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태양은 하나다

2009. 9. 24. 12:31Review


글 정윤미

불편하다.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불편해야만 한다. 2009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서 있는 사람들. 무대 위의 그들은 “저는 지금 죽었다고 말하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무대 위가 밝아오자 볼 곳을 잃은듯한 시선으로 유령처럼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재이와, 유흥업소를 하는 재이의 엄마와 업소에서 일하는 두 이모는 모두 한 가족이다. 꼭 피를 나눈 사람들이 아닐지라도 그들은 가족이다. 이제 막 새로운 터전에 업소를 옮긴 이 가족은 기대에 부풀어 있다. 재이는 이사 온 동네에서 새 친구들을 만나고 즐거워한다. 각자 새로운 환경에서 새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재개발지역이라며 철거해야하니 이곳을 비우라는 구청으로부터의 독촉을 받는다. 아무런 보상 없이 내쫓기게 된 재이의 가족. 대항할 수도 없다, 법이 그렇다는데. 폭력과 가난에 노출된 환경 속에서 어린 재이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려간다. 그리고 누군가를 죽이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대체 이 연극을 보고 누가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올해 초 추운 겨울날의 그 사건, 용산참사를 말이다. 세입자의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고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 한 채, 건물을 다 부수며 쫓아내는데도 억울해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던 사람들이 건물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들을 폭력 시위대로 규정한 경찰들은 막무가내 진압을 했고 결국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니까 그 곳엔 “사람이 있었다.” 그 부서진 곳 위엔 대체 어떤 것들로 채워지는가.


예술은 그런 것 같다. 기사로 몇 줄 나왔을 ‘사건’을 양 옆으로 늘여서 깊게 들여다보는 일.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있던 내게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그 책 참 좋지? 신문에서는 기사 한 줄로만 실렸을 일이야. ‘어떤 어린 아이가 자기를 길러주었던 늙은 여자의 시체와 함께 지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말이지. 그런데 이 작가는 그 아이의 삶을 오래도록 들여다본 거잖아. 나는 그래서 문학이 좋아.”


순식간에 철거민이 되어버린 재이의 가족. “철거민”이라고 호명하는 것조차 폭력적인 일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철거민이 될 지경에 이른다. 신문과 뉴스에서는 아예 취급하지 않거나 몇 줄로 표현하거나 혹은 분석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그건 ‘사건’에 사로잡힌 인물의 이야기다. 하지만 더 섬세한 관찰력과 애정이 필요한 그런 것, 빠르게 소모하지 않고 깊게 침잠하는 것. 오늘 지하철에서 우산을 파는 한 아저씨를 보고 그 사람의 사연이 궁금하고 그의 삶을 혼자 상상해보는 그런 것.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재이 가족의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만드나보다.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연극을 만드나보다. 자꾸 눈에 밟혀서 이대로 계속 걸어갈 수는 없어서, 자꾸 주저앉고 멍하게 무언가를 응시하다가 이내 끼적이고 결국 몸을 움직이게 되나보다. 그게 예술인가보다.


연극 중간 재이의 가족들이 춤을 추다가 싸움이 일어나고 또 다시 화해하고 춤을 추는 그런 장면들은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철거라는 사실로만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일상, 말 그대로 ‘웃고 우는’ 그런 세상사, 인간사. 이게 잘 되었을 때 우리는 누군가의 삶으로 쑥 빨려 들어가고 그로인해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감히 위로라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일 테다. 


사실 나는 이 점이 <태양은 하나다>에서 그리 잘 표현되지는 못 했다고 생각한다. 소위 사회적인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처한 조건들 중 대표적인 이미지들로만 가득 모아놓은 모양새가 좀 억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회의 바닥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요소가 이 연극에는 다 등장한다. 아빠 없는 아이, 윤락, 성폭력, 폭행, 살인 등. 연극의 내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비극을 부를 수 있는 대표 이미지들은 일부러 다 그러모은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까지 갈 필요가 있었을까. 보여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불편한 요소들을 다 밀어 넣은 게 아닐까.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렇게밖에 될 수 없어 라고 하는 것만 같아 불편했다. 그 불편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거북함이 되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물론 내 거북함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내가 왜 이걸 거북해할까 하며 감정을 다시한번 헤집고 드러내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내 솔직한 마음이 아닐까. ‘외면하고 싶은’ 내 진심 아닐까. 하지만 감정을 다시 분석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거북해지고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외면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내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안락을 느낀다. 


아마 그들은 인위적일지라도 보여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꽃밭 밑에는 벌레와 쥐들이 득실거린다고. 그게 안 보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이라고 말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들어간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공감할 수 있을 만큼의 통속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것보다 보기 싫은 것들로만 똘똘 뭉쳐서 드러내자. 자 봐라, 이거 과연 비현실적인 일일까?


상식 이하의 현실은 예술을 무력하게 만들지만 예술은 이내 현실을 넘어서고자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런 예술은 또 현실을 조금씩 바꾼다. 이 힘을 믿고 또 믿어야 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렇게. <태양은 하나다>은 좀 더 노골적으로 좀 더 명확하게 사회 문제를 드러낸 작품이다.


“삶을 망각하는 비겁한 가림막이 될 것인가? 세상을 가리는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을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가? 천 번을 생각해도 지금은?”


글 | 정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