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8:00ㆍFeature
좋을예술
글_정진삼
1.좋았던 예술
올 한해 지나간 예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좋은 예술, 좋았을 뻔한 예술, 좋지 않았던 예술... 여러 작품들을 만났습니다. 아마 ‘좋았던’ 혹은 ‘나쁘지 않았던’ 예술은 비평의 과정을 거쳐 인디언밥의 기록으로 남겨졌겠지요. 그러한 기록들 가운데 혹시 누락된 것은 없는지, 미처 듣지 못한 목소리는 없었는지, 그때는 그저 그랬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점 좋아진 예술은 없는지 생각해봅니다.
살펴보면 참 많습니다.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 예술에 비평이 착 달라붙는, 그런 엄밀하고도 숭고한 작업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그러하지 못했음을 다 지난 마당에 반성하게 됩니다. 수많은 샛별들의 반짝임을 포착하지 못한 천문학자가 그런 기분일까요. 더 잘할걸, 더 즐겁게 할걸, 더 더 더... 라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본 작품에 비해 쓴 리뷰 숫자를 보니 후회는 막, 급해집니다. 봤으면 써야하건만, 보기만하고 쓰질 않았으니 참 미안할 따름. 따름. 따름....
꼭 보러오라는, 보고나서는 얘기 좀 해달라는, 어땠는지 말 좀 해달라는,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 합니다. 당연하게도 그 어떤 예술가도 관객들에게 ‘좋지 않은’ 예술을 하지는 않지요. 성에 차지 않는 결과물이 있지만, 현장에서 예술가들은 생각보다 성실하고, 의외로 근면하며, 놀라우리만큼 열성적입니다. 그것은 아마 독립예술이든, 상업예술이든, 대중예술이든, 순수예술이든 그러할 것입니다. 대충하기엔 예술은 너무 즐겁고 재미있으니까요.
다 지난 마당이지만, 보았지만 쓰지 않은, 쓰다듬지 않은, 다듬지 못해 내놓지 못한 비평의 후보작인... ‘미언급’ 예술작품들에게 고합니다. 좋지 않은 예술이라서, 혹은 별로라서, 또는 거지같아서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그저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쓰기 귀찮아서. 못, 쓰거나 안, 썼다고. 개중에는 정말 ‘좋은예술’ 도 있었다고. 오히려 너무 좋은데도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뻥 아니라고) 그리고 당시에는 애매했으나 지금은 좋아져버린 당신과 당신의 예술이 분명히 있노라고.
2. <공상의 뇌>
지난 공연 중 미완성 리뷰 원고를 뒤져봅니다. <공상의 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미 5개월이 지났습니다. 서울 변방연극제에서 소개된 작품입니다. 리뷰를 쉽게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있어서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보고 메모했습니다만, 역시나 그뿐이었습니다. 좋은 축제와 좋은 작품, 좋은 예술가와 좋은 관객들이 있었지만, (좋은 리뷰는 고사하고) 그냥 리뷰까지 연결되지는 못한 것이지요. 벌칙을 감수하는 심정으로 뒤늦게 미완의 리뷰를 올립니다. 프리뷰가 아니라... 쏘리뷰(sorry-view)입니다.
공연 예술이 장애인과 맺을 관계는 크게 둘로 나눠진다. 먼저 장애인의 심신 능력 향상을 위한 치유과정으로서의 공연 예술이 그 하나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애인이 공연 예술인으로 참여하는 경우다. <공상의 뇌 2012>는 신체 장애인들이 직접 무용수로 등장하는 춤 공연이다. 한국의 ‘장애인극단 판’과 일본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류세이오 류’가 합작해서 만들었다. ‘변방’ 이라는 경계적 특성을 살려, 일반인과 장애인, 춤과 연극, 한국과 일본 등의 여러 경계를 넘고자하는 발상이 인상적이었다. 살펴보면, 변방연극제 안에서도 가장 ‘변방성’ 이 가장 강한 작품이 아닐까. 연극제에서 밝힌 기획의도에는 ‘변방’ 에 대해, 스스로 되물으면서 그 가치를 모색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변방’의 가치는 무엇인가?”, ‘’변방’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이상한 것, 낯선 것, 잡것들의 위치는 어디일까?“
<공상의 뇌>를 소개하는 이들의 답변이 명쾌하다. 변방의 가치는 미물(微物)이 아닌, 미물(美物)로서의 가능성이다. 하찮은 존재에서 아름다운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적극적인 해석자의 몫이고, 평자의 임무라고 생각하여 극장을 찾았다. 객석을 가득채운 변방적 관객들이 이미 그들의 춤을 가능성 있는 예술(able-art) 에서 아름다움이 가득한 예술(beauti-ful art)로 인식하고 있었다.
▲ 서울 변방연극제 블로그 blog.naver.com/mtfestival
<공상의 뇌>는 춤이 가지고 있는 기본 속성인 빠르고, 가볍고, 유연한 동작들 대신 느리고, 무겁고, 부자연스러운 동작들이 무대를 지배하고 있다. 시간을 천천히 재생시킨 듯 느린 속도감에 관객들은 보다 세밀하게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부자유한 신체와 즉흥무용의 자유로움이 그로테스크한 동작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괴함이 무용수의 의도가 아니라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기에, 묘하게도 아름다움과 감동의 순간이 찾아온다. 무대에서는 과정태로 나타난 춤은 무용수나 관객의 공상의 뇌 속에서 완성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춤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파편적인 생각들 혹은 드문드문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했다. 무대 위 천장에 매달린 찌그러진 바퀴들, 원의 형태 등은 마치 초현실주의자 그림에 반영된 축 늘어진 오브제 마냥 미쟝센을 완성시켜 주었다. 이들이 입고 나온 하얀 의상 또한 무의식과 상상의 세계의 느낌을 강화하였다.
▲ 서울 변방연극제 블로그 blog.naver.com/mtfestival
무대에 출연한 무용수들은 모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추측컨대 이들의 몸은 운동하기에도 살찌기에도 쉽지 않은 몸이리라. 이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쉽게 욕망을 드러낼 수 없는 몸적 존재인 것이다. 살과 근육 없는 몸이 무대 위를 기고 구르는 것 만으로 춤과 장애의 의미는 서로를 교섭하며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무대는 ‘포월’ 의 예술을 지향하는 것이다.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자아에 근접하는 ‘초월’ 이 아니라, 장애라는 담을 겨우겨우 기어서 넘어가는 ‘포월’ 말이다.
누구보다도 심한 중력을 느끼며, 무엇보다도 강한 억압을 겪어내는 이들이 보여주는 예술의 형태는 이처럼 ‘포월’ 적이어야 자연스럽다. 그간의 장애인 예술은 비장애인의 모습을 모사한 고된 훈련의 결과물이었다면, <공상의 뇌>는 다소 공격적이고 거칠게 드러나는 장애인들의 자기표현, 즉 솔직한 생(生)의 충동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즉,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과는 다른 감각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있음을 강박없이 표현하였다. 어쩌면 공상의 뇌, 속에서야 말로 ‘장애’ 라는 사실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 까지 쓰고, 말았습니다. 오개월이 지났지요.
이 공연을 비평으로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에이블 아트라는 장르를 잘 포장해서 말해야 한다는 자만? 장애인 예술이기 때문에 더욱 배려해서 써야 한다는 오만? 장애인 예술이기 때문에 잠시 뒤로 밀자는 태만? 이러한 만만만-함으로 리뷰는 거기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오개월 동안 내내 불편했고, 이 글을 올리고 난 후에도 그리 편치는 않겠지만,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해질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노래를 꼭 들려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참, 내게는 참, 좋은 예술.
3. 영기획 X 비트볼 레코드 <무키무키만만수 리믹수 컨테수트>
올해 영기획과 비트볼 레코드가 실시한 무키무키만만수 리믹수 컨테수트의 참가곡 38개 중 <인기믹스상>을 수상한 ‘요햔 일렉트릭 바흐의 2002 리믹스 “안드로메다” 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곡을 처음 접했을 때, 거의 실시간으로 머릿속에서 비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감성이 곡을 즐기는 것과는 별개로, (아마도) 이성과 (그나마) 지성이 그 현란한 비트에 맞춰 비평적 문장을 하나씩 톡톡, 뱉어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요한 세바스찬 바하나 베토벤이 그러했(다고 만화책에 나와 있)듯이 가던 길을 멈추고 길바닥에 작곡을 하듯, 단숨에 그 자리에서 비평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완성되기까지 한) 이 글은 인디언밥에 실리지 못했지요. 다만, 그때를 계기로 새 시대의 예술이란 무엇일까, 새 시대의 비평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이것은 과연 ’좋은 예술‘ 일까? 하는 질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여, 그 당시에 메모를 바탕으로 쓴 리뷰를 올립니다. (고인에 대한 무례의 문장은 이해해주길.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요한 일렉트릭 바하는, 과정중인 무키무키 만만수의 <안드로메다>를 완성해 낸다. 이 완성은 2002년 월드컵 주제가 믹스라는 천재적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의 특기인 ‘일렉’ 과 ‘트릭’ 을 살려, ‘리믹스’ 형식의 미덕인, 유머와 절묘, 재미와 반전을 이끌어낸 음악적 재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취는 동시에 진보의 치어리더라고 놀림/놀래킴 당하는 뭌만의 위상을 민족의 치어리더로 격상시키는 동시에, 2002년부터 촉발된 거리투쟁의 민중미학을 살리고 있으며, 전통과 현대, 미래를 넘나드는 음악의 초월성을 비롯하여 인간과 자연을 두루 살피는 생태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최고/최선 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요한일렉트릭 바흐 공연 포스터, 관련 웹페이지 http://johannelectricbach.blogspot.kr/
원곡은 2012년에 발매된 뭌만의 <2012> 앨범에 실린 “안드로메다” 이다. 이 곡은 뭌만의 기본 포메이션인 기타와 타악을 담당한 구장구장에 뜬금없는 브라스(단소인가?)로 연주되었는데, 가사의 안드로메다성과 함께, ‘벌레벌레벌레’ 하고 깽판 놓는 후렴구가 일품이다. 그러나 이 곡은 음악으로 듣기에는 좀 밋밋하다. 아마도 한진중공업이나 두리반의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을 잠 깨우기 위한 용도, 혹은 자의식을 깨우치기 위한 “벌레벌레벌레벌레” 의 퍼포먼스성을 먼저 인정받으며 음악적 가치보다는 공연성이 먼저 정립된 곡이라 그럴 것이다.
요한은 정확히 10년전 곡인 2002년 월드컵 송을 여기에 교접시킨다. 테크노 음악으로 작곡된 곡은 여백이 많고 산만했던 뭌만의 <안드로메다>와 결합되면서 훨씬 풍성하고 명료해진다. 즉, 원곡에 나오는 ‘무당/방구/풍뎅이 벌레’ 와 다른 곡<투쟁과 다이어트>에 나오는 ‘아버지’, ‘어머니’ 를 리믹스 곡의 등장인물로 하여 계속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으로 곡은 전개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도입부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서두를 그대로 차용하는데 여기서 (무키인지 만수인지) 내레이션으로 선수를 친다. 이어 JYP(조용필)의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하고 있어” 하는 사뭇 의미심장한 멘트로 뽕짝 테크노의 대문을 활짝 열어 제낀다. 아리랑 민요의 선율을 차용한 월드컵 리믹스는 뭌만의 “얼쑤” 하는 추임새와 “어머니~”, “아버지~” 하는 절규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데, 여기서 우리 전통의 ‘한’과 ‘흥’ 이 동시에 발생한다. (따라서 이 곡은 테크노댄스와도 어울리지만, 전통/막춤과도 잘 맞는다.)
한편, 아버지, 라는 절규 뒤에 나로는 “킬리만자로~” 는 다소 차갑게 들리는데, 여기서는 두운격인 ‘킬(kill)’ 이라는 말의 늬앙스가 새롭게 강조됨을 청자들은 느낄수 있다. 즉, 지명으로써 ‘킬리만자로’ 대신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말겠다 (키일~)는 서늘한 기운이 음악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무키무키만만수의 <안드로메다>를 리믹스한 요한 일렉트릭 바흐의 음반을 들어볼수 있는 웹페이지 |
자, 이러한 리믹스의 테크닉에서 볼 수 있듯이, 일렉과 트릭을 이용한, 혹은 이를 본질의 업으로 삼는 요한의 리믹스는 단순히 싱크로율에서 비롯되는 재미만이 전부가 아니다. 요한의 리믹스는 <안드로메다>의 재맥락화로써 기존 곡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확대하면서 동시에 재해석하여 생산한 창작품인 것이다.
논의에 앞서 우리는 왜 요한이 2002년 월드컵 곡을 <안드로메다> 리믹스의 짝패로 설정했는지, 그 의도를 밝혀야 한다. 2002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그것은 2012년에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누구나 다 알듯이 2002년에는 월드컵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난 촛불시위, 즉 주한미군 땅크에 의해 희생된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다. 음악을 잘 들어보면, 요한이 취사선택한 가사들은 바로 망자를 추모하는 텍스트임을 알 수 있다. 첫 나레이션을 다시 읽어보자. “니가 내 앞에 없어도 듣는 것처럼 너한테 소리를 지를게.” (또한, 흥겨움을 연상시키는 멜로디와는 다르게 가사에서는 처절함이 느껴지는데, 이를 희생자의 시선으로 발화해보면, 묘하게도 감정이입이 되고마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엌~)
▲ 인디밴드 무키무키 만만수 1집 <2012> 앨범 표지
1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초중고생이었던 이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2011년, 그리고 2012년 여전히 삶과 음악과 투쟁을 일치시키고 있다. 뭌만은 두리반과 한진중공업에서 사람들의 의식을(혹은 잠을) 깨움으로써 유명해졌다. 요한은 이들의 모습에서 미선이와 효순이의 현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주한미군 사건이 없었더라면, 미선이와 효순이도 뭌만 못지 않은 멋진 청춘이 되어있으리. (....)
- 까지 쓰고, 말았습니다. 여차저차, 토카타나푸가나, 3개월이 흘렀습니다. 이 공연을 비평으로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하겠지요. 호들갑을 너무 떨었거나, 육갑이 심했거나. 이러한 갑갑-함으로 리뷰는 거기서 뚝. 그래도 왠지 꼭 올리고 싶었답니다. 이 예술이야말로 어쩌면 나만 좋은 예술일지도 모르지만, 이 말을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나도 (사)요한 일렉트릭 재단에 가입하고 싶어요... 는 농담이고, 어쨌든 이러한 리믹스 콘테스트와 같은 재창작 프로젝트를 통해 재미있고 발랄한 상상력을 음악대중들과 함께나눈 영기획과 비트볼의 창조적인 기획은 정말 최고/최선이었다, 고.
4. 좋을예술
시간이 좀 지난 '예' 지만, 이젠 공연기획자들은 좋은 작품, 혹은 나쁜 작품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 나름대로 ‘좋음’ 을 가지고 있고, 가치를 보이는 작품들이기에, 혹은 지금의 ‘나쁨’ 은 나중의 미덕이 될 수 있기에 그러한 수식의 성급함을 삼가는 것입니다. 좋은 아기와 나쁜 아기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이제 막 태어난 작품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태도는 참 인상적입니다.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버텨낸 작품만이 ‘좋은 어른' 으로 살아남기 때문에, 공연예술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와 섬세한 접근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올해 마주한 수많은 공연들 가운데 시간이 지나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은 내년에 꼭, 다시 하겠습니다. 막차가 끊기기 전에 두 팀에게 좋은 예술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예술가들의 공상의 뇌 속에서 잉태를 앞두고 있는 ‘좋을 예술’ 을, 새로운 연대와 투쟁의 해에 바라고 또 기대하겠습니다. 얼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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