓궂기도 해라. 하지만 이해할 것이, 이 통의동 2-1번지 ‘보안여관’은 칠순을 바라보는 어르신이다. 조심조심,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주문을 외우며 객실을 둘러보았다. 통의동 여관에는 휘경동 이모저모가 담겨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재개발의 부르심을 받아 메이크오버(변신?) 중인 동네. 그 곳에 거주하거나 작업실을 갖고 있는 6인의 작가들, 아무래도 단단히 뿔난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프로젝트가 재개발에 대한 반대나 옛 동네에 대한 기록은 아니다. 한 세대도 넘기지 못 하고 너무도 빨리 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 못 한, 지극히 인간적인 감성으로 담담하게 재개발 현장을 바라 본 감상을 기괴하면서도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시멘트 천지를 통해 재개발의 진실(우리가 아는 천지는 의도된 꾸밈이라는 설명이다. 그것이 재개발을 떠올린다 한다.) 을 고발하는가 하면, 휘경동 추억의 잔해를 전시한다. (마치 예술작품처럼. 해석하기 나름이다.) 또한 작가들은 휘경동 동네 주민들과 함께 공공프로젝트 ‘어디 사시나요’를 통해 휘경동 사람들의 마음을 통의동 여관으로 불러왔다.
l 누구의 산 l "우리 정상에서 다시 만나요 권용주 (가변크기, 사진, 시멘트 외) 2009
l 안개의자 l 강지호 캔버스에 아크릴, 2009
l 超吐花 초토화 l 강지호 캔버스에 아크릴 2009
2층으로 올라갔다. 어이쿠, 더 가관이다. 괜히 넘치는 기운에 펄쩍 뛰었다간... (심지어 어떤 객실 밑바닥은 1층을 기웃거리는 관객 가르마가 보였다!) 천장 또한 허전하다. 휑한 전선에 매달린 전구들만 힘겹게 껌벅였다. 이건 뭐, 작품 감상보다 목숨부터 챙겨야 하지 않나 싶은 괜한 ‘오바감’이 밀려왔다. 대체 이곳은...보안여관?
그제야 리플렛을 찬찬히 훑었다. 또 한 번 어이쿠, 그냥 늙은 어르신이 아니다. 올해로 65세 되신 이 여관은 일제 강점기부터 서울의 역사를 쭉 지켜 본 ‘산 증인’이다. 또한 미당 서정주 등 여러 시인이 모여 문학지를 만든 걸 보기도 하였다. 수많은 나그네들이 자유로이 은밀히 머물다 간, 사적인 역사를 품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최근에는 새로이 복합문화공간으로 회춘 중이라고 한다. 앙상한 뼈대의 집이 지그시 누르는 세월의 묵직함에 그저 고개를 숙였다.
저 조그맣고 오래된 모니터에서 '부추라마'의 영상이 나온다. (인터넷에'부추라마'를 검색해 보아요~)
비주얼 동요밴드 ‘부추라마’의 무차원 마법영상에 혹해 몇 차례 심취하여 보던 중, 불이 나갔다. 헉, 약간의 야맹증 탓에 조금 겁을 먹고 심장이 요동쳤다. 그러나, 아하! 이것이 바로 ‘재미난 이벤트’로구나. 벽을 더듬어 1층으로 내려갔다. 연장 관람 edit ver.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보안여관은 어둠과 최소한의 빛 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좌 손전등, 우 DSLR. (한 손으로 찍기 무지 힘들다!) 간신히 건진 어둠 속 전시 모습들, 이러했다.
제대로 보일 리 없다. 그럼에도 손전등 불빛 하나에만 의지에서 작품과 공간을 다시 살피니 새롭게 읽힌다. (어느 미술관에서 작품 하나 걸지 않은 미술관 자체를 전시한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그런 신선한 느낌이었다.) 밝을 때보다 작품에의 집중이 높아진다. 일부만 밝은 영역들이 더욱 선명한 형태로 마음에 쌓인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산만한 성격 탓에 금세 흩어지는 작품에 대한 해석과 감상이 여기 어둠 속의 전시 속에서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재개발이란 단어를 품은 작품들이 스멀스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명하게 말했다. ‘이것이 너희가 꿈꾸는 동네니?’
우연히 2층에서 공동 큐레이터 창파와 서민호씨와 만나 얼굴 윤곽만을 보인 채 이야기를 나눴다. (암중토크?) 어둠 속에서 울리는 사람의 목소리는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너무도 빨리 변화의 물결을 탄 재개발이 진정으로 사람을 생각하고 진행되는 것인 지, 그런 것에 대한 작가들과 동네 주민들의 심정과 감상을 담은 것이라고. 시대를 품고 또 한 번 새롭게 태어날 여관이 변화에 물결에 휩쓸린 휘경동의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했다고.
어둠 속에서의 감상은 작품과 공간에 또 다른 감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울림.
그들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l 누구의 기념비 l 권용주 시멘트블럭에 음각새김, 2009
+ note ))
- 여기 살았던 사람 김덕량, 홍영순, 김우석, 최정숙, 김혜연, 김지성. 안녕, 우리 집.
잔뜩 힘이 들어간 사인펜. 나 또한 재개발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20여 년을 살아 온 집에 온갖 낙서와 메시지를 남겼다. 어차피 없어질 집이거늘, 뭐라도 ‘흔적’으로 속삭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그 허문 집 위에 지은 아파트에서 산다. 3년째이건만 어색하다. 남의 집에 사는 기분이다. 함께 살았던 이들은 거의 떠나갔다. 소식도 모른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재개발은 누구를 위한 프로젝트일까?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그리고 우리의 추억이 깃든 공간도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휴지조각마냥 쉽게 사라진다. 휘경동, 너의 추억은 얼마나 유지될까? 어둠 속에서 만난 휘경동의 모습들이 남일 같지 않아 쿡쿡 마음을 쑤신다.
휘두를 휘, 볕 경
휘두른다고 다 빛나는 건 아닐 텐데.
하지만 그 곳은, 빛났다.
'진짜' 동네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었기에.
- 안녕, 휘경(揮景)동
전시 소개 (클릭)
and 고양이와 초코우유, 통기타, 온갖 기묘한 것에 꽂힌 글제조견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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