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14:08ㆍReview
‘실연’의 아픔을 덜어내는 ‘사랑’ - 아픈 만큼 가벼워지는 것
- 조원석
- 조회수 523 / 2008.08.04
연극 ‘실연’을 보았다. 실연한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실연’은 재미있었다. 극의 형식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재미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연’이 주는 재미가 있었다. ‘실연’의 재미는 무게덜기에서 나온다.
첫 번째 무게덜기: ‘비유하기’
표를 내고 계단을 내려가면 붉은 지시봉을 든 공익근무요원이 관객석으로 안내를 한다. 관객석에 앉으면 무대가 지하철역의 승강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객이 극장 안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고 관객을 안내하던 공익근무요원은 배우였으니 공연은 관객의 입장과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관객이 들어오기도 전에 무대에 있던 배우는 공익근무요원만이 아니었다. 승강장에 있는 벤치, 그 벤치에 관객을 향해 등을 보이고 누워있는 노숙자 역시 관객의 어수선함 속에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또는 갑자기; 시선이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노숙자의 등 건너편에서 솟아오른 손인형. 연극은 어느새 시작되고 있었다. 손인형이 노숙자를 깨우고 노숙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사랑을 이야기 하는 노숙자, 노숙자의 행색 속에서 가난의 무게는 찾아 볼 수 없다.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는 노숙자. 여기서도 동화의 신비한 능력은 발휘된다. 노숙자를 가난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고, 신비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능력. 그래서 이 신비한 능력을 가진 노숙자는 손인형을 사람으로, 배우로 만들어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준다. - 이 연극은 한편의 동화다. ‘묘사’가 아니라 ‘비유’에 가까운 동화. 그래서 관객의 입장을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로 비유하는 것으로 이 연극은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실연은 무엇에 비유했는가? 노란 리본. 실연이 노란리본과 어울린다니! - ‘비유하기’는 ‘뛰어 넘기’를 통해 역설과 만나기 때문에 재미있다.
두 번째 무게덜기: ‘긍정하기’
연극은 실연을 개인의 음지에서 사회의 양지로 끌어낸다. 동사무소 직원이 실연한 여자에게 실연 리본을 달아주고, 실연 실태 조사도 하는 사회. “실연당하다.”의 피동을 “실연하다.”의 능동으로 바꾸는 캠페인을 벌이는 사회, 보험 판매원이 실연 보험을 파는 사회. 실연을 많이 한 여자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사회. 그리고 실연의 횟수를 나타내는 노란 리본을 마치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사는 사회. - ‘실연’은 ‘사랑을 이루지 못함’이다. 열아홉 번 실연한 여자는 열아홉 번 사랑한 여자이고 열아홉 번 실패한 여자다. 하지만, ‘실패’를 긍정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여자는 ‘사랑’을 부정한다.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는 여자. 이상하다. 왜 실연을 긍정하는 사회에서 여자는 사랑을 부정하는 걸까? ‘긍정하기’가 ‘이해하기’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동화 같은 세상이라고 해서 아픔까지도 동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연의 아픔을 양지로 끌어냈지만 그 양지에는 빛은 있고 따뜻함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 대한민국도 동화 같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헌법의 일면만 봐도 그렇다.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 사회. 헌법이 그리는 사회는 동화 같은 사회다. 실연을 긍정하는 사회와 헌법이 그리는 사회는 별반 다를 게 없다. - ‘긍정하기’는 ‘비판하기’의 역설을 띄고 있어 재미있다.
세 번째 무게덜기: ‘사랑하기’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한 여자. 이 여자 앞에 한 번도 사랑을 하지 못한 남자가 나타난다. 이 남자는 사랑은 못 해봤지만 사랑을 받아 본 적은 있다. 한 여고생이 이 남자를 짝사랑했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고생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실연의 아픔을 준 남자가 열아홉 번 실연의 아픔을 겪은 여자 앞에 나타나 노란 리본을 달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실연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어쩌면 이 남자는 이미 실연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실연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 지하철 공익근무요원인 이 남자를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여고생. 이 여고생을 짐짓 모른 척 무시하는 남자. 아끼는 물건을 벤치에 몰래 놓고 도망가는 여고생과 분실물 수거를 위해 물건을 걷지만 이 물건이 여고생이 놓고 간 것을 알기에 따로 보관하는 남자. 그리고 남자는 이 물건을 돌려 주려했고, 여고생은 받지 않고 떠난다. 여고생은 사랑을 고백했지만 남자는 사랑을 받지 않았다. -
실연을 알고 있는 남자가 실연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실연을 느끼고 싶은 것이고,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니, 이미 사랑하고 있었기에 여자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미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남자는 여자가 지하철을 타는 것을 쭉 지켜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슴에 단 리본의 개수가 늘어나는 것도 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여고생이 남자를 숨어서 지켜 본 것과 같은 행동이다. 아무런 감정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지켜보는 것이 가능한가? 극에서는 이것이 가능한 것처럼 비친다. 이 남자는 특이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자는 자신이 사랑을 못 느끼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결코 특이하지 않다. 사랑은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여고생의 정성과 마음을 알았지만 사랑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지 특이한 경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여고생의 경우처럼. 그런데 왜 이 남자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한 걸까? 혹시 열아홉 번 사랑하고 실연한 여자에게 자신은 그 열아홉 명의 남자들과는 다르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실연을 가르쳐달라는 말은 곧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말과 같다. 결국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여자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는 실연을 가르쳐 달라는 남자의 부탁을 들어준다. 실연을 배우고 싶으면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킨십의 정형을 보여 준다. 그러나 남자는 무덤덤하다. 사랑의 감정이 일지 않아서? 아니다 여자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리본의 숫자가 늘어나는 동안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 이마를 만지고 싶다는 남자. 이마에 살포시 손을 얹는 남자.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정지한다. “돌고래 이마 같아요.” 라고 말하는 남자. 특이한 남자다. 열아홉 개의 리본과는 다른 사랑.
남자는 실연이 두렵다. 하지만 여자가 떠날 것을 알지만 떠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여자는 사랑이 두렵다. 실연을 겪을 남자의 아픔을 알지만 사랑이 두려워 떠난다. - ‘사랑하기’의 목적은 ‘사랑받기’가 아니다. ‘사랑하기’의 목적은 ‘사랑하기’이다. 여자가 사랑을 두려워 한 까닭은 사랑받지 못할 때의 아픔 때문이었다. 남자가 실연을 두려워했던 것은 사랑할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떠나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은 그것이 또한 ‘사랑하기’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는 그것이 이미 역설이기 때문에 재미있다.
*극단 ‘고양이다방’의 첫 실연(實演)이 실연(失戀)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보충설명
일 시 : 2008년 7월 16일(수) ~ 7월 27일(일)
장 소 : 대학로 상명아트홀 2관
제 작 : 제작_고양이다방 cafe.naver.com/brokenheart2008
작가_김특영 연출_황혜진 출연_최희진 이재호 이경훈 장서원 노수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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