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익살광대극, <레드 채플린>“어쩌긴? 웃겨야지! 우주 전체를!”

2014. 1. 1. 22:43Review

 

“어쩌긴? 웃겨야지! 우주 전체를!”

- 익살광대극, <레드 채플린>

 

글_유햅쌀

 

‘진짜’ 불온한 것

시인 김수영은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하다”고 말했습니다. 불온함, 그것은 체제 순응적이지 않은 주변무의 모든 것과 맞서는 것일 테며, 주변부에 위치해 있어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을 중심으로 끌어와 발화하는 예술, 그 행위를 새롭게 호명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연극 <레드 채플린>은 이 빨갛고 불온한 시대에 전 세계가 사랑하는 불온한 예술가 ‘찰리 채플린’을 ‘익살광대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는 연극 속에서 뒤뚱뒤뚱 엉덩이와 골반을 쭉 빼고 지팡이를 휙휙 돌리며 검은색 중절모를 머리 위에 툭 하니 걸친 채로,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독특하고 과장된 걸음으로, 미국으로, 한국으로, 그리고 우주로 걷고 또 걷습니다. 어디든 웃길 수 있는 곳이라면.

“내 영화가 빨갛다니? 내 영화는 흑백이야!”

 

 

무대 위에 채플린의 방이 턱 하니 놓여 있습니다. 꿈을 꿀 수 있는, 꿈속이라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게 비행기가 되어 주는 침대와, 간소한 옷걸이, 영화 포스터들, 화장대, 이 전부 말입니다. 그런데 CIA 요원들이 갑자기 들어와 채플린의 방에 숨어버리네요. 빨갛고 불온한 영화를 만드는 채플린을 잡으러 출동한 겁니다. 그리고 무대 뒤 스크린으로는 1950년대 당시, 미국의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의 연설 장면이 흘러나옵니다. 집으로 돌아와 꿈과 현실을 헷갈려하던 채플린은 CIA 요원들과 숨고 쫓고 숨는 광대극 한 판을 벌이다가 스르르 잠이 듭니다.

그리고 채플린의 꿈 속. 꿈속에서 깬 채플린과 채플린의 여러 분신인 ‘채플린들’이 드디어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영화중에서 빨간 영화를 찾아내기 시작하는데요, 그런데 이상하게 <모던 타임즈>의 컨베이어 벨트 위의 채플린에게도, <개의 일생>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채플린에게서도, <위대한 독재자>의 독재자 채플린에게서도 불온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냥 단지 ‘사람이 기계처럼 일을 하는 게’, ‘일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는 게’, ‘소시민의 자식들은 전쟁터로 나가고 고위층의 자식들은 사교파티에 가는 게’ 웃겨서, 그래서 영화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웃기는 상황이 참 많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결국 채플린은 결심합니다. 웃긴 걸 웃기다고 말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으로 떠나자고. 그것은 채플린의 꿈이자, 갈망이자 소원, 그리고 이 시대의 꿈입니다.

 

 

비행하는 채플린의 꿈

채플린의 꿈은 시공간을 초월해 비행합니다. 그 꿈은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 한 ‘알레고리의 변증법적 이미지’와 닮아 있습니다. 벤야민은 알레고리가 “상실되고 파편화된 세계에 대한 한탄과, 이를 넘어서는 ‘구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희망”을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익살광대극 <레드 채플린>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주변부를 사유하는, ‘웃을 수 없는 시대에게’ 바치는 놀음 한 판이자, 한바탕 웃음입니다.

이 웃음 뒤에는 결핍, 결여, 그리고 부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웃음을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웃음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미 웃음이 빈곤해져버린 세상에서 각자의 자아 역시도 빈곤해지고 맙니다. 이 멜랑콜리의 시대에, 채플린이 꿈꾸는 것은 ‘우주 전체를 웃기는 일’입니다.

드디어 채플린의 ‘말하는 몸’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만담가이자 조선의 채플린 ‘신불출’의 ‘움직이는 입’과 만납니다. 1936년 11월, 문화잡지 <삼천리>는 그 호에서 당대 유명 문사들에게 ‘나의 묘지명’으로 쓸 글을 받아 특집으로 실었습니다. 신불출은 여기에 “잘 죽었다”라는 한 마디를 남깁니다. 그의 말 속에 해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신불출의 배꼽 잡는 만담은 피곤한 일상 속에서 말끝마다 붙이는 “죽겠네”를, ‘일본 순사’를, ‘식민 공간’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레드 채플린>은 채플린과 신불출의 만남을 통해 슬랩스틱과 만담을, 시대를 교차시킵니다. 채플린은 자신을 닮은 조선의 만담가 신불출을 만나 식민지 조선에서도, 해방 이후 그가 선택한 북한에서도 마음껏 웃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처지를 보고 동병상련을 느낍니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순사들은 완장을 바꿔 차고 자유대한을 수호하는 청년단으로, 북한의 붉은 완장을 찬 청년단으로 그때그때마다 변해버립니다. 결국 이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은 원래의 본질을 잃고 선동을 위한 수단으로, 각자의 이해관계에 얽힌 사소한 것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어쩌긴? 웃겨야지! 우주 전체를!”

채플린은 떠돌고 떠돌다가 현재의 한국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서울역 광장, 각자의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싸우고 또 싸웁니다. 불법 시위자로 낙인찍힌 농성장의 사람들, 반공을 외쳐대는 할아버지, 촛불소녀, 채플린을 때리는 경찰까지. 그런데 여기, 채플린은 잊히고 없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영화를 보지 않고, 그의 코미디는 채플린이라는 이름의 복식, 어쩌면 소비-기호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웃음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들이 죽거나 병에 걸리거나 망했을 때에만 사람들은 웃고 맙니다. 채플린이 머물 곳은 결국 진공 상태로 가득 찬, 우주뿐입니다.

우주복을 입은 채플린과 신불출이 등장합니다. 일분이라도 실컷 웃다가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신불출과, 우주에서의 호흡 곤란 속에서 ‘생’이 몇 십초 밖에 남지 않은 끝 앞에서도 ‘우주 전체를 웃기겠다’는 채플린의 꿈이 다시 반복됩니다.

웃을 수 없는 시대, 우리는 가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에 <레드 채플린>은 찰리 채플린의 ‘몸짓’과 신불출의 ‘말’이라는 두 텍스트의 만남과 교차를 통해 위트에서, 욕지거리 속에서, 오해 속에서 순수하게 발견되는 ‘웃음’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아냈습니다.

 

 

2013년이 그렇게 저물어갔습니다. 지난 한해, 웃을 일, 있던가요? 1950년대 미국에 불어 닥친 매카시즘의 광풍이 한 차례 빨간 딱지를 붙이고 떠난 다음, 이상하게도 그 광풍은 뒤늦게야 한국에 불어 닥친 것 같습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상황, 곳곳에서 포착되는 분열과 파괴의 징후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불협화음이 나라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사람들은 늘 피곤하고 언제나 멘붕에 빠져있으며 쉽게 무언가에 빠져듭니다. 그 안에서 정상을 비정상으로, 누군가를 ‘종북’으로, 또 어느 집단을 ‘꼴통’으로 규정짓는 일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채플린의 ‘흑백’영화들을 ‘빨갛다’고 규정지으면서, 그를 ‘빨갱이’로 몰아넣은 것처럼 말입니다. 빨갛고 불온한 것이 무엇인지,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 같은 것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 우리는 쉽게 웃음을 내어주지 못합니다. 신경질적이거나 무신경하고 무감각한 대도시의 일상에 함몰되면서, 끊임없이 웃음을 원하고 바라는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시스템 밖을 벗어난 웃음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비판은 사라지고 비난과 타자화만 남은 헛웃음만이 코미디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웃긴 세상, 웃기다고 말하는 게 뭐 어떠냐는 울림이 무대 위 채플린의 방에 가득 맴돕니다. 우리는 언젠가 진실 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있을까요? 아무도 사소화하거나 타자화하지 않고, 예술의 진짜 불온함에 대해 깔깔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을 ‘꿈’ 밖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

 

**사진출처_연희단거리패 제공

  필자_유햅쌀

  소개_시트콤같은인생살이를위해, 재미진무언가를찾습니다. 인간은유희적동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